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2화
“꼬마? 늙은이?”
경비 대원은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듯하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그때 사건에 휘말린 이들인데 그만 대공 전하와 마주치는 바람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이와 노인이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은데.’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세베르가 그들을 만나 몇 가지 물은 모양이다. 세베르의 평소 모습을 더듬어 봤을 때, 평민인 그들이 그 압박감을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운이 나쁠 수가 있나.’
속으로 투덜거렸으나 딱히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조금 놀랍기는 했다.
“켈리어드 대공이…… 진짜로 직접 왔다는 거지?”
“아. 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고?”
“딱히 없었…… 그저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습니다. 그리 기뻐 보이시진 않았는데…….”
세베르가 언제 웃었다고.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침착하고 굳은 얼굴, 고요한 평온 아래 숨겨진 지독한 오만. 평소같이 저택에서 의문을 내뱉고 고고하게 지시를 내리는 대신 직접 행차했다라.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 셀라, 이만 가자.”
“네, 황녀 전하.”
인간이 동요의 극치에 다다르면 오히려 평온의 극치에 오른다던가. 내가 지금 딱 그 꼴이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나는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러나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햇살 아래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어?’
아주 찰나의 느낌이었다. 그 짧은 순간, 누군가에게 공격이라도 당한 듯이 기분이 나빠졌다. 마법사의 직감이라는 것은 거의 짐승에 가까울 정도이니 아마 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감각에 나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세요, 황녀 전하?”
셀라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하게 다시 어두침침한 골목길로 뒷걸음질 쳤다. 나는 골목길의 입구에서 첫 번째로 왼쪽으로 꺾어지는 작은 길, 그곳을 유심하게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 이 부근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어. 그게 나를 공격했다가 갑자기 사라진 거고. 그런데 왜 갑자기, 아…… 혹시, 레르하겐의 방어막?’
레르하겐과 싸운 그자가 진짜로 나를 찾아온 거야?
“전하, 뭔가 이상한 거라도 보셨어요?”
“아니, 아니야.”
나는 입술을 꼭 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 * *
황궁으로 돌아오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수선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나마 외부 인사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황제 궁의 분위기는 이전과 같았으나, 시녀나 시종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했다.
“왜 그래?”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어수선해?”
말랑한 얼굴 위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띠자 시녀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어린 황녀에게 알리기에는 껄끄러운 일일까. 리건에게 물어봐도 되지만 제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테니 굳이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까 전, 원로원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어요.”
“무슨 소란?”
“델멘 공작과 소공작께서 작게 다투었다고 했어요. 리건 님께서는 그걸 해결하러 가셨고요.”
“작은 다툼?”
“네. 아무래도 보는 눈이 있어 크게 번지지는 않은 듯하나, 아무래도 근간에 떠도는 소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
그것이 무슨 소문인지는 굳이 그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정원에 들른 나는 궁을 나갈 때와 별다를 바가 없는 광경에 잠시 멈칫했다. 내가 온 걸 느꼈는지, 레르하겐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저를 공격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레르하겐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몸을 일으킨 그가 나를 찬찬히 훑더니 눈에 띄는 상처가 없음을 확인하고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했다. 나는 팔짱을 턱 끼고 입을 열었다.
“이제 저까지 위험하게 됐는데, 진짜로 무슨 일인지 안 알려 주실 거예요?”
“……알려 주면. 두려움에 떨지 않을 자신이 있나?”
“안 알려 주면 불안감에 떨겠죠. 정체를 모르는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으니까요.”
“두려움보다는 불안감이 낫지 않나. 어차피 네가 공격받을 일은 없을 테니.”
“어차피 제가 공격받을 일이 없으면 그냥 시원하게 알려 주는 것이 낫지 않나요?”
나와 레르하겐의 대화에 옆에 있던 하시스가 이마를 짚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사실 공격을 받을 뻔했다는 건 내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레르하겐의 말마따나 그는 확실하게 나를 보호해 줄 테니까. 뭐, 그가 보호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홀로 열심히 싸워 살아남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보호받으며 달달 떠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하물며 나는 어른인데.
다만 이렇게 해서라도 레르하겐을 다치게 한 그 대단한 작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내 생각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몰라도 된다.”
“이 드래곤이!”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위했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정말 어이없어.”
“…….”
