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6화
내 물음에 리건의 눈가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수긍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그저 나를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 호박색 눈동자에 나는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리건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제 관계에 대해서 폐하께서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오해?”
“저는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델멘 공작가에 애착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오히려 제가 애착을 보이는 상대는 따로 있죠. 그러니 애초에 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리 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일순 리건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델멘 공작가에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그럴 리가. 물론 지금까지 그와 델멘 공작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델멘 공작가의 식솔들은 그의 가족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델멘 공작가와의 거리가 좀 있더라도, 리건은 가족을 아예 버릴 만큼 독한 성정은 못 된다.
리건은 그런 내 표정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에 괜히 뱁새눈을 하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저 때문에 델멘 공작가를 처리하는 것을 주저하신다면 당연히 제가 꺼져 드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너.”
“그래서, 이제는 이해하셨습니까?”
나는 일순 리건의 의도를 어떻게든 파헤쳐 보고자 머리를 굴렸다.
기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그의 입으로 말한 게 다라는 걸 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나는 자꾸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거리다가 내 앞에 있는 서류철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사직은 안 돼. 지금까지 기껏 내 옆에서 해 먹을 거 다 해 먹었으면서 이제 와서 불리할 것 같으니까 발을 빼?”
“해 먹다니, 누가 들으면 제가 부정부패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아무튼 안 돼. 절대 안 돼,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돼. 내가 죽을 때도 널 내 무덤에 같이 묻어 달라고 할 거니까 죽어도 안 돼.”
“이 무슨 진드기도 아니고.”
“진드기라니, 이게!”
마치 아이라도 된 듯 나는 억지 섞인 말을 내뱉었다.
리건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아까 전보다 조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누이는, 확실히 총명하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엘비어츠 공작을 상대할 정도는 아닙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그 순간 내 얼굴이 설핏 굳었다.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 알고 있었…….”
“폐하의 심산을 알아채는 것은 제게 있어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
“구체적인 계획은 몰랐어도, 폐하께서 평소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름의 근원에 델멘 공작가가 얽혀 있다는 것도요. 다만…….”
리건은 손을 들어 자신의 안경을 추켜올렸다. 더없이 평온한 말투였으나 정작 그 속에 있는 내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리건이 말을 이었다.
“다만, 그저 화가 났을 뿐입니다.”
“……무슨 화?”
“글쎄요, 무슨 화일까요? 알아맞혀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리건이 갑자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너 지금 나 갖고 노는 거야? 겨우 리건 주제에?”
“원래 아무리 약한 생물이라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입니다.”
“꿈틀거리다 죽겠지. 어디 한번 끝까지 발악하면서 죽어 볼래?”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
나는 리건의 모습에 그만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사직 요청은 아직 철회하지 않았으니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따위의 말을 내뱉고는 방을 나갔다.
탁-.
부드럽게 닫힌 문을 보며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평소에 헤실헤실 웃고 다니던 녀석이 저러니까 더욱더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결국 입을 삐죽였다.
‘뭐가 화난다는 거야? 델멘 공작가에 애착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 그게 사직이랑 무슨 상관인 거지?’
속으로 연거푸 질문을 퍼부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침을 가지러 간 셀라가 노크 소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황녀 전하, 아침을 가져왔…… 어머나, 머리가.”
아까 전 리건이 나간 뒤 머리를 쥐어뜯은 흔적이 역력한 내 모습을 본 셀라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쉽게 복구가 가능했는지, 셀라가 테이블에 아침 식사를 세팅하며 말했다.
“일단 드시고 나면 다시 빗어 드릴게요.”
“양 갈래 싫어.”
“어머, 싫으세요? 그럼 평소처럼 하나로 묶어 드릴게요.”
셀라는 내가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일부러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고 여겼는지 순순히 웃었다.
나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풍성하게 차려진 테이블을 멀뚱히 내려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셀라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친구가 있는데 말이야…….”
내 뜬금없는 말에 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뭔가 깨달은 듯이 방긋 웃었다.
“네, 황녀님 친구분께서 말이죠. 무슨 어려움에 처해 있나요?”
