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8화
무심하게 서 있던 레르하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찔러본 거였는데, 진짜였나 봐요?”
레르하겐은 그제야 내 말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미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이런 얄팍한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허술하게 틈을 보이는 걸 보면 꽤 심각한 문제 같았다.
“관심 갖지 마라.”
“왜요?”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잠시 그를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다시 한번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행할 때는 몰랐는데, 당해 보니까 알겠네요.”
“…….”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상대가 그것을 숨기면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 리건은 이걸 당하고도 사직서만 내놓다니. 참 성격도 좋아. 나 같으면 당장 한 대 때렸을 텐데.”
“그럼 때려라.”
말을 마친 레르하겐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내 앞에서 급하게 모습을 감춘 적은 많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내가 캐묻는 것이 두려웠나 보다.
아니, 그것은 과연 두려움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레르하겐을 더 쫓아가지 않았다.
물론 그와 할 말이 있는 것은 여전했다.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다만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 또한 유리 온실을 벗어났다.
* * *
엘비어츠 공작이 오는 경로에 수작질을 했기에 기실 그가 도착할 무렵, 귀족들은 이미 원로원 회의실에 도착해 있었다. 게다가 중간에 엘비어츠 공작을 포박하느라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대략 한 시간 정도를 방치당했다.
그것이 억울했는지, 아니면 내심 마음을 졸인 건지, 긴급 소집령을 내린 것치고 내가 다소 유유자적하게 나타나자 귀족들의 표정에 불만이 떠올랐다.
심지어 나는 현재 인형과 함께였다. 저들의 눈에는, 이 급박한 상황에 어린 황녀까지 달고 회의실로 온 내가 매우 고깝게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습관적으로 귀족들을 훑자 그들의 의문 섞인 눈빛이 차례로 우리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인형에게 꽂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도, 인형도 일부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그때, 내게 정확히 꽂히는 눈빛을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이로 꽉 깨물었다.
세베르 켈리어드.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황녀의 모습으로 직접 그를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당연하게 그에게 내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상석으로 가는 내내 대부분의 시선이 당연하게 ‘황제’인 인형에게 꽂혔음에도, 그의 시선만큼은 ‘황녀’인 내게 박혀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그의 눈을 힐긋 보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인형이 자리에 앉자 나는 그 옆에 섰다. 그제야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애들러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긴급 소집령이 날아와 심히 염려했습니다.”
평소라면 당장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했을 애들러 후작은 델멘 공작가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생각보다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와중에도 급한 마음은 참지 못했는지 그의 눈가에는 명백한 독촉의 뜻이 서려 있었다.
“게다가 황녀 전하까지 이리…….”
<짐이 오늘 경들을 소환한 것은.>
그러나 나는 굳이 귀족들의 푸념 따위를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낮게 깔린 인형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내, 살짝 이마를 짚은 인형이 말을 이었다.
<황실과 제국은 물론이요, 이 자리에 있는 경들의 안위를 위협하려는 자가 있어서다.>
“위협이라고 하면은…….”
<어젯밤 델멘 공작가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그 순간 장내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나와 한 의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아이리스 델멘에게 닿았다. 원래라면 델멘 공작이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지만, 나는 이번 소집령을 그가 아닌 아이리스에게 보냈다.
<덕분에 델멘 공작은 가문의 일을 수습하느라 나오지도 못했고.>
“…….”
<뭐, 급습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공작을 부르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야.>
제국 내부에 분분하게 퍼진 델멘 공작가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어서일까, 귀족들은 그저 가볍게 헛기침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도 아이리스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얼추 짐작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자리에 델멘 공작이 앉을 일은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로 대충 눈치챘을 것이다. 아이리스를 이곳에 앉힌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 또한.
아니나 다를까 귀족들의 시선이 아이리스를 한번 훑고 지나갔다. 그 속에는 은근한 마뜩잖음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아이리스의 명망은 델멘 공작이 만들고 수호해 준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공작이 부재중인 지금,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나’는 손뼉을 짝 치고 살짝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어쨌든 델멘 공작가에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 그래서 그에 대해 경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설마 지금 그것 때문에 긴급 소집령을 내리신 겁니까?”
<글쎄, 그럼 안 되나?>
“폐하.”
<애들러 경, 내 보좌관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 급습으로 인해 말이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애들러 후작은 내 말을 듣고 소환의 이유가 단순히 델멘 공작 급습 사건이라고 단정했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그에 몇몇 귀족들의 얼굴에도 난감함이 깃들었다.
