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4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내 인생은 언제나 내가 무엇인가를 ‘행할’ 때에만 제대로 돌아갔다.
황제가 되는 것부터 황권을 공고히 하는 순간까지. 내게 쏟아지던 경멸은 내가 칼을 들자마자 경외로 변했고, 나를 무시하던 눈빛은 공포로 뒤바뀌어 수많은 이들이 내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내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어떤 순간에도 나는 무조건 내 손으로 행해야만 일이 돌아간다고 철석같이 믿어 왔다.
그래서 가능했다.
일리안의 입에서 범인의 정체를 듣고도 가만히, 침착하게 수를 짜고 계략을 세우고 천천히 내가 원하는 것을 행했다.
그것이 가장 최고의 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원하는 것을 위해 직접 무엇인가를 행했으니, 내가 실수하지 않는 한 일이 틀어질 경우는 절대 없을 거였다.
그런데, 대체 왜.
기사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지금 누가 습격을 당했다고? 델멘 공작가가? 그래서 누가 지금 혼수상태라고? 리건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나는 조용하게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지금까지 꽤나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내가 공격당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정작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공격받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황녀 전하?”
기사가 작게 나를 불렀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
“네?”
“델멘 공작가로 가야겠어. 어마마마는 쉬고 계시니, 나라도 먼저 가 봐야지.”
“하지만 폐하께서 기침을 하신 뒤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당장 준비하라고!”
내 날카로운 목소리에 기사가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자 시녀와 시종들도 급히 몸을 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일일이 신경 쓸 새조차 없었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외투만 챙기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일단 델멘 공작가로 가야 한다. 누가 무슨 연유로 습격을 했는지, 대체 어쩌다가 그 많은 경비 인원을 뚫고 가문의 막내아들인 리건이 공격당했는지 알아봐야 했다.
‘침착하자.’
속으로 몇 번이나 읊조리면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평온을 가장해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을 지우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나는 극도로 긴장하고 말았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이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부딪쳐 버릴 정도로.
“무슨 일이지?”
묵직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레르하겐이었다. 아까 전의 고함 소리를 듣고 온 것일까, 아니면 우연인 것일까. 그는 내 몸에 삐뚤게 걸쳐진 외투와 다급한 표정을 보고 가늘게 눈을 떴다.
“어딜 가는 건가.”
“델멘 공작가가 습격당했대요.”
“…….”
“리건이 혼수상태에 빠졌고요. 일단 가서 상황을 살펴보려고요. 그리고 리건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는지…….”
두서없이 말을 꺼내던 나를 레르하겐은 가만히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이마에 미미하게 새겨져 있던 주름이 사라졌다. 그 찰나의 침묵조차 견디지 못한 내가 급히 옆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가려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가는 것이 옳다고 보나?”
나는 미간을 좁히고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황제의 보좌관이 위험에 처했는데, 황제 본인은 가지도 않고 어린 황녀만 간다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레르하겐의 물음에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알고 있었다. 엘비어츠 공작과 어린 황녀 에슈트는 핏줄이라는 접점이라도 있지, 솔직히 어린 황녀와 황제의 보좌관은 친한 게 이상한 사이였다.
설사 친밀한 관계라고 해도 황제도 없이 황녀 혼자만 가는 것은 수상한 상황이 틀림없었다. 황제가 아이가 되었다는 추측까지는 아니더라도, 황제와 보좌관의 불화설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혹은 구설에 오르거나.
하지만.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하지만, 가 봐야 하는데.
내 보좌관이, 몇 년간 유일하게 신임하던 보좌관의 생명이 위태로운데 가 보지 못한다니. 내가 갑자기 아이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황녀라는 신분이 이렇게 짜증 나는 것인 줄 몰랐다.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다시금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 타인의 눈치를 살피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대체 왜 이렇게 무력해야 한담. 억울함이 왈칵 솟아올랐으나 지금은 푸념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 봐야 해요. 걱정도 되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든 없든, 일단 가 볼 필요가 있어요.”
“누가 습격을 한 건지는 알고 있나?”
“그것까지는 전달받지 못했어요.”
“단순히 인간들의 정치적 알력 싸움일 수는?”
“그건 조사를 해 봐야 알겠죠.”