“아니, 어려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없고?”
“그냥 그 친구가, 친구를 위해서 일부러 뭔가를 숨겼는데, 그 이유가 친구가 상처받을까 봐서거든.”
“그래서요?”
“그런데 그 친구가 화가 났대. 그리고 갑자기 사…… 아니, 절교하겠다고 했대.”
왠지 너무 유치하고 가벼운 이야기로 변한 것 같지만, 어차피 셀라에게 나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 더 리건의 말을 이해하고 싶기도 했다.
‘아이가 친구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게 이상할 건 없지.’
나는 일부러 사태의 심각성을 그저 작은 갈등 정도로 대충 얼버무리면서 셀라에게 물었다.
셀라는 내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떤 상처인데요?”
“그냥…… 친구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거든. 하지만 그렇잖아. 친구한테 직접 그런 일을 하라고 하는 건…….”
“흐음. 황녀 전하. 제 생각에 그 친구분…… 의 친구분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섭섭하신 게 아닐까요?”
“섭섭?”
리건 따위가 감히 나한테 섭섭?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누가 봐도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에 셀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 모르게 일이 진척되어 있으면 화가 나고 섭섭한 게 당연하죠.”
“그건 걔를 위한 거였어.”
“황녀 전하는 전하를 위해 하는 일이면 그 어떤 일도 기꺼이 모르고 지나갈 건가요?”
“말도 안 돼! 어떻게 나 몰래 일을 진행해?”
“그러니까요. 위한다는 것은 그런 거예요.”
“……어떤 거?”
“상대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상대의 선택권을 박탈한다라.
‘뭐, 그건 맞긴 한데.’
내가 저지른 일이 어느 정도 리건의 선택권을 박탈한 것은 맞았다. 그래서 그의 원망을 듣는 것을 아예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차라리 분노를 했다면 그의 사직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 리건은 평소와 다름없이 내 보좌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몇 년을 그의 상관으로 있었던 나는 그의 태도가 딱히 꾸며 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일까.’
왜 이렇게 찜찜한 걸까. 내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뭐, 됐어. 어차피 사직은 절대 안 시켜 줄 거니까. 만약 진짜로 화가 나면 나한테 원망을 쏟아 내러 오겠지.’
애초에 리건은 내 눈치를 보느라 내게 욕설을 못 퍼붓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침을 들었다.
* * *
엘비어츠 공작의 원로원 복귀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아니, 이걸 순조롭다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를 맞이하는 귀족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염려만 가득 담고 있었다.
“엘비어츠 공, 독에 당해 쓰러지셨다더니, 이리 완쾌하셔서 다행입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거짓말. 자신의 안위만 걱정했겠지.
평소와 다름없이 집무실에 앉아 회의실의 상황을 살피던 나는 어이가 없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델멘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나 등장과 함께 싸늘한 정적을 가져왔던 이는 세베르였는데, 기이하게도 오늘은 델멘 공작이 그 몫을 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히 다른 이유로.
델멘 공작 또한 그것을 눈치챘는지 서늘하게 피식 웃었다. 하긴, 하루아침에 원로원의 ‘총아’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니 오죽이나 자존심에 금이 갈까.
‘뭐, 내가 원한 대로지만.’
나는 조용하게 자리에 앉는 델멘 공작을 보다가 괜히 리건이 생각나서 쯧 혀를 찼다.
‘하여튼 저 가문은 이래저래 마음 쓰이게 하는 구석이 있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시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세베르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나를 찾아온 전적이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색하게, 세베르의 안색은 평소와 다를 바 하나 없었다.
아니, 진짜로 똑같나?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곧장 자신의 자리에 앉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내를 한번 훑어보았다.
본의 아니게 그의 시선 아래 놓인 귀족들이 저마다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 경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엘비어츠 공작이었다. 그가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이 늙은이가 있으니 이 회의실이 뭔가 달라 보이기라도 합니까?”
“오랜만입니다, 엘비어츠 공.”
“어이쿠. 이 늙은이가 원로원에 합류하자마자 켈리어드 대공 전하의 인사를 다 받아 보고. 아주 호사를 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