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5화
제6장. 결국 내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제 배로 낳은 딸에게 굳이 그렇게 야박하게 굴 필요가 있나 싶었다.
- 어마마마, 이거…… 어마마마께 드리려고 제가 직접 만든 쿠키예요.
- 이딴 것을 만들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장 더 보지 그래. 이딴 쓸모없는 데에 시간을 쏟으니 네가 그 모양인 게 아니냐.
- …….
-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계집. 겨우 너 같은 걸 낳으려고 내가 황후가 된 줄 아느냐?
-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네가…… 내 자부심을 바닥에 처박았다.
엘비어츠 공작가의 공녀였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 긍지와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겨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 그것도 후궁이 있는 사내와 결혼했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황후라는 자리에 연연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것은 나였다.
그녀의 긍지가 되어 주지도 못하고, 그녀가 원하는 황태녀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고, 그녀가 사랑한 엘비어츠 공작가의 자랑이 되어 주지 못한 나.
그런 나를 보면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굳이 깊게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죽고 엘비어츠 공작이 나를 찾아온 날,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째서, 나만 그랬을까?
그렇게나 재능이 차고 넘치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왜 나만 멍청했을까. 대체 왜 그들은 그렇게나 빛났던 것일까.
아무리 황가의 핏줄을 푸른 피라고 하나, 대대로 이리 천재들만 배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적통인 나는 그렇게나 멍청하고 보잘것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끝내 내가 신이 버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인정의 결과는…….
“어머나.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분명 평소와 다름없이 잠들었는데,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셀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땀을 흘리셨어요, 황녀 전하. 어디 편찮으세요?”
“어…….”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면 신관이라도?”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내가 땀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불이 너무 두꺼워 더웠거나.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좀 불편했나 봐.”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딱히 생각이 안 나.”
“저런, 그래도 땀을 이렇게까지 흘리시다니.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셀라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며칠 동안 생각이 많아져서 그게 꿈으로 나타나기라도 한 모양이다. 하긴, 괜히 쓸데없이 신경 쓸 것이 많기는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목욕을 끝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셀라가 자연스럽게 빗을 들어 내 머리를 묶어 주었다. 나는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젖살이 통통한 얼굴을 보다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셀라가 뭔가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죠? 엘비어츠 공작 각하께서 정식으로 원로원에 복귀를 하시는 날이.”
“아. 맞아.”
“독살 미수 사건 때문에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도 빠르게 원기를 회복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깨어나신 지 이제 일주일도 안 됐는데, 조금 더 휴식을 취하시지.”
“아무래도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폐하의 신병을 가까이에서 지키고 싶으신 거겠죠.”
“뭐, 그렇긴 하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엘비어츠 공작 각하께서 다시 원로원의 수장이 되는 건가요?”
셀라의 순진한 물음에는 딱히 정치적인 견제나 불안함이 들어 있지 않았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 원로원의 권력 교체 따위야 그저 먼 얘기이고 신기한 일일 것이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금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엘비어츠 공작을 원로원에 복귀시킨 것이 나이긴 하지만, 아직 델멘 공작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의 권력 교체가 얼마나 복잡한 일인데. 또 시끄러워지겠네.’
물론 그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므로 딱히 놀라울 건 없다.
어차피 델멘 공작의 몰락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 또한 나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망할, 또 생각이 나잖아.’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때 셀라가 내 치장을 다 마쳤는지 허리를 살짝 굽혔다.
아침을 준비하겠다는 말과 함께 셀라는 방을 나갔다. 그것을 눈으로 힐끔 보는데, 그녀가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네. 이 며칠 동안 나를 심란하게 만든 원흉이.’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짜증스레 읊조렸다.
“들어와.”
입을 열자마자 시큰둥한 얼굴의 리건이 방문을 연 채로 섰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허리를 굽히고는 안경을 쓱 추켜올리더니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웬 양 갈래입니까?”
“닥쳐.”
“왼쪽 갈래가 미세하게 아래로 처졌습니다.”
“아침부터 시비질이야?”
그는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리본으로 고정시킨 나를 보고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하긴, 사실 나도 아까 셀라를 저지하고 싶었으나, 예쁜 리본이 있다고 신나서 머릴 묶는 그녀에게 뭐라 말하지 못해 결국 내 위엄을 좀 희생시키고 말았다.
