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1화
레르하겐이 다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내 머릿속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레르하겐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그저 내 방을 쭉 훑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별다른 일은 없는 거 같으니 이만 가겠다.”
“잠깐만요.”
그 한숨이 마치 안도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 며칠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피를 묻힌 채로 나타나서 기껏 한다는 말이 뭔 일 없냐와 별일 없어 보이니 가겠다는 거라니.
레르하겐은 내가 그를 잡자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지?”
“그 피…… 로드님 거는 아니죠?”
“전부는 아니다.”
“네? 그럼 일부는 맞는다는 거예요?”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진짜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이 며칠 동안 어디 계셨던 거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음성에 나는 내가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부끄러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레르하겐이었다.
그의 힘을 적나라하게 보아 온 나로서는 이 상황 자체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선을 살짝 들어 레르하겐을 힐긋 보았다. 그는 조용하게 나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
내 길고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겨우 저 한 줄로 마무리 지은 거야?
그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안색을 보아하니 그렇게까지 크게 다친 것은 아닌 듯했다.
나는 결국 헛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거구의 드래곤 로드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설교하는 어린아이라니, 듣기만 해도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어찌 되든 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로드님은 저와 계약을 하셨어요. 갑자기 이렇게 다쳐 오면 곤란하다고요.”
“왜 곤란하지?”
“아니, 당연히 곤란하죠. 계약자가 이렇게 피범벅이 되어서 오면, 저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동안은 드래곤 로드로서 그의 능력을 믿으니 어느 정도 좀 마음을 놓았다지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당연히 나도 경계심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을 내뱉은 나는, 이어지는 레르하겐의 되물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글쎄. 애초에 너는 네 일은 알아서 잘 한다는 주의 아니었나?”
“……?”
“내가 없다고 해도, 어차피 내 딸이라는 신분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잠깐만요. 뭔가 잊으신 것 같은데 저희의 거래는 그 외에도 더 있었어요. 저를 도와서 범인을 찾고 제가 어른이 되는 것에 협조…….”
“흐음.”
“…….”
“네가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군. 분명 스스로를 희생하지 말라는 내 제안도 듣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벙찌고 말았다.
레르하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속으로 헤아려 보던 나는 그의 말에 숨겨져 있는 다른 함의를 읽어 내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설마 지금 나를 질책하는 건가? 그때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자기도 그것을 굳이 지킬 필요 없다고 화라도 내는 것인가.
사실 레르하겐의 성정을 생각해 보자면 그가 그런 의도로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이 며칠 동안 리건 때문에 조금 예민해져 있던 나는 괜히 그것을 꼬아 듣고 싶어졌다.
결국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저한테 도움을 바라는 게 염치없다고 하는 건가요? 약속도 지키지 않은 주제에 뭘 바라는 거냐고?”
레르하겐은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얕은 한숨을 내뱉고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니.”
“거짓말, 그 뜻으로 읽혔는데.”
“그럼 그 뜻으로 생각해라. 그리고 내 사과를 받아.”
“전혀 사과하는 모습이 아닌데요.”
“사과하는 거 맞다.”
그렇게 말하는 레르하겐의 모습은 그야말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사과 운운하는 그의 말이 마치 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입을 꼭 다물고 눈알을 데록 굴렸다.
“뭐, 그럼 받아 주죠.”
사실 그가 사과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다만 일부러 모르는 척 억지 부리듯 사과를 받은 이유는…….
‘불안해서.’
정말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레르하겐의 부재 따위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겼음에도 아까 전 그가 나타나는 순간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는 그의 몸에 묻은 피에 빼앗겨 또 다른 불안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굳이 말하자면, 확실히 레르하겐은 내게 심적인 안정을 주는 존재가 맞았다.
만약 내가 사고를 쳐도 레르하겐이라면 다 수습을 해 줄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런 그가 다쳐 왔으니.
“그런데 진짜로 무슨 일이에요? 심하게 다치셨어요? 치유 마법이라도 대신 써 줘요?”
“이미 치유했다.”
“누구한테 습격을 받은 거예요? 로드님을 습격했다면 필시 평범한 인간은 아닐 텐데.”
“그건…….”
그러나 바로 답을 내뱉을 것 같던 레르하겐은 말을 아꼈다. 그는 나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모른다고요? 로드님을 공격했는데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티 나요.”
“거짓말인 거 알면 그냥 넘어가는 게 낫지 않나.”
“왜 저한테 숨기세요? 이 며칠 동안 흑마법사와 마물들이 죽은 거, 그것도 로드가 한…….”
