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청난은 뒤로 젖혔던 몸을 수그리고 백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고, 언제 크려고 그러느냐?”
“제가 커 버리면 더 이상 쓰다듬어 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래야지 않겠어?”
“음… 그럼 어렵네요. 사존의 손길이 좋지만, 더욱 강인해져서 당신께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너는 이미 충분히 강인하단다.”
“음…….”
“강하지. 내가 거짓을 말하는 걸 본 적 있느냐?”
있다. 청난은 툭하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입에 발린 거짓말들로 타 문파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였으며, 아이들을 달랠 때는 사형제의 없는 과거도 만들어 내곤 했었다. 하지만 백매는 그가 까마귀는 하얗다고 말한다 하여도 고개를 끄덕일 자였다.
“없습니다. 사존은 옳은 말만 하시죠. 그럼 제자도 그리 생각할게요.”
“옳지, 착하다 착해.”
청난은 고운 손길로 백매를 쓰다듬었고, 백매는 그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들은 예전에도 서로를 대할 때면 주변을 잘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렇게 마음을 나누어 가졌으니 완전히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누가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청운은 제 아들이 하하 호호 애정을 나누는 것을 두 눈에 새겨 담아야 했다.
“크흠-.”
청운의 헛기침 소리에 청난이 뒤늦게 그를 발견했다. 청난은 연애 행각을 들켰음에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쓰다듬는 자세도 바꾸지 않은 채 그를 반겼다.
“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님, 좋은 아침입니다.”
백매가 슬그머니 손을 빼 공수하며 인사를 건넸다.
백매는 웃어른에게는 공경을 다하는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다만 청난 외의 다른 웃어른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만인에 무심한 태도만 남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청난의 아버지인 청운이 생겼으니, 마땅히 공경을 다했다.
하지만 청운은 그 대우에 기뻐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변한 호칭과, 방금 전까지 제 아들과 엉켜 붙어 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이마에 주름이 잡히다 못해 사거리 길이 생길 지경이었다.
“우리 아들, 지난밤에 춥지 않았어?”
청운이 ‘우리’에 힘주어 말했지만 청난은 눈치채지 못했고, 백매는 그까짓 것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 봐야 청운은 범인이었다.
‘사존처럼 드높은 분께서는 양민에게 인자하시지. 하지만 어울리실지언정 그들에게 휘둘려지실 리 없지.’
청난은 아침을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전혀요. 밤새 매아가 돌봐 주었어요.”
“오, 감사합니다, 선사.”
“마땅히 제가 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매의 양손에는 옷가지들이 걸쳐져 있었다. 백매가 옷을 펼쳐 청난의 등 뒤에 가져가니 청난이 자연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청난이 양손을 넣자 백매는 그의 허리에 끈을 묶어 주었다.
청운과 같은 평범한 양민들은 이런 옷시중을 받아 보긴커녕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청운은 그 모습이 다소 야릇하게 보였다. 더구나 제 아들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청운은 다소 쓸쓸해졌다.
“네가 이만할 때가 있었는데…….”
청운이 속삭이듯 말하며 자신의 허리 옆을 짚었다. 지금 백매는 청난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느라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청난은 ‘대화할 때는 마주 보고’라는 신념대로 고개를 삐쭉 내밀어 그런 청운의 모습까지 눈에 담았다. 청난은 파하하 웃었다.
“그게 대체 언제 적이에요?”
“대충 십 년 전이던가.”
“제가 열한 살 때요? 그때도 그것보단 더 컸던 것 같은데요?”
“네가 못 봐서 그래. 너 열한 살 때 얼마나 작고 귀여웠는지 알아? 그걸 보지 못한 게 네 유일한 슬픔일 거란다.”
“아버지, 제가 그 작은 청난인 건 알고 계시는 거죠?”
“이제는 큰 청난이 되었구나. 큰 청난이도 좋지. 얼마나 듬직하냐. 이젠 이 아비보다 키도 더 커져서 찬장에 손이 닿는다니. 내 살다가 그런 모습도 보게 될 줄이야. 감동받아 울 뻔했단다.”
“그러다 저희 마을에 강이 하나 생기겠어요.”
청난과 청운은 서로 농담 아닌 농담을 주고받았다. 청운의 이렇게 과대 포장한 수식어는 이십 년쯤 겪으니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백매의 섬세한 손길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안경을 씌워 주었다. 굴곡진 유리가 가까워지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청난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백매의 얼굴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평소엔 느지막이 오시잖아요.”
“참, 심 소저께서 오셨단다.”
“소저께서요?”
“그래, 서점에 계시니 가 보렴.”
“응, 그럴게요.”
