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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10화 (1부 완결) (110/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10화

비록 마탑의 소유이긴 하지만, 감옥은 대륙의 가장 북단에 있는 작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안 그래도 초겨울이라 추운데 서늘한 감옥의 냉기까지 더해져 감옥 안은 생각 이상으로 쌀쌀했다.

그러나 나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비어츠 공작을 어디에 감금했지.’

속으로 생각하는데, 갑자기 요란스러운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거의 뛰다시피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 모퉁이를 두 번쯤 꺾자 그제야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쇠창살 앞에 레르하겐이 서 있었다.

“로드님.”

내 등장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지 레르하겐은 딱히 놀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옆으로 간 나는, 누가 봐도 그가 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잔상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왜 왔느냐.”

“말리려고요. 외할…… 공작을 죽…… 이지 말라고요.”

나는 쇠창살 안으로 보이는 내 외할아버지, 아, 이제는 온전히 엘비어츠 공작으로 불러야 하는 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듯 그는 바닥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는 빛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필시 거짓이리라.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향해 웃어 주던, 내 유일한 혈육의 처참한 몰골에 나는 일부러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죽이지 마세요.”

레르하겐은 내 말에 나를 힐긋 보았다. 설마 그 또한 일리안처럼 내가 엘비어츠 공작을 놓지 못해서 살려 두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급히 입을 열려는데, 레르하겐이 먼저 입을 뗐다.

“네가 물었지. 누가 내게 상처를 입혔냐고.”

그 뜬금없는 말에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말에 집중했다. 아무리 캐물어도 피하기만 하던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말이 맞아. 내게 상처를 입힌 것도, 네 외할아버지에게 흑마법을 보여 준 이도 마왕이다.”

“…….”

어느 정도 가늠은 했지만 실제로 확인하고 나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여전히 미동 없는 엘비어츠 공작을 한 번, 레르하겐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그럼 그 마왕…… 이름이 뭐였죠?”

“카렌.”

“그래요, 카렌이 내 외할아버지를 꼬드겨서 나를 아이로 만들었다고요?”

“그래.”

“왜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마왕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

엘비어츠 공작이 흑마법에 손을 댄 이유야 어렵지 않게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니인 레베카를 부활시키는 것. 거기에 어려진 내가 필요해 흑마법을 걸어 나를 아이로 만들고 어찌 손을 써 보려고 한 거겠지.

그러나 마왕씩이나 되는 인간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엘비어츠 공작을 도와 이 번거로운 일을 행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마왕이 원하는 것은 부활이다.”

“그건 짐작이 가요. 아마도 힘을 모아 마족을 다시 일으키고, 이 차원을 손에 넣으려는 거겠죠. 뭐, 말하면서도 다소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가 부활하려면, 내가 사라져야 한다.”

“……왜요?”

“내가, 그치를 용납할 수 없으니.”

레르하겐이 이렇게 단호하게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에게 있어 세상 만물이 모두 다 똑같이 의미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반응이 다소 의외여서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지금 마왕이 부활을 원하고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를 말미암아 외할아버지를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저까지 끌어들였다는 거죠? 게다가 자신의 부활에 걸림돌이 되는 로드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거네요?”

“그래.”

갑자기 거창해진 이야기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차라리 귀족들과의 알력이 더 쉽고 간단했어. 권력 암투가 더 쉽고 단순했다고.

“마왕의 부활을 막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차원이 다시 한번 함락당하겠지. 인간들은 죽고, 타 종족들은 숨어 지내고.”

“공존하는 방법은 없죠?”

“없다. 마족은 절대 인간과 공존하지 않아. 그래서 겔라가…… 후회했던 거다.”

“주신께서요?”

“겔라는, 영면에 들기 전까지 카렌을 만들어 낸 걸 후회했지.”

신마저도 창조한 걸 후회한 존재라.

나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엘비어츠 공작의 너덜너덜한 모습에 나는 문득 내가 아이가 된 뒤 제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생각 이상으로 오래된 계획일지도 몰라요. 저를 처음 만난 날, 공작이 그랬거든요.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아무리 흑마법이라도 시전자의 건강까지 갉아먹을 정도라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는 걸 의미하겠죠.”

“아마도.”

“아까 전 하시스가 그랬어요. 엘비어츠 공작을 제외하고, 내 흑마법을 풀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그게 혹시 카렌인가요?”

“그렇다.”

“역시.”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엘비어츠 공작을 죽일 생각부터 하면 어떡해요? 아무리 카렌이 나를 어른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해도 차선책으로 공작을 살려 둬야죠.”

