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몇몇 신선들이 감히 선계를 교통편 취급하는 모양새에 화를 내긴 하였으나, 백매는 내려가서 사태 파악 좀 하라는 말만 건넬 뿐 무시하였다. 물론 요마귀괴가 들끓을 때도 선계에 틀어박혀 있던 이들이니 그들의 행차는 기대할 게 못 되었다.
수야산 아래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청난이 백매와 떠돌았을 때에도 잠깐 이 근방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토록 사람이 많지 않았다. 수야각의 기세가 흔들리자 상인들이 빠르게 빠져나갔던 것이다.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건물을 개조하거나 새로 짓는 자들도 몇 없었고, 그 덕에 이곳은 삼백 년 전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활기마저 되찾았으니, 자연히 오래전 풍경과 겹쳐 보였다.
한연화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었다면, 청난은 이를 그가 주는 선물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청난과 백매는 바로 산에 오르지 않고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기서 가장 큰 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안쪽까지 사람이 가득 차 북적거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을 차거나 철선을 쥐거나 혹은 부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팔 할은 수선자인가 보네.’
“손님 두 분이신가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종업원의 외침에 가게 안의 시선들이 일순 모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또 왔군’이라고 적혀 있는 듯싶었다.
“예, 둘입니다.”
“이쪽으로 모실게요!”
그들은 이 층에 있는 벽 쪽 자리에 안내되었다.
이미 많은 수선자가 모인 까닭에 시선을 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태 그들을 주시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청난은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백매에게서 답을 찾았다.
“매아, 그거 잠시 숨겨 줄 수 있겠니.”
청난의 손가락 끝이 백매의 귀걸이를 가리켰다. 사실 귀걸이뿐만 아니라 모든 장신구가 영기로 충만한 법기였으니, 몇몇 보는 눈이 있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청난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그의 귀는 정말 하얗고 아무런 자국이 없었기에 오히려 흑심을 일으켰다. 하지만 백매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진 않았다. 백매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치렁치렁했던 그의 귀걸이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백매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물잔을 잡으려 손을 뻗자 팔찌가 사라지고 물을 따르자 반지가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휘황찬란했던 법보들이 사라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뿐더러 마치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모였던 시선은 금세 흩어졌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지켜본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없앤 거니?”
“아직이요. 보이지 않게만 했어요. 으음…….”
백매가 음식도 넣지 않은 입을 우물우물하며 말을 골랐다.
“그래, 범인들에겐 보이지 않겠구나.”
청난이 그의 말을 대신해 주자 백매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백매에게 청난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어떤 육체를 입고 어떤 병을 갖고 있더라도 백매에게 그는 여전히 만인지상이었고 때로는 저 위의 옥황상제보다도 드높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길에 널린 평범한 양민들과 비슷하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는 평소엔 서로 마주치지 않다가도 종종 이렇게 백매를 양쪽에서 끌어당기며 혼란스럽게 했다.
이것은 청난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백매가 그와 마음을 나누었던 그날 밤의 물음을 찾는다면 이 또한 정리될 것이다.
시선을 당기던 장신구도 사라지고 내온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그들을 신경 쓰는 눈길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 청난의 손은 식사에 집중하는 한편, 귀는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였다.
“먹고 바로 갈 텐가?”
“물론일세. 더 늦었다간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
“자네는 걱정되지 않는가? 함정이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어제 이후로는 내려오는 사람도 끊겼다잖나.”
“흥, 좋으니까 안 내려오는 것이겠지. 첫날 내려온 자들 중에는 문파로 돌아가 벌써부터 호의호식하고 있는 자들도 있네. 어느 요마가 먹이를 놓아주나?”
“하긴 그렇지.”
청난은 이 대화를 듣다가 한숨을 뱉을 뻔했다. 대체 어느 문파 제자들인지 묻고 싶었다.
높은 등급의 개체들은 힘도 지력도 좋기 때문에 먹잇감을 회유해 제 둥지로 데려올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심시키기 위해 놓아주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나 이 경우에는 수사들이 꼬일 수밖에 없는 영기라는 미끼가 있었다. 어째서 저들은 의심 한번 안 하는 거지? 망한 건 수야각인데 어째서 단체로 퇴보를 한 걸까.
