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5화
나는 리건의 창백한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싸늘하게 식은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시선을 들자 레르하겐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갈까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레르하겐은 침대 위에 있는 리건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와 함께 델멘 공작저를 벗어났다. 평생 마차 따위를 탈 일이 없을 것 같던 레르하겐은 나와 함께 공작가에 가 준 것도 모자라 돌아갈 때도 내 옆을 지켜 주었다.
아니, 이게 지켜 주는 것인가?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창밖을 응시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가 내 계획을 이렇게 확실하게 물어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설사 궁금해하더라도 확실하게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레르하겐의 물음에 정확한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긴 침묵에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무렵,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틀렸어요.”
그것은 꽤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두서없이 자책의 말을 쏟았으나 레르하겐은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말에 네 탓이 아니라는 입에 발린 위안 한마디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시선을 마차 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내가 틀렸다는 걸.”
“…….”
“최소한 내가 행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건…….”
나는 말을 골랐다.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건 과연 무엇일까. 내 아집? 내 자만? 내 치기? 어쩌면 셋 다이고, 거기에 나약함까지 하나 더 추가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소중한 것이 걸려 있는 순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종종 잘못된 길을 선택하곤 하니까.
“굳이 말하자면, 내 미련이겠네요.”
“미련이라.”
“미련이요. 조금이라도 핏줄에 기대어 보고 싶은 미련.”
그렇게 말하며 나는 쓰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허황되기 그지없었다. 내 손으로 죽인 이들 또한 내 핏줄이었다. 한데 아직도 핏줄에 연연하고, 그 가족이라는 이름에, 처음으로 느껴 보았던 온기에 매달리다니. 그리고 그렇게 매달리다 못해 이렇게까지 멍청한 지경까지 이르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어째서 남들이 다 가지는 것들을 나는 가질 수 없을까.
왜 남들은 태어날 때부터 누리는, 그 가족이라는 이름 속에서 얻는 위안을, 나는 가질 수 없는가.
어째서 노력을 하고 또 해도 결국 내가 얻는 것은 또 한 번의 상실인지.
행복해지기 위해, 황제다운 황제가 되기 위해, 나는 계속 손에 피를 묻혀야 하고 반복되는 상실을 겪어야 하는 걸까.
“역시 세상에 거저 가질 수 있는 행복은 없나 봐요.”
그렇게 읊조리며 나는 레르하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 잔뜩 고인 눈물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요 치기요 어리석음이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나는 마치 그의 대답을 기다리듯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의 벽안이 살짝 눈꺼풀에 가려졌다 다시 드러났을 때, 그가 읊조렸다.
“가만히 있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있어도 된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대단하세요.”
“글쎄,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에 딱히 네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만.”
“거짓말.”
“아니다.”
나는 레르하겐의 말에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왜일까. 내 탓이 아니라고 하는 그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어서.
“그래요. 지금까지는 내 탓이 아니에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수습할 거예요.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으면 되는 거고 과오는 공이 될 테니까.”
그렇게 읊조린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덜컹거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그래,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무릎에 묻은 흙은 털고, 상처는 아물도록 치료하고, 그러면 그만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얼굴을 굳혔다.
* * *
델멘 공작가 습격 사건에 대한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다. 엘비어츠 공작의 독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델멘 공작가가 습격당했다는 소문은 아주 좋은 가십거리였다.
물론 전자의 경우는 내가 한 짓이었지만, 연속된 습격 사건이 다른 귀족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는 굳이 생각을 해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황궁으로 돌아오니 하시스와 일리안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게 다가왔다.
“꼬맹아, 괜찮…… 뭐야. 너 울었어?”
내 얼굴을 본 하시스가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뒤따라오던 일리안은 조금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에 나는 대충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른 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울긴 울었는데, 별거 아니야.”
“네 보좌관, 많이 위독하냐?”
“조금?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운 건 아니고.”
“그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슬픔을 미리 표현한 것뿐이야.”
내 말에 하시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일리안은 뭔가 깨달은 듯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우리 아가씨, 이제 슬슬 시작해 보려고?”
“글쎄, 딱히. 시작한다는 거창한 말을 붙일 정도는 아니라서.”
일리안의 물음에 대꾸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 시작이라는 대단한 이름을 붙이기에 내가 해야 할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나는 하시스와 일리안을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뒤 서랍 속에서 공문에 쓰이는 두꺼운 종이를 꺼낸 나는 펜을 놀렸다.
[지금 속히 황궁으로 올 것.]
간단한 한 줄이었으나 이것의 무게를 모르는 귀족들은 없을 것이다. 황제의 인장과 함께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공문지에 소집령을 내린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황실 및 제국이 긴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 긴박한 위협은 대부분 반역이나 내전, 외부 공격과 엮인 경우가 많은데, 지금까지는 딱히 이것을 써 볼 일이 없었다.
나는 종이를 둘둘 말아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을 주입하자, 하얀빛과 함께 종이가 서서히 사라졌다.
