#118
청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신체와 직접 닿은 게 아님에도 그의 숨결이 닿은 것 같았고, 그의 얇은 입술과 마주한 것 같았다. 청난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체통 없이…….”
“손등이 간지러워서 그랬어요. 안 되나요?”
백매가 혼이 난 강아지처럼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청난은 제가 이 표정에 매우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청난은 시선을 허공으로 향했다.
“그럼 긁으면 되잖니.”
“그렇네요. 사존의 말이 옳아요. 제자가 이토록 부족합니다.”
백매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고, 그의 목은 더욱 낮아졌다. 청난이 이 표정에 약한 걸 아는 걸까. 아닐 것이다. 백매는 제 반응을 계산하여 꾸미는 아이는 아니다. 저 표정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청난은 그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청난이 차마 아무 말 못 하자 백매가 말을 덧붙였다.
“사존께서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럴 때 어찌해야 할지…….”
“내가 네게 가르칠 게 남았더냐? 그리고……!”
-타앗!
청난의 말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뒤로 빼더니 크게 물러났다. 그런 그의 옆에는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보폭으로 물러선 백매가 서 있었다. 청난의 손이 허공을 매만졌다. 마치 벽을 만지는 듯싶었으나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참 교묘하구나.”
“맞아요. 그리고 이제는 쓰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죠. 비급이 끊어졌거든요.”
“응? 어째서?”
제 앞에 드리워진 진법의 경계를 확인한 청난은 손을 품 안으로 거두었다. 백매는 청난의 물음에 대답하려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을 골랐다.
“음… 우선, 사존에 관한 모든 것은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못했어요. 각주의 것은 수야각의 것이었고, 당시 임시각주였던 사백이 모든 걸 총괄하셨죠. 그리고 그분은…….”
“말 안 해도 알겠구나.”
이 땅에 남겨진 흔적을 애지중지했겠지. 그의 유품은 단 하나라도 남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께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야.”
“맞아요. 사백께선 남겨진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지으셨어요. 그리고 하산하실 때에는 모든 것을 다음 각주에게 남기셨습니다. 이름뿐인 각주였죠. 그는 얼마나 무능한지 비급을 나누려 하지 않았어요. 머잖아서 그것이 유실되었단 사실이 알려졌죠. 그때는 이미 제가 비승한 후였습니다.”
“다음 대 각주가 누구였는데?”
“…….”
백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청난 사후의 각주이니 분명 그 또한 아는 자일 것이다. 청난은 그를 재촉하지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결국 백매가 포기하고 답을 뱉었다.
“유 사숙이요.”
“사숙을 공경해야지.”
“……죄송합니다…….”
“되었다. 없는 곳에선 나라님도 욕한다지 않느냐. 그래도 다음엔 주의하거라.”
“그럴게요, 사존.”
백매가 말한 그는 청난의 사제인데, 사실 유능하지 못한 건 맞았다. 그가 유회평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친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각주가 된 것도 같은 이유였을 터였다.
각주가 죽고, 소각주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고, 각주 대리는 하산. 이것만 생각해 봐도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난장판이었을지 짐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권력 찬탈의 피바람마저 불게 할 수는 없었겠지. 그로 인해 가장 그럴듯한 사람을 잡아다 앉혔던 모양이다.
비급이 유실된 게 그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문지기가 약하다면 보물 창고는 노려지기 마련. 심지어 그 도둑이 폐관 중인 소각주를 제외하고는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라면 어찌 막았겠는가.
“그자의 욕심이 이리도 과할 줄은 몰랐어.”
“사실 전 알았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욕심이 많아요.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청난이 그를 보았다. 그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처럼 그의 표정은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다.
‘원래도 이렇게 사람을 싫어했던가.’
아니면 신선이 되어 그런 건가. 청난은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상황이 받쳐 주지 못하니 다음을 기약하며 진법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의 입 속이겠구나. 부디 배탈이 나 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욕심만큼이나 위장이 광활한 놈이죠.”
“하하, 그리 말하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유독 연화에게만 놈 놈 해 댔지. 그때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느냐?”
“사존께서도 모르셨던 것을 제가 알 리가 없었죠. 단지… 그 녀석은 예전부터 밥맛이었을 뿐이에요.”
“그… 랬구나…….”
군자 같은 말투와 그렇지 못한 단어 선택에 청난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가 두루두루 잘 지낼 수 있던 것은 오히려 한 사람을 지독하게 싫어한 덕택도 어느 정도 있던 것 같았다.
‘한 사람 외에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니. 참 착하기도 하지.’
그 한 사람이 대역무도한 짓을 벌였으니 청난의 팔이 안으로 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찰그랑.