리건은 그야말로 인간이 얼굴을 구길 수 있는 극한까지 얼굴을 찌푸리고는 저벅저벅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나는 화장대에 턱을 괴고 그에게 고개를 까닥했다. 리건이 내 앞에 서류철을 놓았다.
“오늘 원로원 회의에 상정될 내용입니다.”
“엘비어츠 공작의 복귀 건은, 이미 각 가문에 전했겠지?”
“네. 어제 엘비어츠 공작께서 전언을 보내시자마자 바로 각 가문에 알렸습니다.”
“반응은?”
“딱히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발생했으니 저희한테 반응을 보일 리 만무하겠지만요.”
“쯧. 겁을 먹으라고 하는 놈은 안 먹고, 자꾸만 이상한 놈들이 겁을 먹으니.”
“어차피 폐하의 입장에서도 좋지 않습니까. 그동안 귀족들이 범하는 무례에 기분 나빠하셨으면서. 이번 기회로 델멘 공작가의 위세가 사그라지면, 델멘 공작가를 위시한 원로원의 커다란 귀족 세력들도 한동안 숨죽이고 있을 텐데요.”
“한동안이겠지. 그리고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델멘 공작뿐이었지, 가문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었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원로원의 지금 꼬락서니를 보면 델멘 공작가가 사라진다고 순순히 내 말을 듣는 충신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델멘 공작가가 사라진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와 비슷한 가문이 또 고개를 들이밀 것이었다.
그럴 바에는 델멘 공작가 자체는 남겨 두되,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을 이용하면서 귀족 가문을 조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련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복귀하게 되는 엘비어츠 공작이 될 것이고. 최소한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럼 그사이에 아이리스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하고 최대한 안정을 도모하면 나와 원로원의 공존도 가능하긴 할 텐데.’
다만,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면 아이리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점일까.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리건이 그런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약간의 정적이 방 안에 흘렀다. 그러던 중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제 말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순간 원로원의 권력 싸움 따위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얼굴을 팍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리건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그 소리야? 안 된다고 했지?”
“왜 안 됩니까? 제가 사퇴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막으실 이유가 있습니까?”
리건의 말에 나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언급한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어이없는 내용뿐이었다.
- 폐하의 보좌관직에서 사퇴하겠습니다.
- 뭐라고?
- 말 그대로입니다. 폐하의 보좌관직에서 물러나고,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너 뭐 잘못 먹었니? 왜 갑자기 미친 짓이야? 이 상황에서 갑자기 보좌관 사직이라니, 네 생각에는 내가 그걸 허락해 줄 것 같아?
- 허락을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 뭐?
- 어차피 이번 사건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폐하께서는 저를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하셨죠. 다른 말로 하자면 제가 딱히 쓸모없다는 말인데, 굳이 저를 옆에 남겨 두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 안 돼.
- 더 생각을 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리건은 대수롭지 않게 내가 승낙을 해 줄 때까지는 보좌관 업무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다만 그 뒤에도 그는 종종 내게 결정을 내렸냐는 물음을 건넸는데, 덕분에 나만 더 골치가 아파졌다.
나는 리건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이번 계획에 그를 동참시키지 않은 것에 그가 분노했다는 건 이해했다.
그러나 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가 진정으로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만약 내가 이 독살 미수 사건을 처음부터 리건에게 알리고 지시를 내렸다면,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모함하게 된다.
나는 그게 싫었다.
리건은 델멘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손수 함정에 밀 만큼의 강단은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내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수 아버지를 밀어낸다니, 그 트라우마를 감당하는 것은 나 혼자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그를 계획에서 배제하고, 심지어 아이리스 또한 후반에 합세를 시켰는데 겨우 그것 때문에 지금 나한테 반항을 하다니.
어쩐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괘씸해졌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생각을 몇 번 하든 결론은 똑같아. 나는 절대 네가 사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
“아니 대체, 왜 그렇게 심통이 난 거야? 네가 쓸모가 없어서 계획에서 배제한 게 아님을 너도 알잖아? 아니면 그건 그냥 핑계고, 사실 네 아버지를 끌어내리려고 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