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6화
서늘하게 나간 목소리에 비올레가 흠칫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찬찬히 응시하다가, 나를 설득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마뜩잖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짧은 고민 끝에 그녀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마탑의 룰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흑마법사니까, 어느 정도는 정상 참작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당장 황궁으로 모든 마법사들을 보내. 상대는 흑마법사야. 어떤 방식으로 도망갈 구멍을 만들지 몰라.”
“그런데 진짜 괜찮으세요?”
“뭐가?”
“아까 전……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그 흑마법사는 폐하의 현재 모습을 알고 있는 거 같은데.”
“…….”
“지금까지 숨겨 오신 것을 보아하니 딱히 사실을 공개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혹여 그자가 홧김에 입 밖에 내놓기라도 하면.”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흑마법사를 처단하지 않은 것, 특히나 모든 이들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 정체를 까발리지 않은 데에는 이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네?”
“끝까지 우겨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냥 다 까발리고.”
“…….”
“왜, 안 돼?”
비올레는 내 말에 허- 미약하게 헛웃음을 치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바로 조금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이렇게 무모하게 일을 벌이시지 않으셨잖아요.”
“몰랐구나. 나 꽤 무모해.”
“거짓말. 폐하는 입으로만 무모하고 대담하시지 속은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생각을 꽁꽁 숨기고 다니시는 타입이신데요?”
이번에는 내가 헛웃음을 칠 차례였다. 쯧 혀를 찬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허공에 몇 번 발길질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너한테도 보였니?”
“폐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보이는 사실이에요. 화낼까 봐 함구하고 있었지만.”
“그럼 영원히 함구하고 있어. 언제 내 심기가 뒤틀려서 난리를 칠지 모르니까.”
“칫.”
비올레는 대담하게도 나를 흘기며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곧바로 내 눈치를 힐끔 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아무튼 명령대로 황궁에 마법사들을 전부 파견할게요.”
“조용하게, 알겠지?”
“그 많은 마법사들을 파견하는 데 과연 조용하게가 될…….”
“조용하게. 최소한 내가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마.”
“……네.”
대답을 들은 후 나는 먼저 마법 시전을 멈추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마력으로 일렁거리던 방 안이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나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 밖에서 약간씩 소란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모이나 보군. 나는 속으로 읊조리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는 새파란 창밖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곧, 방을 나섰다.
* * *
비록 폭군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기실 지금까지 에스트리아가 크게 군사를 일으킨 적은 그녀 즉위 이래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조차도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기에 긴급 소집령을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긴급 소집령은 그만큼 그녀가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도착한 황궁은, 생각 이상으로 평화로웠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너는…….”
황제의 궁 앞에 도착하자마자 엘비어츠 공작은 자신을 반기는 시녀를 알아보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애초에 누구보다도 기억력이 뛰어난 그는 쉽게 제 외손녀의 시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에슈트의 시녀 아닌가?”
“네, 맞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뵙고 싶다고 하셨으니 그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직인가?”
“네. 공작 각하께서 가장 먼저 도착하셨습니다.”
“이런, 폐하께서 긴급 소집령을 내렸는데도 감히 늑장을 부리다니. 고약하기 그지없어.”
엘비어츠 공작의 말에 셀라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엘비어츠 공작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셀라는 옆으로 살짝 물러서고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유리 온실에 도착한 엘비어츠 공작은 다소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곳은…….”
그는 이 온실을 알고 있었다. 즉위한 뒤 자신의 거처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전부 새롭게 재건한 에스트리아가 유일하게 남겨 놓은 곳이었다. 그녀는 종종 이곳을 자신의 요람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엘비어츠 공작은 왜 에스트리아가 이 온실을 처분하지 못하는지 알았다.
당연했다. 이곳은 선대 황후의 궁과 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으로, 그의 딸이자 에스트리아의 어미인 레베카 황후가 자주 왔던 곳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이곳은 엘비어츠 공작과도 연이 꽤 있는 곳이었다. 에슈트를 낳기 전, 황제와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던 때 레베카는 자신을 이곳에 초대해 자랑하곤 했다.
‘폐하께서 만들어 주신 건데. 참 예쁘지 않나요?’