아마 지금쯤이면 귀족들 코앞에 전달이 되었겠지. 몇 분 정도면 올까. 속으로 셈하던 나는 통신 마법을 시전했다.
통신 마법의 대상은 다름 아닌 마탑의 주인, 비올레였다. 몇 번이나 내 마법 연결이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연결을 수락할 때까지 마법을 시전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갑자기 소란스러운 배경과 함께 잔뜩 성난 얼굴로 비올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지금 바빠요!”
“나도 급해.”
확실히 바쁘긴 바빴는지 잔뜩 흐트러진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조용하게 화답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비올레가 멈칫하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영상 너머에 있는 나를 찬찬히 훑어봤다.
그리고 뭔가 깨달은 듯,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읊조렸다.
“어…… 황녀 전하? 아, 아닌데, 분명 폐하의 마력이 느껴졌는데. 저, 혹시, 폐하께서 어디로 가셨…….”
그녀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애초에 통신 마법은 마력의 파편을 상대에게 보내는 것이라 익숙한 이의 마력이 느껴지면 자연스레 누가 연락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황제가 있을 거라 여겼을 테니 그 너머에 황녀인 내가 있다는 것에 다소 놀란 듯싶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살짝 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와.”
“저기, 황녀 전하. 어찌 제게 연락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아니 저, 저기요. 아무리 황실이라고 해도.”
“안 오면 다음 주 마탑은 당장 해산될 거야. 내가 마탑에 하는 지원을 전부 끊을 거거든.”
그 익숙한 협박에 비올레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헉!”
비올레가 충격받은 얼굴로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두 눈에 비낀 것은 가벼운 놀라움, 아니 그것보단 공포에 가까웠다. 비올레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배경이 확 바뀌더니, 이내 개인 집무실로 보이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설마 전하께서…… 아,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폐하?”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려면 피곤하고, 지금은 급하니까 생략할게. 무엇을 생각하든지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 거야. 그리고 그 짐작이 네 입 밖으로 나가면, 네가 죽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야.”
“아니 왜 죽어요! 제가 원해서 알게 된 진실도 아닌데!”
“그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너한테 시전한 통신 마법에 기밀유지 관련 마법도 걸려 있어서, 이 통신 내용이 밖에 새어 나가는 순간 너는 즉사할 거라는 거야.”
내 말에 비올레가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눈빛은 왜 갑자기 자기한테 이러냐는 듯한 항의의 뜻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인형을 내세우고, 그녀에게 모든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었다.
이렇게 죽음을 대가로 한 술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척 유감이지만, 리건도 아닌 상대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올레는 한참이나 내 말을 곱씹다 이윽고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절규하듯 물었다.
“말도 안 돼. 그, 그럼 지금까지 어떻게…… 아, 설마 마리오네트?”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지금 급히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리고 나를 도와줌으로써 너 또한 얻을 게 많을 거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알게 된 진실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비올레는 얻을 게 많다는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에 나는 피뜩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거, 흑마법이야.”
“뭐라고요? 아니 잠깐만요, 정보의 양이 갑자기 너무 많아서 소화하기가…….”
“그리고 오늘, 나는 그 흑마법사를 끄집어내려고 해.”
“……누군지는 아세요?”
“알아.”
“누군데요?”
비올레의 말에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글쎄. 그건 이따가 네가 잡으러 가 보면 알겠지.”
“제가 잡아요?”
“딜을 하지, 비올레.”
나는 살짝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 내 모습에 비올레가 조금 당혹스러운, 그리고 의문 섞인 얼굴을 했다. 그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마탑에서 흑마법사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해 주겠어. 지금까지 처리했던 잔챙이와는 결이 달라. 아마도 마족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이 된 흑마법사일 거야.”
“…….”
“너도 알다시피 마탑은 지금까지 그 존속의 의미에 대해서 의견이 많았어. 왕실마다 따로 마법사를 키우고 있고, 분쟁 없이 평화로운 상황이니 마탑이 굳이 있어야 하냐는 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야.”
“……그래서요?”
“하지만 흑마법사는 달라. 흑마법사 하나만 잡아도 마탑은 앞으로 천 년간 아무도 딴지를 걸지 못할 거야.”
비올레는 내 말에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내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내 후원과 돈에 그렇게 연연했던 것도, 마탑에 금전적 지원을 하려고 하는 왕실이 적었던 탓이었으니.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럼 대가는 무엇인데요? 저희 마법사를 보내 주면 되나요?”
“아니. 하나 더 있어.”
“그게 뭔데요?”
비올레의 말에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흑마법사의 처형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멸 마법으로 완전히 소멸시킬 것.”
“……자, 잠시만요. 소멸 마법을 인간에게 쓰다니. 그건 마법사들 룰에 어긋나는 거라고요. 너무 비인도주의적…….”
“비올레, 너는 타인의 생명을 대가로 힘을 얻는 이들에게, 명예롭게 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