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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97화 (97/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7화

마치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나 그 속에 은근한 가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회의실에 있는 누구도 딱히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럴 만했다.

그동안 세베르와 내 관계를 생각해 보면 내 외할아버지인 엘비어츠 공작이 그리 구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세베르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듯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그 대신 걸음을 옮겨 상석으로 다가갔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공작의 말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엘비어츠 공작이 일부러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물론, 아무도 엘비어츠 공작이 진짜 겸연쩍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보낸 인형이 대충 회의를 마쳤다.

애초에 공식적으로는 점잖을 떠는 게 귀족 무리이니, 회의는 무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고 인형이 자리를 뜨자마자, 갑자기 샤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한데 엘비어츠 공, 감히 공을 해하려고 한 범인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셨습니까?”

갑작스럽게 나온 주제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델멘 공작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샤트 공작이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모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지금, 그야말로 공개적으로 델멘 공작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델멘 공작은 어쨌든 실질적인 원로원의 수장이었고 지금까지 귀족들의 힘의 중심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지.’

켈리어드 대공이 돌아온 것도 모자라 엘비어츠 공작까지 완전히 원로원에 복귀했다.

그동안 귀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짓을 어떻게 했든, 황제의 외척과 황제와 대적할 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생긴 이상 델멘 공작가가 밀려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귀족들은 힘에 예민한 존재들이었다.

“글쎄, 아직 찾지 못했네만, 폐하께서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시고 계시니 그저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네.”

“아, 하긴 이 시각 가장 범인을 찾고 싶으신 분은 다름 아닌 폐하겠지요. 그동안 얼마나 엘비어츠 공을 아끼셨습니까.”

“그저 이 늙은이의 존재가 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폐라니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공께서 쓰러지시고 폐하께서 그야말로 범인을 찾으시려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힘을 쏟으신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뭐, 얼추 짚이는 데가 있으신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샤트 공작의 시선이 델멘 공작을 향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델멘 공작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죽이고 쥐 죽은 듯이 있던 샤트 공작이 갑자기 나서서 이런 ‘발칙한’ 말을 하다니.

“뭐, 범인이야 잡히면 좋고, 잡히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게지. 나는 그저 폐하께서 안녕하시기만을 빈다네. 그래서 이리 원로원으로 돌아왔고 말이야.”

말을 마친 엘비어츠 공작이 허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더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흩어졌다.

“하.”

그것을 보던 나는 왠지 모르게 입 안이 써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번 일로 델멘 공작의 대외적 지위는 점점 축소될 거고, 나는 가급적 시간을 끌다가 지하 감옥에 있는 ‘범인’을 ‘처단’할 것이다.

범인이 끝까지 진실을 내뱉지 않고 자결하여 단서가 끊겼다고 알리면 이번 일도 흐지부지되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잊히겠지.

단 한 사람, 델멘 공작의 머릿속만 빼고.

나는 아까 전 영상에서 보았던 엘비어츠 공작과 샤트 공작, 델멘 공작 그리고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마지막으로 세베르의 얼굴이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지만 그것은 일단 옆으로 치워 버렸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델멘 쪽을 신경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속으로 그렇게 읊조린 나는 펜을 들었다.

* * *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더 별로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저택으로 가는 내내 델멘 공작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멍청한 것들까지 마음을 돌렸을 정도면 꽤 심각하다는 뜻이군.’

델멘 공작의 눈에 샤트 공작이나 그 아래 몇 개의 조잡한 가문은 그야말로 멍청하고 눈치코치 따위 없어 황제에게 대적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귀족들의 전형이었다.

그런 그들도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직감 정도는 있었는데, 그들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데에는 그를 제외한 귀족 내부에서 어떤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젠장,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 어쩐다 할 때는 언제고…….’

심지어 그동안 델멘 공작을 누구보다도 따랐던 애들러 후작 또한 오늘따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옛정을 생각하여 적당히 관망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대놓고 델멘 공작을 버리는 무리에 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강대한 사병이 있는 엘비어츠 공작가나 대대로 명망과 권위를 쌓아 온 켈리어드 대공가와 달리 델멘 공작가는 정치적 눈썰미와 공작가라는 지위만으로 귀족들을 휘어잡으며 승승장구한 가문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상업을 통해 축적한 부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귀족들만의 알력이면 모를까, 아예 제국의 경제적 명맥을 휘두를 수 있는 황실이 끼어든 이상 부의 축적은 딱히 큰 힘이 되지 못한다.

