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8화
“금기?”
델멘 공작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금기’라고 불릴 만한 것은 단 하나였다.
공작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답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에 휘말릴 수가.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기를 반복했다.
델멘 공작은 책상 위에 놓인 서신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딸을 한 번 보았다.
그렇게 꽤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이리스는 그저 조용하게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델멘 공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아이리스를 마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것도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이냐.”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말을 믿느냐.”
“믿지 않았다면 아버지를 뵈러 오지 않았겠죠.”
“대체 왜.”
“…….”
“네가 그치를 이렇게 믿는 이유가 무어냐.”
“리건이 그랬습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는 게 좋을 것이라고.”
“그 아이는 이미 폐하의 사람이야! 가문에 등을 돌리고 폐하의 명령이라면 다 할…….”
“설사 믿지 않는다고 해도, 도박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요.”
아이리스의 말에 델멘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아이리스의 말이 맞는다.
만약 자신이 진정으로 ‘금기’에 연루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델멘 공작가는 단순히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타격을 받을 것이다.
아니, 과연 타격뿐일까.
델멘 공작가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말을 덥석 믿을 수는 없어. 이간질일 수도 있는데…….’
“젠장.”
결국 델멘 공작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그의 앞에 놓인 두 개의 갈림길은 그야말로 극단적이기 그지없었다.
‘어느 걸 선택해도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죽는 절벽과 마찬가지야. 떨어지는 순간 뼈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지겠지. 대체 왜 그분은 그런 금기에 손을…… 잠깐만. 그럼 혹시 최근에 갑자기 이상하게 굴던 것들이 전부?’
생각을 정리한 델멘 공작은 평온함을 찾은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딸에게 닿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다. 네 판단을 어디까지 믿느냐?”
“최소한, 이 일에서만큼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리스의 말에 델멘 공작이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몇 분 뒤.
“가문의 책자를 가져와라.”
“가문의 책자는 왜…….”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아직은.”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델멘 공작이 입을 열었다.
* * *
“아이리스 델멘이 정식으로 아버지의 가주직을 박탈하는 것에 관한 안건을 가문 내 원로 회의에 상정했다고 하더군.”
“아, 겨우 가주를 교체하는 건데 무슨 원로 회의에 안건 상정씩이나.”
“가문의 규모가 크고 일족의 수가 방대할수록 체계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지. 마침 이번 일을 계기로 원로원 내에서 델멘 공작의 위상이 떨어졌으니, 별로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런가요.”
“예상대로 일이 흘러가서 다행이구나. 네 어미가 많이 기뻐하겠어.”
따뜻한 햇살이 비쳐 드는 오후.
어마마마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엘비어츠 공작의 저택을 방문했다가 ‘잡힌’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내 앞에 있는 케이크를 푹푹 찔러 댔다.
‘뭐가 이렇게 달아. 대충 먹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건 뭐 입에 대기도 싫네.’
애초에 내 계획은 그저 몸에 좋다는 약들만 전해 주고 바로 황궁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비어츠 공작은 저번에 방문했을 때 아무것도 먹이지 못해 아쉬웠다며 가볍게 티타임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
딱히 끌리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공작가의 정원에서 주스와 케이크를 먹게 됐다.
다만, 생각보다 훨씬 달아 금방 포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냅킨을 들어 손을 닦았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엘비어츠 공작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어마마마께서 소식을 듣고 꽤 기뻐하셨어요. 예상대로 일이 흘러간다고요.”
“에스트리아는 역시 머리가 좋아. 어린 시절 제왕학 교육을 받았다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황제의 재목이 되었을 텐데.”
엘비어츠 공작의 말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실 그가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나와 손을 잡고 황위를 찬탈할 때도 이런 말을 했었다.
- 대체 선황은 왜 그리 너를 배척한 걸까? 아무리 엘비어츠 공작가를 경계한다고 해도 자신의 적녀를 그렇게까지 증오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물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선황이 아닌 이상 그도 나도 내놓을 수 없었다.
답을 내놓을 만한 이는 이미 총구 아래 죽었고, 나는 아버지의 제대로 된 온기 한번 받지 못한 채 자랐다.
이제 와서 그 이유를 궁금해해 봤자 해답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한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순진하게 웃었다.