아쉽게도 이런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백매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어디가 흥하고 어디가 쇠했는지 같은 역사의 흐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까닭까지는 파고들지 않았었다. 하긴 천상에 오른 그에게는 수선계도 속세일진대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의 양상은 비슷비슷했다. 종합해 보자면 한 가지였다. 들어가는 사람은 있으나 나오는 사람은 없다. 청난이 짧게 혀를 찼다.
“내가 알기론 본각은 그리 규모 있지 않은데, 언제 그리 증축을 하였을꼬.”
“사존께서는 수야각이 그리우신가요?”
“아니.”
청난은 대답한 직후에야 자신이 너무 단호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해 다시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구나. 그런데 왜 물은 게냐? 내가 그린다고 하면 선물해 주기라도 하려고?”
“물론이에요. 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해 드리고 싶어요.”
“아서라. 그러다 네가 질책받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라고? 난 그런 망령은 아니다. 시간은 흘려보낼 줄 알아야지. 내 그리움은 나 홀로 간직하겠다. 제 아집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저런 꼴이 되는 게야.”
청난의 젓가락 끝이 수야산을 가리켰다. 수야각에 진지를 튼 이를 겨냥한 말이라는 것은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사존의 말이 옳아요. 역시 사존께선 대단하십니다.”
“그럼, 누구 스승인데.”
“아니에요.”
“응? 뭐가 말이냐.”
“당신은 그저 당신이기 때문에 멋지고, 옳고, 드높은 거예요. 당신의 제자가 누구인지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냥 당신이면 돼요.”
백매의 말이 무기였다면 지금쯤 청난은 가게 벽을 뚫고 날아가 수야산을 뒹굴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백매가 그렇게 하진 않았겠지만. 청난은 이렇게 갑작스러운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제자일 때는 제 스승이 최고다 말하는 것을 마냥 귀엽게 여기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데, 어떻게 가볍게 넘길 수 있겠는가.
“너는 그런 말을 참 갑자기도 하는구나.”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에요. 늘 하던 생각이죠.”
진심이 담긴 그 다정한 말을 들으니 청난은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바위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그 바위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을 것이다.
‘내가 네 스승이 아니었어도 그리 말했을까.’
그에게 따뜻한 집을 준 게 내가 아니었더라도, 단지 길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인연이었어도 너는 그리 말해 주었을까.
그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이후 이러한 고민은 언제나 청난에게 따라붙었다. 청난이 수선자가 아니기에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의 심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청난은 고심에 빠지고, 백매는 애정에 빠졌다. 그 탓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이내 단 한순간도 정적 따윈 없던 것처럼 평범한 대화를 이어 나가며 주변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식당에서 광장으로, 거기서 또 저잣거리로. 그렇게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자 그제야 산에 올랐다.
해가 낮은 곳을 비추며 그 빛이 길게 늘어졌다. 거리만큼이나 산길 또한 붉은 노을로 물들었다. 아직은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산길을 오르기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사존, 불편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렇게 하마. 아직은 괜찮아.”
청난은 오래간만에 산을 타고 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산어귀에서부터 자신의 발로 중턱까지 온 것은 퍽 오래간만이었다. 만약 이곳에 다른 수사들이 없었더라면 청난은 이런 급박한 때에 제 발로 걷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사가 많다는 것은 눈과 귀가 많다는 것이며, 그중 하나가 신선이 놓은 거미줄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수야각은 대문파 중에서는 가장 속세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곳 또한 대문파. 오르는 길이 동네 산책하듯 갈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었다. 청난은 동네 뒷산에 오르는 것 또한 힘겨워했는데 이런 산을 오르는 게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이미 이 산에 나고 자란 모든 나무들이 청난의 지팡이가 되었다.
청난의 오른손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나무를 짚어 몸의 체중을 나누었고, 청난의 왼손은 산어귀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그가 쥘 것이 별게 있겠는가. 백매의 손이었다.
산을 오르기 전 백매는 그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입에서 이런 대담한 부탁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청난은 기쁘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손 너머에서부터 그의 맑은 기운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청난은 지치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의 기운은 폭포수처럼 강렬했으며, 또 상쾌했다. 그것이 제 안으로 와 다정하게 녹아드니 청난은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힘들어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받아 내고 싶었다.
‘이러다 중독되면 어떡하지.’
이 결정되지 않은 관계의 결말이 청난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끝나기라도 한다면, 청난은 스스로가 폐인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이 몸으로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고된 수련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나날을 보내야 할까.
그러던 때에 백매가 맞잡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매아?”
그러더니 스스로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