델멘 공작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 망할 무력, 사병이 있어야 하는데. 무기만 주야장천 사들이면 뭐 하나, 그것을 사용할 만한 인재가 없는데. 게다가 지금 상황도 엉망이라 도움을 청하기도 그렇고.’

그렇게 마차가 달리는 내내 고민에 빠져 있던 델멘 공작은 저택에 도착했다는 시종의 말을 듣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일단은 버텨 보아야겠군. 아직 아군이 없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생각한 그는 마차에서 내린 뒤 저택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외투와 장갑을 벗어 집사에게 넘기고는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집사가 그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저, 각하, 아까 각하 앞으로 온 서신이 있습니다.”

“서신? 누구에게서 온 거지?”

델멘 공작의 물음에 집사는 말 대신 눈빛으로 대꾸했다.

그 뜻을 정확하게 읽어 낸 델멘 공작이 약간 반색하는 듯하다가 크흠 하고 기침을 했다.

“내 집무실로 가져와.”

“하지만 저…… 그게.”

“왜?”

“그 서신을 소공작께서 보시고는, 자신이 전해 드리겠다 하시며 가져가셨습니다.”

“뭐……?”

“죄송합니다. 제가 만류했으나 소공작께서 집요하게 발신인을 여쭈시는 데다가 꼭 전달하겠다고 하셔서 그만.”

집사의 말에 델멘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리스는 평소에 단 한 번도 그의 서신이나 사적인 물건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델멘 공작은 그런 딸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딸을 잘 교육시켰다는 긍지를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델멘 공작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폐하와 만찬을 같이 했는데, 설마 거기서 무슨 헛소리라도 들은 건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온갖 가설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딸의 인영을 보고는 멈칫하고 말았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아이리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나 안 그래도 원로원 회의로 인해 예민해져 있던 델멘 공작에게는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아이리스의 손에 들린 하얀 봉투에 머물렀다. 봉투는 찢겨 있었다.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는 소리였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집사에게 들었다. 아비의 서신을 함부로 가져갔다고.”

“죄송합니다.”

“평소에 절대 그러지 않더니, 갑자기 반항기에 든 것이냐?”

델멘 공작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여움이 배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르던 집사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더더욱 숙였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다시 델멘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님, 독대를 청합니다.”

“…….”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델멘 공작은 반듯하기 그지없는 제 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결국 호통 대신 가벼운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들어와.”

아버지의 승낙이 떨어지자 아이리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달깍.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의자에 앉은 델멘 공작이 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아, 일단 그 서신부터 이리 내.”

“폐하께서 알고 계십니다.”

아이리스의 말에 손을 뻗어 서신을 받으려 한 델멘 공작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야말로 쓸모없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입을 뗐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폐하께서 무엇을 알았다는 말이냐.”

“아버님께서 이 서신을 보낸 자와 결탁하셨다는 것을.”

“뭐?”

“그리고 폐하를 몰아내려고 한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십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냐. 폐하께서 그러더냐? 그런 정통성 없는 치가 하는 말을 믿어?”

“믿든 믿지 않든 사실 아닙니까.”

“아이리스 델멘.”

결국 델멘 공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노기 섞인 목소리로 아이리스를 불렀다. 지금까지 딸이 아무리 잘못해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그였다.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겨우 외부인의 몇 마디로, 이 아비를 반역자로 내몰아? 폐하께서 내가 이것을 시인하면 너만은 살려 준다고 했느냐?”

“아버님.”

“그치가 너를 지금 인질로 잡고 나와 대적하려 하는 거다, 아이리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치는…….”

“이번 사건, 진정으로 폐하 혼자 벌이신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그때였다.

말을 잇던 델멘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강력하게 인정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자의 얼굴이었다.

아이리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미 열어 본 서신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버림받으셨습니다.”

“…….”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버림받기 직전에 마지막 핏방울까지 쪽쪽 빨리고 있는 상태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

“아버님, 이번 사건의 발단은 애초에 권력 다툼이 아닙니다.”

“…….”

“아버님께서는, 금기를 건드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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