“에슈트.”
순간 방을 잔뜩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낮은 목소리에는 딱히 위협이나 위압감이 없었지만, 내 말을 완전히 잘라 버리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아까 전과 달리 나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요즘 처리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렇긴 한데.”
“너는 그걸 처리해. 나는 내가 처리해야 할 걸 처리할 테니.”
“……그게 무슨.”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무슨 일 있으면 소환해.”
그 와중에 레르하겐은 또 자신을 부르라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곧 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가 꽉 채우고 서 있던 공간이 갑자기 허해졌다.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나는 탐탁잖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쯧 혀를 찼다.
“기분 더럽네.”
먼저 좀 말해 주면 어디 덧나나. 지금까지 내 앞에서 목적을 숨기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존재는 레르하겐이 유일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그에게 따지지 못했다.
“짜증 나. 아니 뭐 저렇게 자기 할 말만……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세베르 이야기를 못 했잖아?”
그의 옷에 묻은 피 때문에 정작 물어보려고 했던 것마저 잊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일부러 그렇게 구시렁댔으나, 기분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레르하겐이 아무리 귀찮은 듯 굴었어도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칼처럼 자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 꼴이 돼서는, 나한테 말도 안 해 주고. 아니 뭐, 나한테 말해 줄 필요가 없긴 한데.’
결국 나는 머리를 털었다. 레르하겐의 일에 언제 그렇게 관심이 많았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설득을 해 보았으나,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긴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외출 준비를 다 한 나는 습관적으로 정원 쪽으로 갔다. 다행히도 더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는지 레르하겐은 일전과 마찬가지로 나무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정원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그 아래 있는 하시스를 발견하고 턱을 들었다. 하시스는 나를 발견하고 뭔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저 꼬맹이가 찾…….”
“됐어. 나 로드님 찾으러 온 거 아니야. 나가 봐야 해. 켈리어드 대공과 관련해서 알아볼 게 있어.”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새침하게 말했다.
하시스는 내 태도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굳이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뭐, 보아하니 레르하겐은 당분간 계속 황궁에 있을 것 같으니 그의 말대로 홀로 처리해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나를 감쌌다.
‘마법?’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와 비슷한 마력의 기운은 다름 아닌 레르하겐이 나를 상대로 마법을 운용할 때 느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위에 누워 있던 레르하겐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뭐예요?”
“방어막이다.”
갑자기 웬 방어막?
지금까지 아이의 몸으로 외출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방어막을 쳐 주다니. 혹시 레르하겐을 피투성이로 만든 그놈이 나를 공격할까 봐 그런 것일까.
나는 굳이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그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어서 셀라까지 마차에 올라타자 곧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황궁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일전에 내가 납치를 당했던 곳이었다. 셀라에게 미리 내가 갈 거라고 기사들에게 언질을 주라고 했기에 그곳에는 이미 경비 대원과 기사 몇몇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 어쩐 일로.”
나는 나를 향해 예를 취하는 경비 대원을 힐끔 보고는 걸음을 옮겨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폐허가 된 납치 장소에 도착하여 주변을 훑어보았다.
‘딱히 이상한 기운은 없는 것 같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경비 대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의 명령이 있어서, 내가 대신 물어보러 오게 되었어.”
“네, 네? 아, 폐, 폐하께서. 무슨 명령을…….”
“혹시, 켈리어드 대공이 며칠 전에 다녀갔나?”
“네에?”
“다녀갔구나.”
경비 대원은 그야말로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커다랗고 우렁찬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 말에 그의 얼굴 위로 큰일 났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켈리어드 대공이, 와서 뭘 묻지 않았어?”
“그럴 리가요. 그때 황녀 전하께서 저희에게 함구령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벌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의 전말을 다 말해 줬지?”
경비 대원은 누가 봐도 내 말을 긍정하는 눈치로 안절부절못했다. 기실 켈리어드 대공과 어린 황녀를 비교해보자면 앞의 존재가 더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뒤에 있는 것이 황제라면, 경비 대원으로서는 당연히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것이…… 제가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역시.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세베르 녀석이 여기에 와서 무슨 낌새를 맡은 거 같았다.
어떻게 내 마력을 추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시 상황이 복잡했다는 것은 알겠다. 그는 감이 훌륭하니 진실에 가까운 추론을 펼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경비 대원이 질겁하며 말했다.
“진짜로 제가 말한 게 아닙니다. 그 꼬마가, 그 꼬마와 그 늙은이가 함부로 말을 흘리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