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자신이 그 진청난 본인이 아니었다면 절반 정도는 정답에 가까운 소문들에 감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 있는데 수야산에 있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신에게 집착적인 성향이 있는 걸 차치하고서도 선계에서 이렇게 존재감을 떨치지 못해 안달인 신선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연화!
그는 대체 무슨 속셈으로 수야각에 나타나 제 힘을 펼치고 있는 것인가. 그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했을 때 이것은 좋은 징조일 수 없었다.
청난과 백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심경은 그들이 이토록 심각해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수선계는 마치 그림 속 세상 같으니 이유를 알아 봤자 책 속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심경은 곧 흥미를 잃었다.
“소문이 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두 분께서 요마귀괴의 소문을 찾으시니 겸사겸사 제게도 일찍 알려진 것입니다. 이제 한 사흘 정도 되었습니다.”
사흘 전이라면 연화문에서의 일이 벌어진 직후였다. 세 명의 선인들이 죄 없는 아이를 쫓고 있을 때 한연화는 이미 수야각에서 다음 수를 놓고 있던 것이다.
청난과 백매는 시선을 주고받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 우선 들어가시겠어요?”
“아닙니다. 저도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모든 걸 쏟아 낼 심산인 양 말을 이었다.
“사흘 전, 수야산에 강한 빛줄기가 쏟아졌습니다. 누가 봐도 신의 강림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용은 승천했을 게 분명하다고 말이죠. 어쨌든 신화적인 모습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수야각이 이제는 망했… 아니, 사람이 적어졌다지만.”
심경이 백매를 힐끗 쳐다보았다. 일순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지만 그것뿐이었다. 그의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자 심경은 이어서 말했다.
“어쨌든 그곳은 수야산입니다. 여전히 수사는 많고, 그들은 신선 같은 술법을 사용하잖습니까. 그러니 조금 대단하다는 평에서 그친 정도였습니다.”
전생에는 마른하늘에 벼락이 쳤던 것만으로도 그 난리가 났었는데, 이 세대는 물론, 전전 세대까지 비승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오히려 별거 아닌 취급을 해 대었다. 청난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심경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 아이들 사이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야각에 반신이 강림하셨다. 그분께서 가르침을 남기고 덕을 채워 하늘에 오르려 하신다’라고 말입니다.”
“이번엔 호응이 좋았겠어요. 현재의 수선계는 변함이 적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구조니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회라고 생각하겠죠.”
“맞습니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실제로 산에 오른 자들도 있었죠. 그리고 셋째 날, 그들이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영기를 머금고 말이죠.”
“…….”
청난은 할 말을 잃었다. 이어질 이야기가 뻔했기 때문이다. 정말 게으르며 나태하다. 신이 와서 하루아침에 경지가 일취월장할 수 있었더라면 신선계는 비리 인사로 들끓었겠지! 왜 의심하지 않는 거야? 그들은 영기를 하사받거나 한 게 결코 아닐 것이다.
청난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심 소저, 또 한 번 심수표국의 힘을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수야각에서 일어나는 소문을 알아보면 되겠습니까?”
“수야각엔 직접 가 볼 생각이에요. 대신 소문을 좀 내 주세요.”
“소문이요?”
“네. 음… 뭐가 좋을까. ‘수야각에는 극독이 퍼져 있으니 방문한 자들은 영기를 사용하지 말고 정양해야 한다’ 정도면 되겠네요.”
“거짓 소문을 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수야각에 대한?”
심경은 떨떠름했다. 여기에 수야각 제자가 있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아무리 지금은 쇠퇴했다고 하나 수야각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대문파다. 그 인연이 수선계와 속세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가르침이 끊어지고 마땅히 이름난 수사도 없는데 여태껏 간판이나마 유지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야각을 잘못 건드리면 적어도 더 이상 수선계에 발을 들이밀 수 없게 될 것이다. 심경은 상관없었지만, 가문의 업인 표국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차후에 제 이름을 쓰셔도 좋습니다.”
심경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백매가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경은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수야각 수사라는 것도 그리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가 보여 준 능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의 수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의문은 깊어 갔다. 수야각에 이런 힘을 가진 제자가 있었더라면 소문이 안 났을 리 없는데, 수야각에 화씨 성을 가진 수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가명인가? 굳이 가명을 쓸 필요가 있나.’
