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9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대가 없이 뭔가를 얻는 선택지라니,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미움받는 게 뭐가 나빠. 세상에서 미움받는 것만큼 별 볼 일 없는 대가도 없어.”
“나쁩니다. 미움은 결국 복수와 증오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공포로 극복하면 그만이야.”
“그래서, 제가 폐하께 공포를 느끼기를 바랐습니까?”
“우리 지금 대화, 뭔가 다소 어긋난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뭐야? 매번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뻔뻔하게 대가 없이 일을 처리하는 거? 아니면, 그저 손 놓고 내 주변에서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거?”
어느 쪽이든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이 호감이든, 목숨이든, 아니면 그 외 다른 어떤 것이든.
나는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한 게 내 잘못이지. 이만 나가 봐. 사직은 꿈도 꾸지 말고.”
이만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나 정작 리건은 그런 내 말에 가벼이 웃으면서 조용하게 서류철을 들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께서 미움받을 생각부터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뭐?”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와 감정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
“……모든 일에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가는 최후에 치러야 할 마지막 보루이지, 가장 먼저 내놓는 무기가 아닙니다.”
말을 마친 리건은 고개를 숙인 뒤 방에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말았다.
미움받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부정적인 평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대가부터 내놓을 생각을 하지 말라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속으로 퉁명스럽게 읊조려 보았으나 기실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말하는 대가라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보루였으며, 나름의 방어선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대가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니까.’
나는 그간 수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살아왔다.
황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 손에 진정으로 힘이 쥐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순간은, 언제나 내가 각종 ‘대가’를 치르는 순간들이었다.
그저 가만히 있는데 사랑해 줄 사람이 어디 있어.
이 세상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호의와 감정을 베푸는 존재가 있나?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받으면, 내가 불편했다.
그래, 내가 불편해.
위기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불편하고, 누군가가 내 기분을 고려하려 애쓰는 것도 불편하다.
누군가가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미움받을 각오를 무릅쓰고 행한 일에 화 대신 설교를 듣는 것도 이상했다.
‘자기가 언제 나한테 설교를 했다고. 리건 주제에.’
한평생 미움만 받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존경과 인정을 받은 것은 내 손에 피를 묻히던 순간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마저도 온전하게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
손에 피를 묻혀도 그런데, 하물며…….
나는 리건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그의 말을 그저 투정 정도로 생각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이기적이고, 내가 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그저 거래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다만, 희생이나 대가에 대해 생각하자, 거짓말같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이전 납치 사건 때 레르하겐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리고 그때도, 나는 내가 한 것이 희생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더 마음이 착잡해졌다.
마치, 내가 틀린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레르하겐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언젠가는 오겠거니 하면서 계속 기다렸는데 며칠째 코빼기도 안 보이고. 요즘 내 일도 바빠서 그러려니 했는데 너무하네.’
결국 나는 괜히 툴툴거렸다.
분명 일이 잘 해결되어 가고 있는데,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 * *
바프체트의 숲은 죽음의 협곡에 도착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서, 차가운 늦가을날의 한기가 닿지 못하는 장소였다.
기이하게도 사시장철 푸르게 흔들리는 울창한 나무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고, 그 위로 수놓아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그야말로 환상적이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레르하겐은 바로 그곳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쾅-!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반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기 그지없던 땅은 마치 벼락에 긁힌 듯 반으로 갈라졌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수많은 마수들의 시체들이 겹겹이 쌓이고, 애써 도망친 인간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상대는 드래곤 로드. 악마에게 영혼을 판 한낱 흑마법사 따위가 상대할 만한 이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쉴 새 없이 도망치던 흑마법사들의 앞으로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났다.
쾅!
투두두둑.
산산이 흩어진 마수들의 잔해가 눈앞에 떨어지고, 그 사이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렌은 어디 있지.”
“으…… 끄으윽.”
그야말로 잔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흑마법사들의 눈빛이 공포로 절여졌다.
아무리 마족과 거래를 진행한 시점에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다지만, 자신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연구해 낸 수많은 마수들을 마치 벌레 죽이듯 제거하는 존재 앞에서는 당연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레르하겐은 바닥에 엎드린 채 덜덜 떨고 있는 흑마법사들을 무심한 얼굴로 응시했다.