청난은 자신의 손목에 닿는 금속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청난은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제 손에 한 번 놀라고,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영롱한 빛의 팔찌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이것은 백매가 하고 다니던 법기 중 하나였다.
“별거 아니지만, 사존께 도움이 될 거예요.”
청난은 손을 내리고 제 손목 둘레에 맞게 줄어든 팔찌를 매만졌다. 확실히 이것은 그에겐 불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팔찌에서는 묵직한 영기 외에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영기 보관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법기를 달고 다니게 된 거라 했었지.’
사실 청난에게도 그리 큰 도움이 못 되긴 했다. 영기는 동력이고, 사람은 도구다. 도구가 못 버텨 준다면 아무리 동력이 좋아 봐야 별 쓸모도 없었다.
그가 이제 와 이러는 것은 아무래도 진영의 행동이 신경 쓰인 것이겠지.
‘영역 표시하는 강아지 같네.’
물론 이성적으로 그런 의도를 가진 건 아닐 터였다.
“마음에 드는구나. 잘 쓰마.”
청난이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또 자신의 반지를 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지는 청난의 손가락으로 옮겨 왔다. 그다음으로는 허리에 달고 있던 옥패를 풀었고, 또 다음으론 허리띠를 장식하던 끈을 풀었다.
백매가 청난의 허리 뒤로 손을 둘러 끈의 매듭을 지어 주었다. 그와 다시 만났을 때는 모든 걸 조심스러워하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몸이 닿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워졌다. 백매의 손은 어찌나 큰지 순식간에 정리를 끝마쳤다.
“이건 너무 과하지 않니?”
백매는 대답 대신 슬며시 미소 짓기만 하였다.
그리고 이내 머리 관을 고정했던 비녀를 뽑아내자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카락이 마치 연극을 끝내는 가림 천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순간 해가 완전히 떨어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참으로 공교롭지. 세상이 그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어. 누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백매는 청난과 마주 본 자세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비녀를 꽂아 주었다. 청난은 평소에도 목이 아플까 머리를 올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백매의 비녀까지 했음에도 전혀 무겁지 않았다.
이로써 백매의 몸에 걸쳐졌던 모든 장신구가 청난에게로 옮겨 왔다. 단 하나만 빼고.
백매는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빼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착용하려면 구멍을 뚫어야 하는 것 같았고, 청난의 귓불은 아무런 상처 없이 깨끗했다. 백매는 그것을 빼고 난 후에야 발견한 것인지 그저 귀걸이를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청난이 머리카락을 완전히 귀 뒤로 넘기고 고개를 기울이자 깨끗한 귓불과 함께 하얗고 가느다란 목이 완전히 드러났다.
“왜, 그것은 주지 않을 생각이더냐?”
청난이 씨익 웃었다. 도발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유혹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매는 곧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사존이 그러실 리 없잖아. 내가 굼떠서 그런 것뿐이야.’
“아니, 아니에요. 잠시만요.”
백매의 얇고 긴 손가락이 청난의 귓불을 건드렸다. 그것은 마치 발자국 없이 소복이 쌓인 눈 같았다. 첫 발자국을 내도 되는 걸까 망설이게 만드는 그런 눈밭 말이다.
눈이 많이 내린 밤이 지나면 수야각도 이렇게 새하얗게 물들었었다. 백매에게 눈은 차갑고 추울 뿐인 두려운 것이었으나, 수야각에 온 첫해는 방 안이 따뜻했던 덕분인지 그저 하얗게 펼쳐진 들을 넋 놓고 감상하게 되었었다. 그러다 옆방의 사형이 비몽사몽 한 채로 눈밭에 가 누웠었지. 그렇게 하얀 들판은 지저분해지고 말았다.
“읏.”
“아, 죄송해요. 아프신가요?”
“아니다. 괜찮아, 괜찮아.”
백매는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그의 귓불에 구멍을 내었다. 그곳은 자신의 것이었던 긴 귀걸이로 장식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백매는 심장이 저려 오는 것 같았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자신이 인간이었더라면 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놀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신선이니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몸이 반응한 것임을 알았다.
청난이 방금처럼 반대쪽 귓불을 드러냈다. 백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찔러 내었다.
백매가 하고 있던 귀걸이는 쓸데없이 찰랑거렸다. 오로지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자신이 했을 때는 귀찮기만 하였는데, 그것이 청난에게 걸려 있자 백매는 만들어 준 신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순간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이라 하여도 무방할 정도로 청난에게 잘 어울렸다. 아래로 뻗은 장식이 마치 청난의 올곧은 심성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 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찬란한 빛은 청난 그 자체 같았다. 적어도 백매에겐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