“됐어요. 몰라도 되니까 피범벅이 되든 뭐, 죽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그 말과 동시에 고개를 홱 돌리고 정원을 벗어났다. 하시스가 나를 부르는 듯했으나 거기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한지를 보여 주기 위한 극단의 조치였다. 물론 이런 게 큰 소용없다는 것은 나도 알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는 레르하겐의 얼굴을 상기했다. 언제나 그렇듯 요새같이 단단한 얼굴은 딱히 감정이라는 것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래서일까, 아팠을 텐데도 덤덤하게 구는 그 모습에 더욱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당해서 올 정도면 상대가 우위를 점할 수도 있었다는 건데. 자기가 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 혼자 막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좀 털어놓으면 어디 덧나나?’
물론 내 능력이 그의 힘 앞에서 하찮기 그지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의 눈에 나는 그저 약하고 하찮은 인간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를 도와주는 모습에, 진짜 딸로 생각하는 건 아니더라도 뭐…… 계약한 상대로서 그럭저럭 인정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니.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거칠게 문을 연 나는 씩씩거리면서 침대에 그대로 뛰어들었다.
“내가 다시는 말 거나 봐라!”
이어지는 커다란 고함에 옆에서 외출복을 정리하고 있던 셀라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개의치 않은 채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 * *
“화난 것 같은데, 진짜 괜찮은 겁니까?”
에슈트가 정원에서 나간 뒤 하시스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누가 봐도 ‘나 화났어’라는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간 작달막한 뒷모습을 상기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저렇게까지 성질을 내는데 그냥 말해 주는 게 낫지 않습니까? 마왕 카렌이…….”
“하시스.”
그러나 레르하겐은 하시스의 말을 냉정하게 잘랐다. 말조심하라는 듯한 레르하겐의 표정에 하시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레르하겐이 피 묻은 몰골로 나타났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놀랐다. 그의 제자가 된 뒤 단 한 번도 그렇게 엉망인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에슈트 때와 달리 레르하겐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마왕 카렌이 한 짓이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믿기 어려웠으나 납득했다. 흑마법이 기승을 부리니 마왕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가 대체, 어떻게 그자를 부활시켰는지 하시스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런데 왜 에슈트에게 숨기시는 겁니까? 오히려 저 꼬맹이가 알게 되면 더 조심할 터인데.”
“마왕은 조심한다고 해서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숨기기만 하면, 저 성격에 엄청 답답해할 것 같은데요. 아까 전 표정만 봐도 심통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건 상관없어.”
“…….”
“내가 이길 수 있다면 알렸을 거다. 하나 카렌은…… 나도 이길 수 없어.”
하시스는 레르하겐의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 세상에 레르하겐이 이기지 못하는 상대가 있다고?
왜?
하시스는 드물게 제 스승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평소와 별다를 바 없이 무표정해 보였으나, 그 사이에 묘하게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안.
‘불안?’
레르하겐의 눈가에는 묘하게 이상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면 불안 같기도 했고, 얼핏 보면 걱정 같기도 했으나 어느 쪽이든 처음 보는 것이라 하시스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결국 하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레르하겐이 에슈트에게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의 협곡이 그렇게 위험하다고 해도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성정에, 카렌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다만.
‘스승님이 이렇게까지 저 꼬맹이를 과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어쨌든 레르하겐의 선택이다. 하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 * *
당연한 일이지만 델멘 공작가의 불화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 이들이 조만간 델멘 공작가의 가주가 교체될 것이라고 여겼고, 나 또한 어렴풋이 머지않아 원로원의 의석에 아이리스가 앉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델멘 공작가의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과 동시에 나와 리건 사이의 관계도 이상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상하기보다는…….
“리건 님께서 진짜로 폐하의 보좌관에서 사퇴하지는 않으시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어떻게…….”
“아침에 시녀들에게서 들었어요. 듣기로는 리건 님께서 폐하께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한쪽으로 이제 슬슬 델멘 공작가를 어떻게 움직일까 따위를 고민하던 나는 셀라의 물음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건이 내게 사직서를 내민 것은 어디까지나 나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우리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델멘 공작가가 폐하를 등지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리건 님을 신임하시는 듯하던데.”
“대체 어떻게 그런 소문이…….”
“이미 황궁에 파다하게 퍼졌어요.”
“그럼, 가십거리도 분분하겠네?”
“음…….”
“숨길 필요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