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9화
입을 연 자는 다름 아닌 리플리 자작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나름대로 귀족으로서의 마지막 고집이 들어 있었다. 내 눈에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아, 델멘 공작이 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시끄럽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내 손으로 처리한 자이고, 그와 번번이 대립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가 내 상대편에 서서 잡음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어떤 공격을 어떻게 퍼부어야 내가 상처를 받는지 아는 이였고, 또한 내가 어느 정도까지 그의 말대꾸를 용납해 주는지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금의 틈만 생기면 나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그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원로원과 적당하게 평형을 이룰 수 있었다.
‘역시, 너무 일찍 보내 버렸나. 이래서 좀 더 시간을 끌었던 건데. 델멘 공작이 무사하게 아이리스의 자리를 공고히 해 주고 물러나면, 아이리스가 원로원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애초에 나는 델멘 공작과 아이리스를 갈라놓을 생각이 없었다. 아, 물론 그렇게 보이려고 일부러 엘비어츠 공작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부녀 사이의 관계가 파탄으로 향할 것처럼 말을 퍼뜨리긴 했지만, 내가 아이리스에게 제안한 것은 애초에 ‘아버지를 밀어내라-’가 아닌 ‘아버지를 설득해 물러나게 하고 네가 델멘 공작이 되어라-’라는 것이었다.
‘그 후 아이리스의 자리를 공고히 해서, 원로원의 수장이 되면 그때부턴 마음껏 귀족들을 휘두르려고 했는데.’
훌륭한 적군의 수장은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기도 한다. 원로원의 수장이라는 자리는 필연적으로 황제와 대립할 수밖에 없지만, 적절하게 거래를 한다면 귀족원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내 손아귀에 넣어 평안을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아이리스로는 내가 원하는 이 모든 것을 행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직접적으로 원로원의 분위기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한동안은 내가 직접 하나하나 상대하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를 어찌 받아들였는지, 리플리 자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솔직히 갑자기 흑마법사라니, 너무 허황합니다. 엘비어츠 공작 각하는 폐하의 외척이지만, 한때 원로원의 수장이었던 분. 이렇게 귀족을 함부로 대하시면 저희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흑마법사를 놓아 주라고.>
“그게 아니라, 절차에 따라 일단 엘비어츠 공작이 진정으로 흑마법사인지 확인을 해 보고.”
<경.>
“…….”
<경은, 짐이 어떻게 즉위를 했는지 잊었나?>
“……!”
<짐이…… 이제는 흑마법사의 판단까지 경들과 함께 논의를 해야 하나?>
그 순간 자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적나라한 협박이었다.
인형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몇몇 얼굴들에 불만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이라고 다른 할 말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까부터 인형의 손을 꼭 잡고 귀족들을 무심하게 보던 나는 순진하게 웃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흑마법사는 아버지가 처리하신다고 했어.”
“……!”
“그러니까 다들 걱정 마. 아버지는 드래곤 로드니까, 어떻게 흑마법사를 포획하고 처리하는지 무척, 무척 잘 아실 거야.”
다른 말로 하자면 레르하겐한테 걸려서 고통받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다. 황제의 권력으로 가문은 멸족될 것이요, 드래곤 로드의 힘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길 수 있다는 협박.
물론 레르하겐이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들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니까.
과연 내 의도대로 원로원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에 관한 건 외부로 흘리지 않는 게 좋겠군. 강조하자면 짐은 현재 경들과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어찌 되었든 제국의 안위가 첫 번째야. 싸움은 흑마법이 사라진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사람들은 각각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몇몇은, 특히 눈치가 빠른 이들은 이미 계산을 마치고 내 뜻을 따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상황 파악을 어느 정도 해야 귀족을 해 먹든지 말든지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 흑마법사를 척결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비어츠 공만이 흑마법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솔직히 놀랍긴 하지만 진정으로 흑마법이 제국에 침투했다면, 원로원이 빠르게 조치를 취해야 할 거예요.”
아이리스의 말을 받은 것은 아네로제 후작이었다. 그 뒤로 애들러 후작이 조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기로 흑마법은 죽은 이도 살려 낸다고 하던데. 만약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맞아요. 아무리 제국의 군사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흑마법을 상대해 본 기사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원로원은 현재 연거푸 두 수장을 잃었고…….”
“델멘 소공작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때 델멘 공작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불가능한 듯하고…….”
은근히 내 눈치를 보면서 읊조리는 말에 내가 눈썹을 까닥했다.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은 했지만 이미 결정이 난 일을 번복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엘비어츠 공작과 한때 손을 잡았던 이를 미쳤다고 다시 원로원으로 불러들이겠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제가 맡겠습니다.”
