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7화
* * *
그 수많은 서류 중에서 일리안이 엘비어츠 공작을 짚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그것이 현실임을 자각한 순간, 가장 먼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그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
내가 아는 엘비어츠 공작은 언제나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어마어마한 긍지를 가진 인간이었다. 귀족으로서 평민들을 보호하고, 황실의 권위를 위해 힘쓸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하던 인간이었다.
그것은 세베르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세베르의 긍지가 본인에 대한 자부심과 고결한 성품에서 나온다면, 내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가문과 식솔들을 통솔하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귀족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고, 한참을 생각하였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귀영화야 이미 누린 이였고, 원하는 것이 강력한 힘이라기엔 그는 무인으로서도 꽤나 명망이 있는 자였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시스가 의외의 정보를 알려 준 덕분에 미스터리가 삽시에 풀렸다.
“흑마법은 제물을 바쳐 행하는 사술이죠.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궁극적인 비기이고.”
“…….”
“그녀의 자식인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흑마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나를 이렇게 아이로 만들었다면 뭔가 내가 필요한 상황이구나 짐작할 수 있었어요.”
“……하.”
“하지만 그래도, 그러지 마셨어야죠.”
“…….”
“그동안 제가 얼마나 미우셨나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순간 속이 떨려 왔다. 아니, 속이 떨려 왔다기보다는, 이것이 당신의 마지막이라고 선고하는 듯해서 자꾸만 목이 막혔다.
탁.
바닥에 주저앉은 엘비어츠 공작이 힘겹게 테이블을 잡았다. 그러나 곧, 맥없이 주르륵 미끄러져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허억…… 쿨럭.”
“죽지는 않을 거예요.”
“……으으.”
“아직은 죽일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죽을 생각 하지 마세요.”
엘비어츠 공작은 내 말에 몇 번 움찔거리다가 결국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쓰러졌다. 이내 온실에 찾아온 짙은 고요함에 나는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그 어떤 날이 와도, 내 손으로 그를 처리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밀어졌던 그 손을, 내가 뿌리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다. 나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이대로 준비해 둔 감옥에 가두면…….
그렇게 생각하며 비올레에게 마법사들을 들여보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픽.
갑자기 뺨을 스치는 아릿한 통증에, 엘비어츠 공작을 지나 걸음을 옮기던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손가락으로 뺨을 만져 보자,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사한 햇살이 비춰 들던 온실에 어느샌가 몰려온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사이, 완전히 쓰러져 있던 엘비어츠 공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것을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끝까지 못 볼 꼴 보여 주고 가시겠다는 건가요.”
그렇게 읊조리는데 엘비어츠 공작이 서서히 머리를 들었다. 신성 마법을 걸어 놓은 아티팩트라고는 하나 결국에는 아티팩트였다. 일리안이 아무리 대단한 연금술사라고 해도 결국 마법으로 공격하는 것보다는 그 효과가 못할 것이 자명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저번에는 며칠 동안 누워 있더니, 그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뿐일까.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제압해서 마법사들에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비올레의 마법사들이 엘비어츠 공작을 상대하다간 쉬이 도를 넘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에서까지 엘비어츠 공작을 죽이지 않을 생각을 하냐 뭐라고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몸에 걸린 흑마법을 풀 수 있는 건 엘비어츠 공작뿐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바로 마법을 발현했다. 적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는 멍청한 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 적이 가장 약할 때를 노려야 했다.
[시런스베아.]
내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수많은 칼날이 그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쾅!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면서 쏟아지는 칼날은 그대로 엘비어츠 공작을 관통해 천천히 일어나려고 하는 그를 제압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푹. 잔인하게 살갗을 파고드는 검의 궤도가,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졌다.
[소레디언 스피네어스.]
바닥에 꽂힌 칼날이 일으킨 먼지가 다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시동어를 외웠다. 반짝거리는 빛이 무리 지어 흩어지다가, 순간 긴 창이 되어 그대로 엘비어츠 공작을 관통했다.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물리적인 창과는 좀 다른 거라.
“크윽.”
“그냥, 가만히 계시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읊조리며 나는 온실을 가득 채운 검은색 기운을 올려다보았다. 엘비어츠 공작을 완전히 제압했으니 이제는 사라질 줄 알았던 검은 기운은 여전히 허공을 넘실거리며 나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영역에 들어온 이상 내가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검은 기운을 보며 다시 한번 공격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였다.
‘음?’
조금씩 꿈틀거리는 엘비어츠 공작의 어깨에 나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확실하게 공격을 퍼부었는데, 설마 또 다시 회복한 건가.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하던 나는 문득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설에 행동을 멈추었다.
동시에, 갑자기 익숙한 기운을 가진 누군가가 나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확 떠오르는 느낌에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귓가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하면 네 외할아버지는 죽는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레르하겐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보호에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엘비어츠 공작을 응시했다. 스멀거리는 검은 기운이 그의 몸에 모여들고 있었다.
