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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12화 (112/146)

#112

오늘따라 달이 커, 마치 어느 대단한 집의 창문처럼 보였다. 저 ‘창’을 열면 백매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허무맹랑하고 동심 넘치는 상상마저 스쳐 갔다.

그때, 척척-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울려 왔다. 그 소리는 곧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로 이어졌다.

“아직 안 잤구나.”

“달이 보기 좋아서요.”

청운은 작은 당과와 호리병을 들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청난을 살찌워 공처럼 둥글게 만들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아버진 왜 아직 안 주무세요?”

“네가 자지 않아서.”

그는 그리 말하곤 창가 앞에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생각한 대로 호리병 안에 든 것은 결코 술이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 또 약차였다. 청난은 이러다 몸에서 약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얼핏 지나간 청난의 찡그림을 본체만체한 청운은 꼬치에 꿰인 당과를 청난에게 건네었다.

“난아.”

“네, 아버지.”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

진영에게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또한 비슷한 말을 건네었다. 청운은 더더욱 주국과 닮은 면이 있었다. 특히나 가끔씩 자신을 세 살배기 어린애 보듯 한다는 점이 말이다.

오랜 그리움은 또다시 제 앞에 찾아왔다. 청난은 목이 메었다. 그것이 티 나지 않도록 의식하여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청운은 못마땅해 보였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할까. 의문스러울 때, 그가 말을 덧붙였다.

“손주는 입양하면 되지 않느냐.”

“푸흡! 켁, 콜록콜록.”

“아이고오, 난아.”

청난이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청난은 몇 번을 더 캑캑거린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모르겠냐. 아마 너보다 일찍 알았다고 장담한단다. 너는 참 영특한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야.”

“제가 그랬던가요?”

“그랬지. 그만큼 숨기는 것도 많고.”

“…….”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 염려 말렴.”

“……나중엔 다 말씀드릴게요.”

“그래 주면 고맙지.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비범하다는 것은 진즉 알았지. 다만 이 애비가 부족하여 네게 누가 될까 걱정일 뿐이야. 네 아버지라며 고집부릴 생각 따윈 없단다. 그러니 내가 짐이 된다면…….”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청난은 자신의 아버지인 청운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진주국이 아니었다. 주국과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지지를 받았었다. 하지만 청운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를 지지해 주었다. 서로 다른 형태, 그러나 같은 애정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 제 아버지예요.”

“……그, 그러냐…….”

청운은 메어 오는 목을 쓰디쓴 약차로 달래었다. 청난을 위해 약재를 팍팍 넣은 것인데, 이상하게도 달게만 느껴졌다. 청운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허허 참, 내가 언제 이렇게 아들 바보가 된 것인지.”

“아버지도 본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네요. 온 마을이 다 알걸요?”

“훌륭한 아들을 둔 덕이지.”

청운과는 매일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어찌나 남은 말이 많은지 그들은 한참이나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 밤중의 차가운 바람이 창문 너머로 불어오자 그때야 시간이 무르익었음을 깨달았다. 청운이 가져온 것들은 이제 흔적만이 남았다. 청운은 청난이 이불 안에 몸을 구겨 넣는 것까지 본 후에야 그것을 들고 나갔다.

다른 두 웃음소리가 퍼졌던 이 방에는 이제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남아 허전함이 돌았다.

탁-.

또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 소리가 들린 쪽은 문 너머가 아니었다. 청운이 굳게 닫아 놓았던 창문이 열리며 그 틈새로 큼지막한 발이 들어왔다.

그 발의 주인인 화백매는 빠르게 들어오고는 찬 바람이 따라올까 서둘러 창을 닫아걸었다.

백매는 이번에도 청난의 머리맡에 앉아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두 눈꺼풀이 숨을 쉴 때마다 사르륵 떨리는 것이 그의 마음을 애타게 하였다. 청난의 피부는 하얗고, 또 얇았다. 원래도 갸름하던 선은 더욱 뚜렷해졌다. 청난이 바스락거리며 뒤척였다. 그것은 익숙한 몸짓이었기에 백매는 때마침 몸을 뒤로 빼어 그와 부딪치지 않을 수 있었다. 청난의 머리카락이 몸을 따라오지 못하고 하얀 목을 드러냈다.

꿀꺽. 백매는 저곳에 머리를 파묻고 싶은 욕망을 굳게 참아 내었다. 대신 그의 몸이 향한 곳은 그의 가슴께였다. 백매는 그곳에 얼굴을 눕혔다. 두꺼운 침구 너머로 청난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두근.

그것은 여전히 현실감 없는 현실이었다.

백매는 중독된 듯 그것에서 귀를 떼어 내지 못했다.

두근두근.