청 책사가 소개한 그의 이름은 화매. 어느 신선의 이름과 닮아 있었다. 이런 작명은 흔했다. 심경의 주변만 해도 ‘연화’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으니.
‘음… 뭐, 수야각의 숨겨진 비밀 무기, 이런 거겠지.’
심경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 수사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마치 선두에 선 장군의 등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하였다. 그 장군은 하늘을 가르고 산도 갈라, 그의 수호하에 있으면 제 손에는 조금의 상처도 나지 않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아무리 고민해 봐야 결론은 똑같을 터였다. 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소문인지는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낭자께서는 회광반조라고 들어 보셨나요?”
“회광반조(回光返照) 말입니까? 네,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죽어 가던 무인이 마지막으로 힘을 내고 쓰러질 때를 말하는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어 가는 때에 그런 힘을 낼 수 있을까요? 그들이 갑자기 하늘의 힘을 받거나 하진 않았을 테지요.”
“그렇죠.”
심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어쩐지 심경은 그에게 수업을 받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학생은 자신이 이해했는지 적절히 반응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야 스승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테니.
심경의 대답에 청난의 눈꼬리가 둥글게 말렸다. 그는 설명을 이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생문이 열렸을 거예요.”
“생문이 뭡니까?”
“체내의 생기가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그들이 죽기 직전에 쓴 것은 자신의 수명인 것이죠. 그것은 얼핏 보면 수선자가 쌓은 영기와 비슷합니다.”
“그 말은, 설마 수야각에 다녀간 사람들이…….”
“네.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을 겁니다. 더구나 그런 식으로 힘을 얻어 성취를 이룬 사람은 제 힘에 취하기 쉽죠. 부디 제가 처리할 때까지 스스로의 생을 좀먹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대체 누가…….”
“그 이상은 알아 좋을 게 없습니다.”
심경의 말을 자른 건 신비로운 화씨 수사였다.
이번에도 그의 말의 내용은 화내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도 그의 음성이 재주를 부린 탓에 심경은 오히려 그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청난은 백매가 일부러 그런 화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의 말투는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내가 키웠으니 당연한가. 헷갈리네.’
청난은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제 제자가 망각으로 잊혀 가는 스승의 목소리를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되뇌며 비승하는 그날까지 버텨 왔다는 것을.
신선은 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걸 벌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신선이 져야 할 업이라 말한다. 하지만 화백매에게는 더 이상 잊지 않아도 된다는 축복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제 머릿속의 기억뿐이니 이것을 지킬 수 있단 것에 안심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청난은 그저 잘 자란 아들 같고도 제자 같은 제 사람의 모습에 뿌듯함만 느낄 뿐이었다.
“좋습니다. 소문을 내고, 정체는 모르고. 그러면 되는 겁니까?”
“기분 상해하지 마세요. 혹여 소저께 화가 될까 말을 아끼는 것이에요. 돌아오면 알려 드릴게요.”
“아, 오해입니다. 기분 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차 되물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말씀하신 게 맞아요. 잘 부탁드릴게요.”
청난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백매가 대신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심경은 청 책사에 비해 화 선사는 대하기 어려웠다. 그는 백매에게 맞인사를 한 후 곧바로 청난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수야산엔 언제 가십니까. 이제 돌아오셨는데.”
“음…….”
청난은 백매를 힐끗 보았다. 그곳까지 자신의 발로 간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백매의 발을 빌려야 했으니 그의 의사가 중요했다.
백매는 청난과 눈을 마주치자 수줍게 웃기만 하였다. 이 대화의 결론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미소에 청난 또한 미소로 화답하고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나려고요.”
“빠르십니다. 채비만 겨우 하실 수 있겠습니다. 아직 여독도 채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이미 한발 늦었으니 서둘러야지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걱정 끼치지 마세요.”
“하하, 미안합니다, 소저.”
심경은 청난의 ‘금방’을 말뿐이라고 생각했다. 수야산과 아랑 마을 사이의 거리는 아무리 과장해도 ‘금방’ 다녀올 거리는 아니었고, 신선이 번쩍 안아 축지법으로 다녀올 것이란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심경은 오자마자 바로 먼 길을 떠나는 게 걱정되었다.
또한 청난이 가진 정은 이 마을에 귀속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다 하더라도 마을 사람이란 이유로 청난은 심경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걱정하는 이와 걱정받는 이의 짧은 대화에서는 짐짓 애정이 느껴졌다. 고로 백매는 이것이 꽤나 못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