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백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존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내칠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가 슬퍼하는 것이었다.
백매는 풀지 않은 양팔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평소에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던 것처럼 부드럽게, 그리고 따뜻하게.
“저는 사존이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사존은 늘 공명정대하셨죠. 약자를 돌보셨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것마저 놓으셨어요. 그러니 어떻게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존, 제가 드렸던 말을 기억하세요?”
“네가 한 모든 말을 기억한단다.”
“그래도 또 말할래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연모하고 있어요. 그러니 제게는 공명정대한 사존이 아니셔도 좋아요. 저는 당신이 제게만은 이기적이셨으면 좋겠어요.”
“…….”
청난의 침묵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그의 눈꺼풀이 낮게 드리워졌다.
“알아요. 당신에게 특별하길 바라는 건 제게 맞지 않는 감투인 거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이 없는 시간 동안 욕심을 배우고 말았어요. 아니, 사실 전 오래전부터 욕심내 왔어요. 아닌 척했을 뿐이에요.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욕심이 났어요. 네, 너무나 욕심나서, 그래서 제가 너무 싫을 정도로 욕심이 났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백매의 굵은 손목이 눈을 가렸다. 그 탓에 청난은 그가 우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청난은 제 솔직한 낯을 드러내었다. 그랬더니 이 어리숙한 제자도 심해 속에 묵혔던 것을 꺼내 주었다.
거의 평생을 주목받으며, 온몸을 돌돌 가리고 살았던 청난은 지금만큼은 그와 함께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와 속살마저 부대끼는 이 느낌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백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음울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왜 포기하지 못할까요. 왜 포기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제가 한심해서, 그래서 죄송해요. 저는 제가 너무 싫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진 않아요.”
“미워하지 않아.”
“제가 밉지 않아요?”
“응, 밉지 않아.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어찌 미워할 수 있겠어. 그러니 너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하지만…….”
“그럼 스승이 널 좋아하는 게 싫은 게냐?”
“저, 절대로 아니에요!”
백매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 탓에 청난은 휘청이고 말았다. 다행히도 백매가 빠르게 껴안은 덕분에 바닥에 부딪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완전히 상체를 일으킨 백매는 제 스승이 다치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자신이 그를 껴안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즉시 팔을 풀었다.
“아니, 이건 급해서 그만……!”
“난 좋아. 네가 좋은 만큼 네가 안는 것도 좋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하지만… 네가 나와 같은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청난이 고개를 기울였다. 풀어진 머리카락이 그것에 따라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저, 전……!”
“나는 널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는 내가 키웠고, 내가 가르쳤지. 그래, 오직 나만이 너를 가르쳤다. 나는 네가 어떤 식으로 식사를 하는지, 어떤 날씨를 가장 좋아하는지, 어떤 향이 널 웃게 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 그것들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존…….”
“그래서 두려워. 내가 네게 감정은 가르치지 않았잖니.”
청난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백매는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난은 백매의 위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그래서 생각을 해 보았단다. 네게 숙제를 내 주면 어떨까 싶더구나.”
“숙제, 말인가요……?”
“응, 네 감정을 다시금 생각해 보거라. 그리고 해답에 따라 날 불러 주렴.”
백매가 삼백 년을 넘도록 지녔던 마음이 이제 와 달라졌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청난이 그것을 바랐으니, 백매는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마땅했다. 백매는 그가 원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제 감정을 고심할 것이었다.
백매는 자신의 가슴 앞에서 손을 모아 포권하였다.
“제자가 명을 받습니다.”
청난이 눈을 감았다. 그는 미소 짓지 않았다. 하지만 백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청난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잠기운이 가시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어젯밤 일이었다.
그래, 내가 고백한 거 맞지? 아닌가. 결론이 났다 말할 수 없기에 헷갈렸다.
사실 지난밤은 다소 감정적이었다. 좀 더 조리 있게 말했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호소하고 말았다.
‘으음, 아니야. 우린 스승과 제자 사이지 연모하는 사이가 아니잖아. 잘했어. 잘한 거야.’