차가운 벽안에는 일말의 흥미나, 하다못해 부정적인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눈빛은 아까 전 갈기갈기 찢어 버린 마수들을 상대할 때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마수들에겐 단번에 죽음을 선사하며 자비를 베푼 것과 달리 흑마법사들 앞에 선 그런 자비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으윽.”
“카렌은 어디 있지.”
귓가를 울리는 섬뜩한 목소리에 가장 앞에 있던 흑마법사가 이를 악물고 크게 외쳤다.
“모, 모른다!”
“…….”
“우리는 그분의 거처를 모른다. 애, 애초에 뵌 적도 없어. 우리는 그저 그분의 뜻에 따라…… 커헉.”
그러나 말을 잇던 흑마법사가 별안간 피를 토하더니 이내 바닥에 철퍼덕 엎드렸다.
그야말로 깔끔한 처리. 한시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이 제가 죽인 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레르하겐은 그 뒤에 있는 흑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나른한 눈빛에 흑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덜덜 떨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개조한 마수들을 끌고 죽음의 협곡으로 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 드래곤 로드는 다짜고짜 그들의 손에 있는 마수들을 수많은 조각으로 만들더니 차분하게 물었다.
- 카렌은 어디 있지?
그 권태로운 태도에 어떻게든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마족과 내통한 인간들의 배신자. 악마들에게 영혼을 팔아 다른 인간들을 제물로 삼는 간악한 족속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인간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 그들은 곧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생각에 달달 떨었다.
“모, 모릅니다.”
“…….”
“진짜로 모릅니다. 저희는 따로 명령을 받는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족의 왕께서 어디에 있는지 진짜로 모릅니다.”
“…….”
“원하시면 저희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라도…… 그분은 마왕의 거처를 알지도 모릅…….”
“아니. 필요 없다.”
“……!”
“내 딸이 그자는 죽지 않기를 바라거든.”
“쿨럭.”
“크어억.”
말을 마치자마자 흑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꼬꾸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지켜본 레르하겐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엉망이 된 숲을 훑던 그의 시선이 잔해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진 마수들에 닿았다.
‘역시, 별 소용 없나.’
이 며칠 동안 제국에 있는 마수들과 흑마법사의 씨를 말려 버린 레르하겐은 여전히 일말의 흥미도 없는 눈빛을 했다.
피가 배어드는 옷자락의 혈향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마수와 흑마법사들을 처리할 수 있는 만큼 처리했으니 한동안은 제국이 조용할 것이라는 거다.
기실 겔라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인간 세상의 안녕 따위 인간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옆에서 제국의 안위를 신경 쓰는 이가 하나 있는 이상 이건 그리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르하겐은 걸음을 옮겼다.
며칠 동안 이렇다 할 수확도 없고, 딱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잔챙이들을 죽이는 데 흥미는 없지만 정작 가장 큰 단서를 쥐고 있는 인간은 에슈트가 건드리지 말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레르하겐은 딱히 ‘그자’를 추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황궁으로 돌아가야겠군.’
황궁을 너무 오래 비우긴 했다.
물론 하시스나 일리안 녀석이 무슨 일이 있으면 알아서 전했겠지만, 위급한 상황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에슈트는 종종 자잘한 일이 있을 때도 그를 찾았다. 한 번쯤은 들러서 뭔 일이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워프 마법을 통해 황궁으로 가려는 그의 앞에, 갑자기 짙은 어둠이 쏟아졌다.
픽.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느긋하게 상처를 매만지던 레르하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까마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푹.
새카만 빛이 레르하겐을 관통했다. 그 순간, 레르하겐이 무심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 며칠간의 수고가 그리 헛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오랜만이야, 레르하겐?”
그것을 증명하듯 유려한 사내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 * *
“로드님은 아직도 소식이 없어? 설마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황궁에 안 오신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진짜다. 아무래도 가출한 거 같아.”
“뭐야. 진짜? 어디로 가출했는데?”
하시스는 내 말에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했다. 그 레르하겐이 가출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