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3화
셀라는 내 물음에 조금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와 리건 님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리건 님께서 사직서를 내신 것이라고.”
“내…… 어마마마와 리건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아니 왜?”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이번 독살 미수 사건 때문에 폐하께서 먼저 리건 님을 멀리하신다고 하고, 누군가는 리건 님께서 델멘 공작 각하를 대놓고 모욕하신 폐하께 불만을 품은 거라고 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물론 후자는 어느 정도 내가 예상했던 상황 중 하나이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현실로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돈다고?
‘아니, 소문 자체야 그저 가십거리다 치고 넘기면 되는데, 누가 이런 소문을 낸 거지?’
리건의 성정에 사직서를 냈다고 동네방네 말을 하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주스로 입가심을 한 뒤 컵을 내려놓고 셀라에게 말했다.
“혹시 비슷한 말을 듣거든, 대체 누가 한 말인지 한번 물어봐.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났는지 궁금하니까.”
“네. 그럴게요.”
좀 찝찝하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진정으로 리건을 자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했던 말마따나 그는 내 옆에서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우리 아가씨, 혹시 보좌관이랑 싸운 거야?”
노크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허락도 없이 들어온 일리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승낙도 안 했는데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흐음. 몇 번이나 노크했는데도 답이 없길래 그냥 들어왔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히 하고 있었어?”
“몇 번이나 노크했다고? 거짓말. 아무리 집중한다고 해도 기척을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아, 미안. 사실 안 했어.”
나는 어이없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아까 그가 한 말을 상기해 내고는 반문했다.
“그런데 무슨 말이야? 보좌관이랑 싸우다니.”
“황궁에 소문이 자자한데. 황제 폐하와 보좌관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하. 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는 거야…… 아니야. 무시해. 그냥 가십거리일 뿐이야.”
“가십거리? 진짜?”
일리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 은은하게 밴 미소를 본 나는 결국 손에 들고 있는 펜을 내려놓았다.
“왜 또, 무슨 일인데?”
“아니 그냥, 궁금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해, 대체?”
“아가씨, 어른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뭐?”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범인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아?”
그 순간 서재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짜증스레 일리안을 보던 나는 얼굴을 굳히고 서늘하게 읊조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일 것까지는 없고. 그냥 다소 아가씨답지 않은 행보를 보이길래.”
“나답지 않은 행보?”
“적이 누군지 알면, 바로 목덜미를 잡아다 앞에 꿇릴 것 같았거든.”
“…….”
“아니야?”
일리안은 내가 잘못 알았나-, 하며 얄미우리만치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물음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핵심을 말한 것이다.
일리안은 방 안에 흐르는 정적에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호선을 긋는 그의 입매가 묘한 기색을 띠었다. 그 여유로운 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곧 정리할 거야. 지금은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고.”
“그런가.”
“이건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고, 간단하게 내 앞에 무릎을 꿇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아가씨.”
최대한 변명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침착하게 내뱉는 말을 일리안은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잘라 냈다.
“말로는 하나하나 해 나간다고 하지만, 사실 그냥 봐주고 싶은 거 아닌가?”
“무슨 헛소리를…….”
“그냥, 놓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걸 마치 계획이었다는 듯 잘 포장해 봤자…… 내가 보기에 우리 아가씨는 그냥.”
“…….”
“물러 터진 것뿐이야.”
그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지금 누구더러 물러 터졌다고-!’
속으로 읊조려 보았으나 정작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일리안은 그런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그의 나른한 웃음이 날카롭게 뿌려졌다.
일리안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라면 맞받아쳤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그저 길게 숨을 내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을 들어 입 안에 물을 넣었다.
꿀꺽. 목구멍으로 시원한 물을 넘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알 바 아니야. 처리는 내가 해.”
“뭐, 굳이 그러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네가 말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대신, 한 가지는 알아 둬.”
“…….”
“적에 대한 지나친 관용은 아군에게 지독한 형벌이 될 수 있음을.”
말을 마친 일리안이 걸음을 옮겨 집무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방 안의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이야. 안 그러면…….’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일리안의 말을 애써 머릿속에서 떨쳐 내려 일부러 다시 펜을 잡고 빠르게 손을 놀렸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모든 게 내 계획대로 진행될 거야.’
그래. 지금까지 모든 일을 차근히 준비해 오지 않았나.
‘어차피 델멘 공작도 빠른 시일 내 처리될 거고, 그때 가서 내가 생각해 뒀던 대로 진행하면…… 잘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왜일까.
갑자기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 * *
이튿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뜬 나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어 인상을 썼다.
‘리건 녀석, 어제 나한테 저녁 보고를 하지 않았어.’
평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말없이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늦게라도 올까 기다리던 나는, 아침까지도 감감무소식인 그의 행방에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며칠 동안 리건이 황궁에 있는 시간보다 델멘 공작가에 있는 시간이 묘하게 많아졌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알아서 해결할 일인 데다가, 델멘 공작도 마주쳐야 할 텐데 뭐 하러 거기에 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착실하게 일을 하고 있기는 한지라 나는 굳이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자리를 비워? 보고도 안 하고, 왜 이러는 거야? 설마 나한테 일부러 반항이라도 하는 건가?’
예전의 그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최근의 리건이라면 왠지 모르게 진짜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로 사직을 하겠다고 이렇게까지 몸부림을 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리건 주제에 왜 자꾸만 벗어나려고 하는 거야. 자기한테 결정권이 없다는 걸 알면서. 흥.’
속으로 그렇게 읊조렸으나 왠지 모르게 속이 약간 울렁거렸다. 설마 그동안 은근히 쌓인 게 많았나, 그래서 이 기회를 핑계 삼아 진짜로 사직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스스로 자아 성찰을 해 보던 나는 결국 머리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 냈다.
‘뭐, 곧 오전 보고를 하러 올 테니 보면 한마디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침대에서 내려갔을 때였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 지더니,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또 누가 방문을 한 거지? 나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살짝 발꿈치를 들었다.
‘델멘 공작가의 마차?’
소란의 근원은 저 멀리서 빠르게 질주해 오는 델멘 공작가의 마차였다. 그것을 본 나는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마도 리건이 지각했음을 알고 급히 오는 모양이었다. 그 녀석의 당황한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살짝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마차가 멈출 때까지 조용하게 밖을 응시했다.
곧 내 궁의 입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가 멈춰 섰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리건이 아니잖아? 저건…….’
마차에서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아이리스의 시녀였다. 저번 만찬에 초대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왜 갑자기 아이리스의 시녀가?’
아무리 소공작의 시녀라고 해도 가문의 마차를 타고 황궁에 온다고?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궁 앞에 있는 기사들에게 뭐라고 말을 전하는 그녀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을 보던 나는 급히 방에서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황제를 보러 온 것 같았다. 아침부터 인형을 소환하는 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마침 말을 전하러 온 기사가 황제의 방으로 향하는 게 보이길래 재빨리 그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어마마마는 아직 주무셔.”
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 말에 난감한 얼굴을 했다. 나는 일부러 그의 앞으로 다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어마마마한테 전할게.”
“그게…….”
“왜, 델멘 공작가에 무슨 일이라도 있대? 아까 마차가 온 거 같던데.”
내 말에 기사가 살짝 황제의 방문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 누군가가 델멘 공작가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
“보좌관님이 그 습격에 당하시어, 혼수상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