그사이 샤트 공작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힐긋 보더니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폐하. 델멘 공작가의 일은 무척이나 유감이지만, 그래도 긴급 소집령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이 와중에도 짐을 가르치려 하는 그 생각은 무척이나 좋아. 최소한 짐이 진정으로 폭군이 되지는 않겠군.>
“폐하, 모든 일에는 법도와 규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충분히 그 심경을 헤아려 드리지 못해 송구하오나.”
<그럼, 말하지를 마.>
“폐하.”
<말하지 말고, 들어.>
“폐…….”
<델멘 공작가를 급습한 것은 흑마법사이다.>
순간 내 말에 어떻게든 대꾸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귀족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아이리스마저도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가 다시 침착함을 찾았다.
장내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고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들의 표정은 미묘한 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며 ‘내’가 느긋하게, 그러나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짐이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짐의 생각을 넘겨짚지 말고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델멘 공작가를 급습한 것은 흑마법사가 맞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흑마법사가 소멸한 지 어언…….”
<몇천 년 전이지. 하지만 경들도 알음알음 전해지는 소문을 들었을 텐데, 최근에 대륙에 마물들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났다는 걸 말이야. 모르는 척하지 마.>
“저희는 못 들어 본 일입니다.”
<황궁에 심어 놓은 첩자만 얼마인데 그런 소문도 못 들어? 일 못 하는 아랫것들은 잘라 버려야지.>
“첩자라니,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럼 그자들, 그냥 짐이 죽여도 되나? 괜찮겠어? 시종이나 시녀들 사이에 섞여 있던데, 아무리 방계나 먼 친척이라고 해도 가문의 핏줄인데 죽으면 가주로서 문제가 되지 않나?>
“폐하.”
<시침 떼지 마. 짐도 경들 앞에 흑마법사니 뭐니 말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부 공개하고 경들에게 알리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이 상황에서까지 짐과 기 싸움을 벌이려 들어?>
“…….”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들과 짐 사이의 알력 다툼이 아니다. 경들에게 귀족으로서 최소한 자부심이 있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곳에 있는 귀족들의 자부심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흑마법의 출현을 몰랐다면 모를까, 내 입에서 진실을 들은 이상 그들은 힘을 합치기보다 각자가 얻을 이익을 위해 움직이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귀족들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는 것은 단 하나.
<귀족 중에 흑마법사가 있다. 짐은 이것을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어. 그래서 경고하는 거야.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짐과 손을 잡자고.>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폐하, 저희는 억울합니다. 저희는 흑마법사인지 무엇인지…….”
<알아. 경들이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것. 알았다면 이렇게 얼굴을 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바로 처형을 했겠지.>
“하면 왜 귀족 중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결국 아까 전부터 내 태도와 말에 담긴 의미 때문에 슬슬 감정이 격앙된 애들러 후작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긴, 첩자의 존재를 들킨 건 그렇다 쳐도, 갑자기 귀족 중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놀랄 수밖에 없지.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들고 말했다.
<엘비어츠 공작이 흑마법사였다. 짐은 아까 전, 그자를 마탑에 넘기고 왔어. 빠른 시일 내로 배후를 캐게 된다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소멸 마법으로 처형할 생각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게다가 소멸 마법이라니요. 그건 인간에게 쓰는 게 아닙니다!”
<엘비어츠 공의 편을 들어 주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 둬.>
“…….”
<이 시간부로 흑마법에 손을 댄 치는, 멸문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완전히 소멸시켜 존엄 한 가닥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존엄 한 가닥마저 남겨 둘 생각이 없다.
서늘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귀족들은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엘비어츠 공작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밝혔을 때, 이들이 순순히 믿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이미 형제자매를 척살한 경험이 있으니까. 외척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흑마법이라니, 이런 공포의 힘은 권력자들이 정적을 제거할 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어느 정도 그 영향을 고려하긴 했다.
엘비어츠 공작이 흑마법사인지와 별개로, 내 경고는 엘비어츠 공작과 약간의 연관이라도 가지면 바로 죽여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심지어 공개 처형.
명예와 긍지를 누구보다도 중히 여기는 이들이, 겨우 황제의 눈 밖에 난 귀족 하나를 살려 보겠다고 가문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래도 폐하, 적절한 절차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명하시면, 저희가 어찌 쉬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멍청한 새끼가 꼭 하나씩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