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 백매는 지난밤의 울음과 심장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경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 덕분에 평소엔 없던 용기가 차올랐다. 그는 청난을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마치 자신의 것을 지키는 짐승처럼.
“매아?”
청난이 부르는 그 두 글자는 백매의 마음을 흔들어 대었다. 얼음이 있다면 녹을 것이고 불이 타오르고 있다면 꺼질 것이었다. 백매는 긴장이 풀려 그의 목에 고개를 파묻었다.
순간 당황한 심경이 그대로 굳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눈알을 꺼내 닦고 다시 넣을 수 없단 것이 한스러웠다. 그것이 불가한 이상 가급적 빨리 이곳을 벗어나 저 둘의 민폐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심경의 실천은 빨랐다. 그녀는 무인답게 두 손을 굳게 마주쳐 인사하고는 말없이 휙 돌아서 나가 버렸다.
그렇게 서점에 청난과 백매 단둘만이 남게 되자 청난은 웃어른으로서 아이를 달래 주었다.
“어째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게냐?”
말은 탓하는 듯하지만 그의 손은 다정함을 머금고 백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아, 일어나거라. 네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 나를 곤란하게 하진 않을 테지?”
말 잘 듣는 백매는 곧장 팔을 풀었다.
“옳지.”
청난이 백매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다음 해가 떠오르기 전에 마을 어귀로 향했다.
지난밤에 청운에게 외출을 알리자 그는 며칠분으로 사 둔 식자재를 한 끼에 쏟아부었다. 음식은 많았지만 청난의 위장 공간에는 한계가 있던 터라 그는 모든 종류를 한 입씩만 먹는 사치를 부려야 했다. 수야각주 시절에도 부리지 않았던 사치 중의 사치였다.
진영에게는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내 두었다. 답장은 받지 못했다. 아직 서신을 받지 못했거나 피곤해 일찍 잠든 모양이었다.
새벽녘의 거리는 오가는 사람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 탓에 습격을 받기 전 언제 화를 입을까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길가에 놓은 채 치우지 않은 가판들, 굴러다니는 아이들의 공,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푸드덕거리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청난을 안심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백매의 온기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청난은 백매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만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청난은 퍼드덕 놀라며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그는 전생에 만인지상이었고, 현생에서는 작은 마을의 해결사였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볼 시야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연애관 중 일부는 삼백 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청난에겐 ‘누군가의 앞에서’ ‘제자와의 연애 행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생각지 못할 일이었고 조금 과정을 덧붙이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청난은 닭장을 습격한 고양이를 본 닭처럼 퍼드덕대며 백매를 밀어 내었다.
청난이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침착하게 고개를 돌리자 진영이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진영은 멀리서 보았을 때와 달리 두 사람 사이에 공간이 벌어져 있자 빠르게 양손을 내저었다.
“아, 하시던 거 계속하셔도 돼요. 전 익숙하고, 음… 또 금방 갈 거니까요.”
“…….”
백매에게 고백하고 벽을 허문 건 고작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는 대체 뭐가 익숙하다는 거지? 설마 내가 평소에도 이랬던 건 아니겠지?
청난이 자신의 과오를 되돌아보려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진영이 와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청난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진영에게 미소 지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더냐?”
“드릴 게 있어서요. 어제 서신 받고 바로 찾아봤는데, 엄마 몰래 찾으려니 좀 오래 걸리더라고요. 겨우 시간을 맞췄네요.”
“이제까지 찾기만 한 거야? 잠도 안 자고?”
“잠은 두 분 떠나신 후 실컷 자면 되니까요.”
진영은 소매 안을 뒤적이더니 얇고 긴 천 주머니를 슬금슬금 꺼냈다. 그 천 주머니는 얇고 가늘었으나 길이는 긴 탓에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의 완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청난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저희 집안의 가보로 내려온 연검입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사존, 그러니까 수야각주 진청난이 쓰던 것이라 하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니라도 쓸모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진영이 건넨 검을 받아 든 청난은 천 주머니를 풀었다. 검집에 담겨 있음에도 평범한 검의 두께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얇았다. 청난은 이 검집을 몰라볼 수 없었다. 가볍게 훑어보면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조각된 난초 문양. 이것은 그의 형인 진주국이 청난의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주문 제작한 것으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었다.
“맞아, 내 것이다.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스릉-.
검이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삼백 년이나 지난 걸 생각하면 그간 얼마나 관리를 잘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검 끝에 장식이 없는 것을 뺀다면 삼백 년 전의 물건을 그대로 들고 왔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구나. 정말 잘…….”