약간씩 소란이 피어오르는 원로원의 회의실에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에 조용하게 인형 옆에 서 있던 나마저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세베르 켈리어드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갑자기 내뱉은 한마디는, 짧지만 강렬했고, 회의실은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 침묵은 아까 전의 침묵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귀족들의 눈가에 비낀 것은 놀라움이었다. 아네로제 후작이 떨떠름하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세베르를 향해 물었다.
“무엇을 맡으시겠다고요?”
물음을 던진 것은 아네로제 후작이었으나, 세베르의 시선이 향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 그러니까 인형의 옆에 서 있는, 진짜 에스트리아.
“당분간 원로원은 제가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은 빠르게 인형으로 옮겨갔다. 아마 모르는 이가 봤다면 애초에 황제를 향해 말을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와 시선을 마주친 나는 알고 있었다.
저것은 나를 향해 하는 말이다.
세베르의 말에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나 또한 놀라고 말았다. 아니, 놀라움보다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내 가슴을 콕콕 찔러 대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원로원의 수장이 되는 것을 꺼려 왔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황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원로원의 귀족. 내가 지독하게 싫어서 떠난 자가 갑자기 나와 가까운 곳으로 오겠다고?
심지어 이 상황에서.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설이 세워졌다. 내가 에스트리아라는 것을 알았으니 조치를 취하려는 것인가. 원로원을 다시 손에 넣고 나에게 대항하려는 것인가.
사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리 없단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종류의 가설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얼어붙은 얼굴로 세베르를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켈리어드 대공 전하께서 정식으로 원로원의 수장직을 맡으신다니. 이거 드디어 정상적으로 귀족들의 질서가 잡히는 건가요?”
아네로제 후작의 발랄한 목소리에 몇몇 귀족들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당연했다. 켈리어드 대공은 델멘 공작이나 엘비어츠 공작과 다르다. 그가 수장이 된다면, 원로원은 역대로 가장 엄격한 질서 아래에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델멘 공작과 적당하게 붙어먹던 한가로운 분위기도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귀족과 황제 사이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원로원 수장의 성향으로 결정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베르가 황제를 지지하게 된다면, 원로원도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그 권력을 내주어야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놀랍군. 대공이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그동안 제가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를 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켈리어드 대공이 원로원의 수장이 되겠다고 하는 이상 내가 막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누가 봐도 너무 정당하고 합리적인 데다가, 두 공작의 부재로 인해 혼란스러운 원로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래. 그러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일단은 엘비어츠 공작의 일부터 처리를 하도록 하지. 그사이 경들은 자신의 영지 상황을 파악하고 내게 보고하도록 해라.>
귀족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난 뒤 인형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귀족들의 배웅 속에서 회의실을 빠져나와 집무실로 향한 나는 의외의 방문객에 놀라 미간을 좁혔다.
“아가씨, 회의는 끝난 거야?”
나는 일리안과 그 옆에 퉁명한 얼굴로 서 있는 하시스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흑마법에 관한 것도 잘 말했고?”
“응, 아주. 납득하지는 못한 눈치였지만. 일단은.”
“잘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이곳으로 온 거야?”
내 물음에 일리안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하시스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전하라고 한 게 있어서.”
“전하라고 한 거?”
갑자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하시스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엘비어츠 공작 외에 그 흑마법을 풀 수 있는 존재가 있어.”
“뭐? 그게 누군데?”
“그러니까 엘비어츠 공작이 죽어도 너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시스의 말에 나는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엘비어츠 공작 외에 내 흑마법을 풀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 그가 죽어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박이고 있던 나는 문득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입을 크게 벌렸다.
“혹시, 로드님이 엘비어츠 공작을 만나러 갔어?”
“바로 그거야. 참고로 나는 말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라니. 이 짧은 시간에 갑자기 일이 생길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정작 일리안은 조금 호기심 섞인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뭐, 어차피 죽일 거 아니었나? 저주를 풀 방법도 따로 있겠다. 로드님의 손에 죽어도 별문제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엘비어츠 공작의 끝은 공개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그런데 감옥에서 허무하게 죽이면 어떡해?”
“어…… 그런 이유였어?”
“아니면?”
“나는 또, 죽이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
나는 미미하게 미소 띤 일리안의 얼굴을 보다가 방긋 웃었다. 그러다 삽시에 미소를 지워 내고 그의 발을 콱 밟았다.
“윽.”
“누굴 감히 시험하고 있어? 죽일 생각이긴 했지만, 설사 내가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네가 날 시험해선 안 되지.”
“아아, 아가씨. 발힘이 정말 대단한데?”
“됐고. 이렇게 된 이상 감옥으로 가 봐야겠어. 너희들은 따라오지 마. 거기 생각보다 훨씬 좁아서 너희들까지 설 데 없어.”
물론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저 굳이 감옥까지 우르르 몰려갈 필요성은 못 느낀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애초에 갈 생각이 없었는지 딱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로 워프 마법을 시전했다. 어둠이 나를 확 잡아먹더니, 이내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