아주 오래전, 삼백 년 전 그날에도 이렇게 그의 심장에 귀 기울였었다. 그때의 고요함이 얼마나 허망했는지, 그때의 서늘함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신선이 되기 전이라 망각의 영향을 받는 시절이었건만 그것만큼은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눈을 감아 반복되는 소리에 집중하였을 때, 그의 머리를 덮는 손길이 느껴졌다.

백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푸른빛의 두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언제 깨셨어요?”

백매가 서둘러 몸을 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청난의 손이 그의 소매를 붙잡은 탓에 더 이상 멀어지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에서 멈추어야 했다. 백매는 잡힌 손과 청난을 번갈아 보았다. 청난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백매는 도로 그의 곁에 앉았다.

“제가 사존의 잠을 방해했습니다.”

“아니다. 너 때문에 깬 게 아니야.”

“그럼……?”

“아직 잠들지 않았었어.”

“……네에?”

그렇다면 자신이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것도 다 보았던 것 아닌가? 백매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튕겨 올라갈 뻔하였다.

“무얼 그리 놀라. 어리광은 다 피웠더냐?”

백매는 바로 대답하지 않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이 껄껄 웃으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백매는 얼른 다가와 그의 등을 받쳐 주었다. 그 덕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청난이 고개를 올리기만 하였는데, 백매의 금빛의 두 눈동자가 지척에 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참으로 신기했다. 보고 있을 뿐인데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싶게 만들었다.

“네가 없는 사이에 여러 말을 들었단다.”

“무슨 말을 들으셨나요?”

“내게 행복해지라 하더구나.”

백매는 가까이 온 김에 구겨진 청난의 침구를 정리해 주었다. 청난의 말은 백매가 바라던 것이기에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저도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걸요. 그걸 위해서라면 제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침구가 구김 없이 청난의 온몸을 감싸 안자 백매는 침상 아래에 주저앉아 청난을 올려다보았다. 백매는 그를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높고 높은 사존이시니 저는 능히 그래야 했다. 청난은 낮아진 그의 머리카락을 손안에서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퍽 다정하였으니 백매는 중독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행복해지면 좋겠구나. 그런데 내 앞에 벽이 있으니, 아직은 그것이 힘들단다.”

“그 벽이 무엇인가요?”

“……너. 너란다, 매아.”

청난의 말에 백매가 시무룩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입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뻐끔거리기만 하였다.

‘알고 있었어. 사존에겐 내가 필요하지 않아.’

알고 있었지만, 사실 알지 못했다. 아닐 것이라며 마음 한편에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그 벌임이 분명했다.

“멀리서, 멀리서 지켜만 보면 안 될까요? 매아가 삼백 년을 살았더니, 그만 욕심을 가지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아니,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청난은 저 눈동자에서 슬픔이 흘러넘칠까 두려웠다. 청난은 그의 슬픔을 원하지 않았고, 그를 달래는 것은 언제나 청난의 일이었다. 청난은 상체를 기울이며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청난의 어깨는 가늘게 떨렸고, 청난의 숨소리는 그의 귓가를 가득 메꾸었다.

백매는 놀랐고,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그는 더해진 무게감만큼 힘을 주는 것도 잊고야 말았다.

철퍼덕.

결국 백매의 등은 바닥과 마주 닿아 버렸다.

“사존, 괜찮으세요?”

청난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제 스승을 염려한 제자가 온몸으로 끌어안은 덕분이었다. 청난에게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에 그는 눈을 끔벅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청난이 고개를 숙이니 바로 앞에서 그의 콧대가 보였다. 눈동자를 살짝 굴리니 여전히 끔뻑거리는 그의 입매 또한 보였다.

청난은 그 모습을 볼 뿐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탓에 백매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누워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드는 것이 사존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를 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청난은 작정하고 그의 몸 위에 자신을 파묻었다. 마침 턱 아래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가기 알맞은 형태였다. 그곳에 푹 들어가니 더 이상 금빛의 눈동자는 볼 수 없었다.

청난은 상자 안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편안해졌고, 폐관 수련하는 수선자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사, 사존, 불편하실 테니 올라가 주무시는 게…….”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네… 에?”

“눈을 뜨면 네가 있길 바라고, 식사를 할 때면 건너편에 네가 보이길 바라. 네가 덮어 주는 침구가 좋고, 너의 부축이 좋아.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어.”

“……제자는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답할 거라 생각했다. 너는 착한 아이니 말이야. 하지만 말이다, 매아야. 나는 널 떠나고 말았는데, 그런 내가 널 붙잡는다면 정말 이기적인 스승이 아니겠느냐.”

청난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미소에는 평소의 여유로움 대신 자조가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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