레르하겐은 내 대답에 침묵했다. 그리고 몇 초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가지.”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들어 레르하겐을 바라봤다. 내 고민 섞인 얼굴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스트리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차 보냈다고 하면 되지 않나.”
확실히 드래곤 로드가 동행한다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오히려 그는 나보다, 그러니까 어른인 나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쓸모 있는 존재니까 거기에 의문을 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레르하겐이 가는 데 어린 황녀가 따라간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짜증을 내고 꽥꽥 소리를 지르던 것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레르하겐은 딱히 그때의 내 투정이나 성질머리 따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그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론은 빠르게 내려졌다.
“네. 가요.”
레르하겐은 내 말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었다.
* * *
델멘 공작가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처참했다. 습격이라고 하기에 암살자의 침입 정도로 생각했으나 그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듯, 바닥 군데군데 핏자국이 보였다.
“황녀 전하? 그리고…… 드래곤 로드님?”
내가 왔다는 말에 마중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아이리스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꽤 멀쩡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레르하겐에게 닿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소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폐하께서…….”
“어마마마께서 아빠랑 나를 보냈어. 나는 물론 그냥 딸려 온 거지만. 리건은 나랑도 많이 놀아 줬는데, 아프면 더는 못 놀잖아?”
그나마 마차 안에서 이것저것 핑계를 생각해 냈기에 천진하게 말을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리건의 방으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최소한의 이성은 지켜야 했다.
아이리스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서 있는 집사를 향해 눈짓을 했다.
“두 분을 리건의 방으로 모셔.”
우리는 곧 집사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사이 엉망이 된 저택을 둘러보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닌지, 레르하겐이 입을 뗐다.
“마력이로군.”
“역시 그렇죠? 어젯밤 습격을 한 게, 마법사의 소행이죠?”
“아마도.”
이 짧디짧은 대화에 우리를 안내하던 집사가 힐긋 뒤를 돌아보더니 말을 얹었다.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 보니 막내 도련님께서 바닥에 쓰러져 계셨고, 저택 안쪽은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네.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어오면 최소한 밖에서 경비를 서던 기사가 큰소리를 쳤을 것인데, 어제는 그런 것도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집사의 얼굴에는 수심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작게 읊조리는 와중에 드디어 리건의 방 앞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나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열리는 문틈을 응시했다. 이미 치료를 마쳤는지 안쪽은 조용했다. 햇살이 스며드는 방 안, 서 있는 시종과 침대 위에 있는 리건.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야말로 일말의 생기도 없는 그의 얼굴은 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 눈에 띄는 상처 같은 것은 없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욱더 그가 이렇게 쓰러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입매를 굳혔다.
대체 누가, 왜, 어떻게.
머릿속에 수만 가지 가설을 세워 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르하겐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무심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거 혹시…….”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르하겐은 내 물음에 얼굴만 굳힐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침대 위에 있는 리건에게 닿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가 가늘게 눈을 뜨다가 입을 열었다.
“죽음의 협곡.”
“……!”
“죽음의 협곡, 그곳의 냄새가 나는 거 같군.”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음의 협곡. 죽음의 협곡이 뭐와 연관된 거더라? 한심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내 시선이 다시 리건에게 꽂혔다.
죽음의 협곡. 그러니까 지금…….
“흑마법이라는 건가요?”
리건을 이렇게 만든 게?
내 물음에 레르하겐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았다. 반지는 잠잠했다. 하긴, 이미 공격이 끝난 마당에 이 반지가 무슨 기운을 감지할 수 있겠나.
죽음의 협곡. 다시 한번 입 안으로 그 이름을 반복했다.
죽음의 협곡, 흑마법사, 잔존한 기운, 죽음의 협곡, 리건을 공격하고, 죽음의 협곡, 그리고…….
“하.”
그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눈시울이 붉어져 애써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했다. 이것은 결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아량을 베풀 의향이 있었는데.”
나는 이를 악물고 읊조렸다.
“천천히 압박하는 그 시간 동안, 그저 나만 건드렸다면,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어서 내가……, 내가, 그냥, 나를 어른으로 되돌려 놓으면, 살려 주려고 했는데.”
“…….”
“어째서.”
침대를 붙잡은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악물고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희뿌예지는 시야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일리안의 말이 맞았다.
적에 대한 관용은, 아군에게 가장 큰 형벌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지독한 오만이며, 내 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