청난은 스스로를 토닥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백매가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아, 사존. 벌써 기침하셨나요? 어제는 피곤하지는…….”
실컷 말을 이어 나가던 백매가 고개를 돌렸다. 청난은 그의 붉어진 귓불만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귀걸이 때문에 부어오른 것도 아닐 테지.
“내가 자는 사이 무얼 생각했기에 그리도 부끄러워해?”
“아, 아니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진짜예요!”
백매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의 고개는 다시 돌아왔건만 눈동자는 아직 허공을 헤매었다. 이 아이는 참으로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그가 잠을 자지 않는 건 알았다. 그는 지난밤 동안 잠든 제 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청난은 그가 자신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던 것이 생각났다. 청난은 그가 기대었던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그곳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 외에는 무엇도 없었다.
아. 그렇구나.
그에게는 이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한번 멈추었던 나의 심장이 또다시 멈출까 봐. 삼백 년 전 그는 싸늘해진 시신을 안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청난은 습관적으로 그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역지사지해 보았다.
‘바닥을 피로 메꾸고 있는 백매를 본다면. 그가 내 품에서 차갑게 식어 버린다면…….’
콰다당-.
“사존?”
청난이 침상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청난은 상체는 바닥에, 하체는 침상에 걸쳐져 있는 우스꽝스러운 자세였지만 백매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청난의 표정이 귀신을 본 범인처럼 너무나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사존,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악몽을 꾸신 건가요? 제가 밤사이 주변을 살펴보았으니 걱정 마세요. 당신을 위협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의 가족도요.”
백매는 입과 함께 손을 바삐 움직여 청난을 침상에 앉혀 주었다. 그러곤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청난의 팔을 살짝 들어 올리기까지 하며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먼저 잡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많이 발전했다 할 수 있었다.
“아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그냥 널 놀래 주려고 그랬어. 그냥 일어나다가 실수한 것뿐이야. 청난은 변명을 생각했지만 거짓을 입에 담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당장 일어나 네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네가 슬퍼할까 봐, 그렇지 않았으면 해서.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
……아니, 진짜 이유는 그보다 더 간단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청난은 과거를 돌릴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방금 전의 상상은 너무나 끔찍했다. 이 아이는 그 끔찍한 걸 겪고 삼백 년을 지내 온 것이다. 이걸 어찌 갚을 수 있을까. 그에게 진 빚이 너무나 컸다.
청난의 낯이 좋아질 생각을 않자 백매는 그가 앉은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정말 강아지 같고 귀여웠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는 울상 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청난의 볼에 생기가 돌며 미소를 지었다.
“악몽 같은 건 꾸지 않았어. 그냥 널…….”
음울한 기분은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청난은 말을 완성할 수 없었다. 완성될 말은 ‘널 안고 싶었어’였다. 그런데 어찌 말할까. 백매는 어젯밤 일로 어느 정도 짐을 던 것 같았지만 청난은 그 반대였다. 그에게 제 감정을 말했으니 이제는 눈 가리고 아웅도 못 한다.
그가 고심한 끝에 서로의 감정이 다른 종류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청난은 제자를 희롱한 파렴치한 스승이 되지 않겠는가.
청난의 말이 두 번이나 허공으로 사라지니 백매는 꽤 감질났다. 그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다가 곧 상체를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안은 것도, 안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가 되었다. 그 탓에 그들은 서로 가까웠다.
정말 가까웠다!
파렴치한 스승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지 일 초도 되지 않았건만 이런 시련이 내려오니, 청난은 깜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빼냈다.
“뭐, 뭐 하는 거냐?”
“사존, 제자가 아직 어려 사존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부디 말을 아끼지 말아 주세요.”
지금의 백매는 청난보다 연상이라 할 수 있었다. 몸의 나이뿐만 아니라 살아 있던 기간을 합쳐도 그가 월등하게 많았다.
하지만 청난에게는 마냥 어린아이였다. 청난에게 그는 마치 허리를 붙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열 살짜리 아이와 진배없이 여겨졌다. 그러니 어찌 그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