“내가 죽이는 게 아니다.”

“……네?”

“내가 저자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카렌이, 저자를 죽이려고 할까 봐 온 것이다.”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니까 레르하겐은 엘비어츠 공작의 안위를 보호하러 온 것인가? 실제로 온실에서 카렌은 내 손을 이용해 엘비어츠 공작을 죽이려고 했다. 적의 손에 넘어간 포로는 죽는 게 가장 큰 도움이니까.

하지만.

“그럼 로드님이 그를 막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저한테 엘비어츠 공작이 죽어도 안심하라는 말을 하셨…….”

“아니.”

“…….”

“나는 그자를 상대할 수 없어.”

그제야 나는 레르하겐이 그동안 모든 것을 내게 비밀로 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의 옅은 벽안이 내게 꽂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레르하겐은 카렌을 이길 수 없는 거다.

그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보다도, 그가 그 사실을 알면서 내게 숨겼다는 것이 더욱더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말을 아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가 우리의 적이라는, 그래서 불안을 일으킬까 걱정한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안.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다가,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불안할까 봐 숨겼던 거였어요?”

레르하겐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침묵은 내게 긍정처럼 다가왔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보다 명백히 강한 적, 실체를 알 수 없는 적, 그리고 언제 어떻게 내게 접근할지 모르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카렌의 행적부터 추적하고, 죽이죠.”

“…….”

“그게 답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레르하겐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렵지 않나?”

“모르겠어요. 두렵다고 뭐가 변하나요?”

그래, 변하지 않는다.

두려움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공포는 굴복만 낳는다. 걱정은 미련만 불러일으키니, 종국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저 아쉬움과 후회뿐일 것이다.

“이것저것 재고, 미적거리고, 계산하다가 큰코다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요. 카렌이 이 모든 것의 배후라면, 그를 죽이면 되겠네요. 어떻게든.”

“…….”

“로드님한테 모든 걸 다 걸 생각 없어요. 아, 그렇다고 제가 나서서 모든 걸 다 홀로 짊어지고 희생할 생각도 없고요. 이번 일로 느낀 게, 솔직히 저 혼자는 진짜로 역량이 부족해요.”

“그래서.”

“그러니까요. 어떻게든 해 보자고요. 엘비어츠 공작을 잡았으니, 행적을 추적해 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서 모가지를 날려 버리는 거죠.”

“…….”

“내가 말했죠? 난 한번 넘어진 곳에서는 다시 넘어지지 않아요. 멍청하고 요령 없긴 한데, 학습력은 뛰어나서.”

그렇게 말하며 나는 레르하겐을 향해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호기롭게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레르하겐은 그런 나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을 본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조만간 세베르를 독대할 생각이에요.”

“네 정체를 아는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요. 부딪쳐 봐야죠. 나를 싫어하든, 나를 좋아하든, 어느 쪽이든, 의중을 헤아려 봐야 할 때가 온 거 같아요. 그래야 일이 진척되든지 말든지 하겠죠.”

난 내 손으로 외할아버지를 잡았다. 이제 더 이상 미련이 남는 것도 없었다. 이제부턴 그저 필요한 것을 행하고 손에 넣는 것.

그것만이 전부였다.

“리건이 무사하게 깨어났으면 좋겠어요.”

“깨어날 거다.”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 제대로 돌아갈 거예요.”

원래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로.

레르하겐은 내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하나 나와 그 모두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 * *

아, 피곤해.

화사한 햇살이 파고드는 방 안.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뜬 나는 왠지 모르게 은은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미간을 좁혔다.

어제 엘비어츠 공작을 죽이니 마니 하면서 난리를 친 것 때문일까, 마치 침대에 그대로 박제되기라도 한 듯이 몸이 무거웠다.

조금만 더 잘까 고민하다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에 멈칫했다.

“어?”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랑하고 통통하던 손이 길고 곧게 뻗어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작아진 듯한 침대의 사이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폭신한 이불 아래 감춰진 늘씬한 몸.

설마.

멍하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새하얗고 갸름한 얼굴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우아한 웨이브를 그리고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 살짝 위로 올라간 눈꼬리, 콧날, 입술, 긴 목과 도드라진 쇄골, 풍만한 가슴과 허리, 굴곡진 몸매, 긴 다리…….

마치 꿈을 꾸는 듯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이것이 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거울 속에 비낀 내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 이런 미친.”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이의 것과 완전히 다른,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아 올려 웃고 말았다.

나는 하룻밤 새에, 다시 어른으로 돌아왔다.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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