주국은 청난의 것이라면 뭐든 직접 손보곤 했다. 이것 또한 그가 살아 있을 무렵에는 직접 손질했을 터. 그는 주인 없는 검을 무슨 마음으로 보살폈을까.
청난이 감상에 젖으려던 차에 진영의 말이 분위기를 깨트렸다.
“아무래도 가보니까요.”
“…….”
그렇지. 가보는 잘 관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걸 몰래 가지고 나왔다고?”
“엄마는 사존의 정체를 모르시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하하하, 들키기 전에 돌아와 주셔야 해요.”
“하하, 그러마. 내 제자를 억울하게 만들 순 없지.”
청난이 피식 웃었다. 청난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렸다가 멈칫하였다. 대신 허공에 멈춘 손을 보고 의아해하는 진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제자와의 관계가 발전된 탓인지, 아니면 연인에 가까운 이를 쓰다듬어 주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진영을 쓰다듬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참 그리고 이건……. 그냥 제가 드리는 거예요.”
진영이 또다시 소매를 뒤적이자 이번에는 목걸이가 나왔다.
그 목걸이에는 작은 옥구슬이 걸려 있었다. 육안으로 볼 때는 가판점에서 파는 싸구려 옥처럼 보였지만, 백매는 이것에서 영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진영이 청난에게 준다고 말한 이상, 저것은 청난의 소유였다. 그러니 백매가 감히 먼저 만질 수 있겠는가. 백매는 그저 두 눈으로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법기인가?”
“네, 맞아요. 제 스승님께서 주셨던 거예요. 술김에 주셨던 모양이지만… 몇 번 도움이 된 적은 있었어요. 사형께는 돌멩이 같겠지만, 행운의 부적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내게는 참으로 과분한 것이지.”
청난이 몸이 돌리며 진영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그 몸짓의 의미는 백매도 잘 알았다. 오래전 자신이 치장을 도와드릴 때마다 본 것이었으니 잘 알 수밖에. 목걸이를 걸어 달라는 뜻이었다. 백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역할을 남에게 넘긴 적이 없었다.
백매는 괘씸하게도 스승보다 먼저 목걸이를 받아 냈다.
“사제의 정성 고맙네. 사존, 제자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는 진영에게 찰나 만에 눈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청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영을 대할 때 충분히 존중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상대가 청난으로 바뀌자 진영을 대할 때는 기분이 나빴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과히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런 태도 변화에 이미 익숙해져 버리고 만 진영은 그저 지은 미소를 떨치지 않고 다른 세계 사람을 보는 양 바라만 보았다. 물론 정말 다른 세계 존재이기도 했고.
“좋아.”
청난이 몸을 살짝 틀자 그의 등이 백매를 바라보게 되었다. 백매는 목걸이의 매듭을 굳이 풀지 않고 왕관을 씌우듯이 그의 머리 위에서 차분히 내려 주었다. 목걸이 끈이 청난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빙 두르자 백매가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은 이 일만 수십 년을 단련한 사람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탓에 청난의 목과 닿아 버리는 불상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긴, 내가 그걸 십 년간 시키긴 했네…….’
그에 대한 감정은 정리되었지만 관계는 정리되지 않았다. 그 탓에 청난은 이 애매한 관계가 청산되기 전까진 감히 원할 수도 없고 한숨마저 속으로 삭여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진영은 의문이 들었다.
‘목걸이 하나 하는데도 저런 분위기를 풍길 필요가 있는 거야?’
연모하면 다 저리 되는 건가? 진영도 과거에 이성을 만나 호감을 가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들처럼 다가가면 날아갈까, 만지면 사라질까 조심스러우면서 또 눈빛으로는 갈망하는 그런 경험은 한 적이 없었다. 진영은 이해하지 못할, 또 하고 싶지 않은 광경에 그저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
“사존, 사형, 무사히 다녀오세요.”
“오냐, 그동안 복습하거라.”
“네!”
진영의 기운찬 짧은 대답을 뒤로하고 그들은 또다시 아랑 마을을 떠났다.
수야산이 있는 지역까지 도착하는 것은 정말 금방이었다. 얼마나 빨랐는지 출발한 날의 점심 식사를 이곳에서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평소 백매가 움직인 것 같은 축지법만으로는 이토록 빠르게 이동하기 어려웠다. 백매는 가능할지언정 청난의 몸으로는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 탓에 선택한 방법은 선계를 경유하는 것이었다.
백매는 선계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하늘과 육지의 틈은 그를 빠르게 받아들여 주었고, 그가 원하는 곳에 적절히 강림시켜 주었다. 이 얼마나 편한가. 마치 청운이 가지고 있는 서대륙의 이야기책에 나오는 ‘순간 이동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