엘비어츠 공작의 눈에 레베카는 누구보다도 고고하고 긍지에 차 있던 아이였고, 동시에 제게 호의를 베푸는 이에게는 누구보다도 말랑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다만…….
“어, 오셨네요?”
“에슈트.”
온실로 들어가자 에슈트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분홍빛이 도는 화사한 금발을 높게 말아 올려 핀으로 고정한 머리 아래로 퍼지는 연분홍빛 드레스가 고아하고 사랑스러웠다. 마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듯이, 순진하게 웃는 눈매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더냐. 네 어미한테 가 봐야 할 듯한데. 혹시 급한 일이라도 있느냐?”
“일단 앉으세요. 자세한 건 앉아서 말씀드릴게요.”
엘비어츠 공작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에슈트가 의자에 올라가고, 이내 그녀가 셀라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에 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온실을 벗어났다.
“드세요. 차향이 좋아요.”
에슈트의 말에 엘비어츠 공작은 자애롭게 웃었다. 그는 차를 몇 모금 마신 뒤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소집령이 걸리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하면서도 그는 굳이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노곤한 햇살이 스며드는 평화로운 온실. 잎사귀의 싱그러운 내음과 꽃의 달달한 향기는 그야말로 일말의 위급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에슈트는 그 사이에서 조용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델멘 공작가가 습격을 당했대요.”
“아. 들었다. 그 집 아들 녀석이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 설마 에스트리아가 우리를 부른 게 그것 때문이냐?”
“뭐, 그것 때문도 있지만…….”
에슈트가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에 엘비어츠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더 심각한 일이 있느냐? 이 할아비한테 말해 보려무나.”
엘비어츠 공작의 말에 에슈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깊은 보라색 눈동자가 엘비어츠 공작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흑마법사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요?”
그 순간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는 에슈트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곱씹듯 침착하게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얼어붙은 얼굴로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느냐. 혹시…….”
“델멘 공작가를 습격한 게 흑마법사 같아요.”
“그게 무슨……!”
“아무래도, 제국의 안위는 물론이요, 저를 공격하고 싶었겠죠.”
그 순간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더없이 끔찍한 것을 들었다는 듯이 그의 얼굴 위로 경멸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에슈트는 그것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정하고 한 모금 드세요-.”
그녀의 가벼운 권고에도 엘비어츠 공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더니 차를 들이켜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지금 그게 사실이더냐?”
“사실이에요. 드래곤 로드께서 그런 것을 잘못 볼 리가 없으니, 당연히 사실이겠죠.”
“드래곤 로드라면…… 네 아비…….”
“네. 같이 갔어요. 아무래도 어린 황녀가 아침부터 혼자 황제의 보좌관 가문에 방문하는 것은 이상해 보일 거고, 무엇보다도 아시잖아요, 드래곤 로드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때였다.
차분하게 내뱉는 에슈트의 말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을 들었다는 듯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에 에슈트가 다정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에슈트, 방금 뭐라고…….”
“드래곤 로드가 대단하다고 했어요.”
“…….”
“왜요. 그렇게 부르면 안 되나요?”
“……에슈…….”
“어차피 진짜 아버지가 아닌 건,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게 무슨…….”
“내 아버지는, 선황인 루이시스라는 걸, 아시면서.”
“…….”
“왜 새삼스럽게 놀란 얼굴을 하세요?”
순간 온실에 적막이 드리워졌다. 엘비어츠 공작의 눈빛이 기묘한 기운을 띠다가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야말로 희대의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가 다시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에슈트. 선황인 루이시스는 네 아버지가 아니라…….”
“저번에 제가 보낸 차, 기억나시나요?”
그러나 엘비어츠 공작의 말이 무색하게, 에슈트의 목소리는 더없이 냉랭했다. 공작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몇 초 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그가 이를 악물었다.
쿨럭.
“그거, 차가 아니었어요.”
“……?”
“성수였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
“신성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죠.”
“……컥, 커헉.”
“할아버지, 저는 진심으로 그날 할아버지가 쓰러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때였다. 갑자기 목을 움켜쥔 엘비어츠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슈트는 그런 엘비어츠 공작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이를 악문 채 한 자 한 자 내뱉는 그녀의 눈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결국에는 망자에 불과해요.”
“……!”
“저를 제물로 어마마마를 살리신다고 한들, 진정으로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