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0화
레르하겐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하시스는 잠깐 고민에 빠진 나를 힐긋 보았다.
“그런데 스승님은 왜 찾는 거냐?”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켈리어드 대공이 무슨 짓이라도 했어?”
“어? 아, 그건 아니야.”
그러고 보니 세베르는 그날 이후로 딱히 이렇다 할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냥 내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 녀석이 진짜로 내 정체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조용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
하다못해 다시 떠보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하. 복잡해.”
짜증스러운 내 목소리에 하시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차피 레르하겐의 행방도 묘연하겠다, 나는 굳이 더 대화를 잇지 않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진짜로 어딜 간 거지?’
사실 레르하겐이 딱히 큰 위험에 빠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리 할 일 없이 노닥거려도 언제나 황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재가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게다가 왜 하필 이렇게 정신없을 때 자리를 비운 거야, 이 망할 드래곤 로드. 내가 급한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확 가다가 도마뱀한테 동족 상해나 당해라.’
나는 속으로 되지도 않는 ‘저주’를 퍼부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무탈하다면 무탈한 하루가 지났다. 힘들게 업무를 처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갑자기 뭔가가 팔랑거리면서 내 앞으로 떨어졌다.
‘마법 전언?’
혹시 레르하겐이 보낸 것일까, 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돌돌 말린 종이를 풀었다.
그러나 그 위에 찍힌 낙인을 보며 나는 다시 김빠진 얼굴을 했다.
“뭐야. 비올레에게서 온 것이잖아.”
그날 지하 감옥에 수감된 흑마법사, 그러니까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사건에 이용해 먹은 그 마법사를 심문한 뒤로 비올레는 한 번도 황궁에 온 적이 없었다.
간간이 마력구를 통해 흑마법사가 뭔가 새로운 소식을 토해 냈는지 물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나를 믿는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다시 그 흑마법사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하긴, 총명한 그녀는 내가 그 흑마법사를 이용해 먹었을 때부터 내 결정에 의심을 보이거나 간섭하지 않아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전언?’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기둥에 살짝 기대고는 전언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내용을 읽는 순간, 나는 허리를 펴고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요즘 마물과 흑마법사들을 처리하고 다니셨어요? 이 며칠간 아르시스 제국 및 주변 국가에서 마물들과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사체들의 잔해가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어서요. 혹시 폐하와 관련된 문제인가요?
PS: 덕분에 마물의 사체가 남아도는데 연구하고 싶으시면 보내 드릴게요.]
“이게 뭐야? 마물과 흑마법사?”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내가 근래에 특별히 제국의 치안과 안위에 신경을 쓰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무더기로 마물과 흑마법사들을 상대한 기록이 있다면 내게 보고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나나 세베르가 나서지도 않았는데 누가 처리한 거지?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니고 아르시스와 그 주변을…… 어, 설마.’
레르하겐?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렇게 스케일이 큰 짓을 벌일 만한 존재는 이 세상에 몇 없었고, 그중에서도 레르하겐은 가장 강한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바로 종이를 내려놓고 인형을 소환했다.
일단은 비올레에게 연락해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통신 마법을 시전하자, 비올레는 누가 봐도 작위적이기 그지없는 친절한 미소를 담고 나를 맞이했다.
“어머나, 폐하. 어쩐 일로 또.”
<무슨 소리야? 마물과 흑마법사의 사체라니. 갑자기 어디에서 발견되었다는 거야?>
“어? 폐하가 하신 게 아니었어요? 저는 당연히 폐하께서 하신 줄 알고.”
<이 며칠 동안 내가 황궁 일로 얼마나 바빴는데.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죽일 여유가 어디 있어?>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그럼 그건 뭘까요?”
비올레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인형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내가 흐음-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그 사체들을 발견한 곳은 어딘데?>
“가장 최근에는 아르시스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했어요. 밀프 평원 남동부 쪽인데, 죽음의 협곡과 조금 가까운 곳이라서 일단은 주변을 더 조사해 보고 있어요.”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낼 만한 방법은?>
“딱히요. 추적 마법을 쓰려고 했는데 어려워요. 게다가 어쨌든 마물과 흑마법사들을 저희 대신 처리해 준 거니까 너무 죽기 살기로 찾는 것도 인력 낭비 같은 느낌이고.”
마탑이 추적을 하기 어려운 존재라. 어쩐지 점점 레르하겐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 같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전언을 훑어보았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다가 레르하겐이 나타나면 물어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지, 레르하겐이 언제 나타날지 어떻게 아는가.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긴 내가 문득 아래에 붙은 추신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쳤다.