“그래도 어마마마는 홀로 모든 것을 해내셨잖아요. 그게 더 대단한 것 아닌가요? 어마마마께선 지지받지 못하는 황녀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셨는걸요.”
“그랬지, 네 어미한테는 오히려 좋은 일이 되었지. 그저…….”
“…….”
“그저, 그 때문에 레베카만 안타깝게 되었어. 내가,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레베카가 그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레베카. 선황의 아내이자 내 어머니.
나는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으며 묵묵히 주스를 마셨다.
새콤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그나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밝게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어, 벌써 가려고?”
“네. 곧 수업 시간이에요. 잘 먹었어요.”
있지도 않은 수업을 거짓으로 꾸며 낸 나는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엘비어츠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짐짓 타박하듯 말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무슨 수업을 시킨다고. 어릴 때는 많이 놀아야지.”
“그래도요. 제가 어마마마의 유일한 딸인데요.”
“그래. 그건 그렇지.”
“엘비어츠 공작께서도 건강 꼭 유의하세요. 어마마마께서 많이 걱정하신대요. 제가 전한 약도 꼭 챙겨 드시고요.”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래도.”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또 봐요!”
발랄하게 인사를 마친 나는 그대로 마차에 몸을 실은 채 황궁으로 돌아갔다.
계획보다 시간이 늦어져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내 집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리건이 보였다.
이 며칠 동안 쓸데없는 말 없이 얌전하게 군 터라 나는 내심 안도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의자로 올라갔다.
그런 내 앞에 리건이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누님께서 가문의 원로 회의에 제출한 자료입니다. 가주로서 아버님의 실책과 부적격 이유에 대한 모든 고발 자료가 낱낱이 쓰여 있습니다.”
“오. 이거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센데? 내가 델멘 일가의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델멘 공작을 밀어낼 거야.”
나는 서류를 훑으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 아이리스에게 델멘 공작을 공작위에서 끌어내릴 것을 명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강하게 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리스는 내놓은 자식도 아닌, 델멘 공작이 가장 아끼는 딸이었다.
만약 내가 아이리스라면 절대 이렇게까지 칼을 갈지는 못했을 것이다.
“델멘 공작이 현명한 결정을 내렸네.”
나는 속으로 작게 읊조리다가 서류철을 닫고 다시 리건에게 넘겼다.
“이제 델멘 내부 사정까지 일일이 내게 보고할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아이리스 델멘이 델멘의 주인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결과가 나오면 그것만 내게 알려 줘, 알겠지?”
“네.”
“아아.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까. 보아하니 네 누나가 가주가 되는 건 시간문제 같고…… 그럼 역시.”
“제 사직서를 수리하실 타이밍이죠.”
“이런 망할. 넌 왜 잊을 만하면 그딴 헛소리를 하니?”
안 그래도 한동안 너무 잠잠하다 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리건은 내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심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험상궂은, 가능한 최고로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래? 설마 진짜로, 내가 너를 신뢰하지 못하고 혼자 일을 진행한 게 섭섭하다는 그런 느끼한 이유로 내게 반항하는 거야?”
“글쎄요. 아니라고는 못 하죠.”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 말해! 대체 그게 뭐냐고!”
리건은 그런 내 말에 안경을 추켜올리며 나를 힐긋 보았다.
왠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묘한 눈빛에 괜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그렇게 봐?”
“폐하는, 폐하께서 온전히 소유하고 계신 것에 민감하시죠.”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눈을 가늘게 떴다. 리건은 그런 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에 일순 기분이 나빠져 쯧 혀를 찼다.
“원래 제왕은 자신의 것에 민감해.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야.”
“빼앗기기 싫으면, 지키면 됩니다.”
“그래서 지키고 있잖아. 이번에도 너를 지키기 위해서 한 짓이야. 그런데 지금 이딴 식으로 나를…….”
“만약 제가 폐하께 진짜로 분노했다면 어쩌려고 하셨습니까.”
“……!”
“제가 진짜로 폐하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건.”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그러나 다시 태연하게, 정확히 말하자면 태연한 척 대꾸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게 저를 잃는 거라 해도요.”
“그게 대가라면 감수를 해야겠…….”
“네, 그게 문제입니다.”
“……뭐?”
“폐하는 왜 자꾸만 대가를 하나 치러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십니까. 대가 없이 갖고 싶은 것을 갖는 선택지는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