“이거, 설마…….”
“엘비어츠 공작은 이미 정신을 잃었어. 신성 마법은 마족에게는 잘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흑마법사에게는 꽤나 큰 타격이다.”
“그럼 역시, 지금 마법으로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조종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
“제가 엘비어츠 공작이 죽을 때까지 공격하도록 의도한 거군요.”
“네 손에 잡히면 곤란해지는 인물이니까. 차라리 네가 죽이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굳이 이 상황에서 묻지 않았다. 하지만 레르하겐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그가 이 배후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며칠 전에 레르하겐을 공격한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뭉치기 시작했다. 그에 빠르게 마법을 가동했으나 그것보다도 레르하겐이 내 마법을 저지하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허공에서 푸시식 식어 사라지는 빛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레르하겐을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방어까지 하지 않으면 죽어요.”
“상관없어. 상대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굳이 방어도 할 필요 없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환한 햇살이 그대로 우리를 내리쬐었다. 마치 아까 전의 검은 기운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이, 어느새 유리온실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왔다.
“정화 한 번이면 충분하다.”
“정화요? 그건 신관들이나 하는 것이잖아요.”
“신관들이 하는 정화도 결국에는 정반대 속성의 힘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니. 그저 이 온실에 내 마력이 닿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는 정화가 가능해.”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닥에 누워 있는 엘비어츠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그가 완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그에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톡 쳤다.
“데려가.”
내 말이 끝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소란스러움이 그대로 온실을 밀고 들어왔다.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온실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사이에 있던 비올레가 긴장한 얼굴로 나와 레르하겐을 보았다.
“죽었나요?”
그녀의 눈가에서 반짝거리는 기대의 빛에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네? 그럼 다시 깨어나면 어떡해요?”
“그거야 네가 상대할 일이지. 그리고 말했잖아. 소멸 마법으로 공개 처형을 해야 한다고. 벌써 죽이면 어떡해.”
비올레는 ‘그래도 혹시나 했죠.’라고 중얼거렸으나 나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래도 그녀의 말이 맞긴 했다. 마법사들이 하루 종일 엘비어츠 공작의 옆을 지킬 수는 없고, 게다가 실수로 죽여 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나는 레르하겐의 어깨를 톡톡 쳤다. 레르하겐이 천천히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촤륵. 가는 줄이 그의 몸에 감겼다.
“가벼운 구속구야. 이것만 있으면 별문제 없을 거야.”
“하나도 안 가벼운 거 같은데요? 그거 마력 정수 아니에요? 폐…… 아니, 전하의 마력을 응집해서 구속구에 약간의 충격이라도 가해지는 순간 그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응.”
비올레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가만 보면 참 극단적인 면이 있어요. 사람이 중간이 없어, 중간이.”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주변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나와 비올레의 대화를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보던 마법사들은 빠르게 엘비어츠 공작을 챙겨 온실에서 사라졌다.
“그럼 이만 갈게요. 마탑의 감옥 위치는 아시죠? 이미 폐하의 접근을 허해 놨으니 필요하실 때 괜히 저 귀찮게 하지 마시고 그냥 가서 보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럼 이만.”
비올레는 마지막으로 내게 꾸벅 허리를 굽히고 사라졌다. 딱히 한 일도 없으면서 괜한 생색을 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온실은 다시 정적을 찾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찻잔과 넘어진 의자, 그 사이에서 바닥을 적시고 있는 차를 보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허무해.”
그렇게 말을 툭 내뱉자 레르하겐이 흐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간단한 문제인 걸, 내가 마음만 고쳐먹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잖아요. 그렇죠?”
“후회 같은 거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후회가 아니라 감탄하고 있는 거예요. 정에 휘둘린 대가는 너무 강하게 왔는데, 정작 해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허무해서.”
“그래서 이제는 어쩔 예정이지. 엘비어츠 공작이 황궁으로 향하는 길의 공간을 조금 비틀어서 다른 귀족들보다 한참을 늦게 도착하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따로 포획할 거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은데.”
“나머지 귀족들은 원로원 회의실에 있겠죠?”
“그래서?”
“원래는 다들 보는 앞에서 포획하려고 했는데, 비올레의 말이 맞는 거 같아서요. 궁지에 몰린 엘비어츠 공작이 어떤 말을 내뱉을지 모르니까요.”
“…….”
“무사하게 포획했으니, 이제는 다 까발려야죠. 흑마법사의 존재를.”
“그리고?”
“그리고, 저랑 이야기 좀 해요.”
“…….”
“아까 전, 엘비어츠 공작을 조종해 내가 그를 공격하게 만든 존재, 그리고 어쩌면 며칠 전 로드님을 그렇게 만든 존재일지도 모르는…….”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들고 레르하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왕에 대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