심경이 진영 없이 혼자 찾아올 이유가 있던가. 청난은 의아했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이 백매와 함께 서점 문을 열었다. 무인인 그녀는 한 사람의 기척을 바로 감지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에 맞춰 적절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눈에 비친 두 사람을 보고 심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백매의 존재에 놀란 게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도 기척도 소리도 없었으니.
“어디 나가십니까?”
“소저께서 오셨다고 하셔서 나왔는데, 문제가 있나요?”
“그럼 왜 그렇게 꾸미고 오신 건가요? 조금 과한 것 같은데요.”
심경의 솔직한 발언에 청난은 또다시 의아해졌다. 백매는 때마침 그가 원하는 물건인 청동 거울을 꺼내어 그를 비춰 주었다.
거울 너머로 본 청난은 정말 잘 꾸며져 있었다. 언제 이런 걸 꽂아 두었는지, 틀어 올린 그의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는 비녀는 은은한 멋을 풍겼는데, 그에 비해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내의는 아주 살짝 보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값비싸 보였다. 내의만도 이런데 중의와 외의는 굳이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청난은 이런 옷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백매는 이것을 언제 구비해 둔 것일까. 청운과 대화하는 사이에 입힌 탓에 청난은 자신이 무엇을 입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 청운이 없었다 하여도 청난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제게 걸어 준 것을 굳이 확인한 적이 없었으니.
청난은 이것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엔 과한 차림새임을 알았기에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좋게 봐 주시니 기쁠 뿐입니다.”
“책사께선 겉치레를 즐기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리 차려입으셨습니까?”
청난은 그녀에게 차마 이것이 제자의 취미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주제를 돌렸다.
“소저, 그 책들은 다 무업니까?”
“아, 이거 말입니까.”
심경은 청난이 볼 수 있도록 책을 들어 보였다. 표지가 낡아 제목이 지워진 것들도 있었으나, 남아 있는 글자들로 어떤 책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병법서군요.”
“맞습니다. 책사를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책사께선 바삐 돌아다니시느라 모르셨겠지만요.”
“하하하……. 그런데 구하기 어렵지 않으셨나요? 과연 심수표국의 능력이 뛰어납니다.”
“음? 아닙니다. 집안에선 절대 안 구해 줬을 겁니다. 이건 여기서 산 겁니다.”
“오… 네?”
청난은 그녀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느라 놀라는 것도 두 박자 늦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청난도 얼핏 들어 본 적 있는 것들이었다. 병법은 청난의 분야가 아니기에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진청난이던 시절에는 주변에 좋은 것들만 있었기 때문에 분명 그녀가 갖고 있는 책 또한 어느 정도 명성을 떨친 양서일 터였다.
청운에게는 병법서를 수집하는 취향은 없었으니 어쩌다 갖게 된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심 소저를 위해 일부러 구해 온 게 아니겠는가.
‘취향이 일반적이었다면 큰돈을 버셨을지도 모르겠네.’
그와 동고동락하는 사이인 청난으로서는 그의 취향이 다소 아쉬웠다.
심경은 청난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독특한 것도 많고, 원하는 건 대부분 구해 주십니다. 나름 단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책을 사러 왔다가 책사께서 계신다 하여 겸사겸사 뵈려던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지금쯤 수야산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 갖춰 입고 나오셨길래 나가는 분을 붙잡는 건 아닐지 염려했습니다.”
“수야산이요?”
“네, 수야산. 선사까지 이곳에 계신 건 참 의외입니다. 사문엔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왜 수야산이 언급되는 것이고, 어째서 백매가 가 봐야 한다는 것일까. 청난은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반응인 건 백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청난 외의 타인에게는 무심한 편이었지만 표정 변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또한 전혀 모르는 눈치이자 이번엔 심경이 당황했다.
“아니, 수야각에 반선께서 강림하셨다고……. 헛소문이었습니까? 아니, 그렇다기엔 증언이 너무 많은데. 화 선사, 전에 수야각 도사라 하셨잖습니까?”
“네, 네. 맞아요. 매아는 수야각 수사입니다. 그런데 반선이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신은 지상에 강림한 지 오래되긴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곁에 있는 데다가 반선이라고 불릴 이유도 없었다. 지금 수야각에 있다는 반선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간혹 뛰어난 수사를 신선이라 추켜세우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청난 또한 그렇게 불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수계 문파들이 몰락한 지 몇 년인데……. 그런 인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청난이 짧은 시간 동안 다각도로 생각하는 와중에 심경이 입을 열었다.
“반선, 진청난입니다.”
“……예? 누구라고요?”
“‘진청난’이라고 합니다. 듣기로는 삼백 년 정도 전 인물인데, 생전의 업적이 뛰어난 탓인지 그가 천겁을 이겨 냈다거나 이미 선계를 밟았다거나, 혹은 죽지 않고 비승했다는 등 떠도는 이야기가 많았던 수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