<아니 그런데 이 아래 추신은 또 뭐야?>
“아, 그거 혹시 연구용으로 쓰일까 해서요. 웬만하면 이런 거 절대 안 넘기지만, 지금 표본이 너무너무 많아서 솔직히 좀 버겁…… 아니, 버겁지는 않지만, 나눔이 미덕이잖아요. 나누면 좋죠. 폐하께 도움을 드릴 겸?”
<그냥 보관하기에는 자리를 너무 차지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네. 됐어, 필요 없어. 연구는 네가 하고 보고서만 정리해서 내게 줘.>
“진짜 날로 드시네요. 대공 전하는 직접 하시던데.”
날로 먹는다는 말에 쯧 혀를 차던 나는 갑자기 세베르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베르가 무엇을 직접 해? 마물 연구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 음. 그게 말이죠. 어떻게 말해야 하나.”
<눈알 굴러가는 거 다 보이니까 성실하게 대답해.>
“아, 이거 제가 말씀드렸다고 하시면 안 돼요. 알겠죠?”
<말해.>
“사실은 예전에 켈리어드 대공 전하께서 저희를 도와 마물을 처리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마물의 잔해를 대공가로 보내라는 말씀을 하셔서, 어쨌든 저희가 잡은 것도 아니니 보내 드린 적이 있거든요.”
마물의 잔해를 요구했다고?
‘잠깐만. 마물은 처리당한 뒤에도 한동안 마력의 흔적을 남겨. 추적 마법으로 다른 마물의 흔적을 추적하는 건 일도 아닐 테고. 굳이 추적하자면 당연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부터 했을 거야…… 그럼 수도에 나타난 마물의 흔적도 발견했으려나?’
최근에 나는 딱 한 번, 마물과 완전히 가깝게 접촉을 한 뒤 심지어 그들을 깡그리 날려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세베르가 진정으로 그 마물의 잔해를 받아 가 추적을 했다면, 그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켈리어드 대공가의 놈들이 추적 마법에 능통했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기사단과 치안대 및 피해자들의 입을 막으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어차피 폭발 사고로 대충 무마된 그 사건을 세베르가 안다고 해도 리건에게 명령해 내 선에서 가볍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마물을 통해 그곳을 추적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야. 아무리 켈리어드 대공가의 마법사들이 추적 마법에 능하다고 해도 나나 레르하겐의 마력을 쉽게 알아낼 수는 없어. 그들은 나보다 약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데.
‘으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나는 괜히 영상 너머에 있는 비올레를 째려보았다.
저게,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내게 보고를 해야지 입을 다물고 있었어?
<너 진짜 조만간 내 손에 크게 혼날 줄 알아.>
“네? 아니, 제가 뭐,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게다가 그 자리에는 엄연히 저뿐만 아니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아무튼 저는 잘못한 게 없……!”
그러나 나는 비올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영상 마법 시전을 그만두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왜 자기만 벌하냐고 하는 그녀의 양심 상태가 인상 깊어 감탄을 흘렸다.
‘그나저나 세베르가 진짜로 그렇게 나를 추적해 낸 건가? 그곳에 있는 마력의 잔해가 내 마력과 결이 비슷해서? 하지만 그 뒤로 레르하겐이 크게 뒤엎었는데, 그 정도로 추적이 가능하긴 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꾸만 불안함과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들어왔다.
‘그래서, 세베르는 진짜로 내 정체를 아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한걸음 물러서서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짜증 나잖아!’
결국 나는 가만있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이대로 세베르를 찾아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를 불러 떠본다고 해도 되레 그에게 확인 사살을 하는 기회만 주는 것이 아닌가.
‘만약 진짜로 내 정체를 알고 있다면,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지?’
황제가 황녀가 되었다니. 이것보다도 큰 약점이 어디 있는가.
설사 세베르가 이것을 빌미로 겁박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감감무소식인 것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 진짜, 내 주위 놈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날 귀찮게 만들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찰나.
“어?”
“무슨 일 없나?”
“로드님?”
나는 내 앞에 나타난 인영에 눈을 크게 떴다.
집무실이라면 모를까 웬만해서 내 침실에 이렇게 기별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 그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더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몰골’이었다.
“다치셨어요?”
나는 그의 셔츠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 피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지금 레르하겐이 다쳐서 온 건가? ‘그’ 레르하겐이?
애초에 단정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감안한다 해도 현재 그의 모습은 과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다행히도 어디 찢어지거나 찔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살짝 벌어진 셔츠 깃 사이를 수놓은 핏방울은 그야말로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