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4화
집사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군말 없이 바로 엘비어츠 공작의 침실로 향했다.
“일단 나가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홀로 괜찮으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면.”
“걱정 마. 어마마마께서 하나하나, 전부 다 가르쳐 주셨으니까. 나가라고 하는 건 따로 전할 말이 있어서야.”
그럼에도 집사는 한참을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조용하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내가 딱히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눈치챘는지 결국 집사는 조용하게 방에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나는 엘비어츠 공작의 옆으로 다가갔다. 핏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그에게 살짝 손을 뻗었다.
소환.
이제 이 정도 마법은 굳이 시동어 없이도 쓸 수 있게 되었기에 속으로만 작게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 위로 작은 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거리는 물약은 반짝거리는 금빛을 띠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살짝 그의 입에 대자, 자연스럽게 하얀 빛과 함께 약이 쏟아졌다.
나는 병이 비워진 걸 확인하고 빈 병을 마력으로 거둬들였다. 이제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뒤, 마치 시체 같았던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약이 잘 받는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얼마 섞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엘비어츠 공작의 미간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를 두 손으로 잡고 발꿈치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하긴 했으나, 다행히 만에 하나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활짝 웃었다.
“깨어나셨어요?”
“에스트…… 에슈트?”
“저예요. 어마마마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제가 왔어요. 그리고…… 어마마마께서 자기가 공작저에 들락거리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는 않을 거라 하시더라고요.”
내 말에 엘비어츠 공작이 멈칫하다가 허허 웃었다. 약이 잘 들었는지 그는 의외로 꽤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를 부축할까 하다가, 발꿈치를 들어야 할 정도로 작은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어 가만히 그가 허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에스트리아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하더냐?”
“델멘 공작가는 조만간 가주가 바뀔 거예요.”
“이런…….”
“물론 델멘 소공작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어마마마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설사 소공작이 어마마마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델멘 공작가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릴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에스트리아가 생각보다 델멘 공작가를 많이 아꼈나 보군. 이 늙은이한테 협조해 달라고 하길래 델멘 공작가를 뿌리째 뽑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어마마마의 보좌관이 델멘 공작가 소속이니까요.”
엘비어츠 공작 또한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나는 쿨럭거리는 그를 보며 당황했다. 엘비어츠 공작은 나를 힐끔 보고 내 얼굴 위에 섞인 당황함을 눈치챘는지, 이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이 할아비는 깨어나자마자 우리 에슈트를 봐서 좋구나.”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웃어 주었다.
“어마마마께서 전해 달라고 하신 게 있어요.”
“뭐지?”
“델멘 공작은 이번 문제로 아마 크게 타격을 입었을 거예요. 그러니 만약 어마마마의 계획을 알게 되면, 분노에 차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죠.”
“그래서?”
“당분간은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셔서 델멘 공작을 감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긴 하겠지만, 그래도 귀족 사이의 일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하긴, 델멘 공작가 내부도 당분간 혼란스러울 테니 원로원의 상황을 신경 쓰기도 어렵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죠? 그 불똥이 다른 곳으로 마구마구 튈 수도 있으니까요. 어마마마는 사실 이것 때문에 델멘 공작이 자기 딸에게까지 분노하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요.”
델멘 공작의 성격이라면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전개였다. 그가 리건을 대하는 것과 달리 아무리 아이리스를 아끼고 예뻐한다고 해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뭐, 그 점은 아이리스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나 내 말에 평소라면 한두 마디 맞는다고 대꾸해야 할 엘비어츠 공작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 위에 미소가 걸리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렇게 웃지? 의아한 눈빛을 하는데, 엘비어츠 공작의 손이 내 머리를 쓱쓱 만졌다.
“아니,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델멘 공작이 아무리 화가 나도 자기 딸에게 분풀이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왜요?”
“그거야.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게 자기 딸이니까.”
“그럼 더 화가 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슬프긴 하지만, 화는 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하겠지. 한때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그렇게 컸으니.”
그렇게 말하는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에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회상하듯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더 잡혔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속으로 헤아려 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내가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러니까 아버지는, 내가 드래곤 로드가 되겠다고 하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걸요?”
당연히 나는 영원히 드래곤 로드가 될 수 없지만 이 정도야 아이의 귀여운 생각으로 넘어가 주겠지.
그에 엘비어츠 공작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 에슈트는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밖에.”
“그렇죠?”
여기서 더 시간 낭비를 해 봤자 혹시라도 괜한 감상에 젖어 이상한 말을 내뱉을까 봐 두려웠다. 나는 빠르게 침대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내렸다.
“비록 독은 아니지만, 한동안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계셨으니까 제대로 요양을 하셔야 할 거예요. 어마마마께서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그래.”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나를 배웅하려는 엘비어츠 공작을 만류하고 손을 흔들어 준 뒤에 방에서 나왔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문 앞에 서 있었는지 집사가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황녀 전하, 각하께서는…….”
“이제 들어가 봐도 돼. 깨어나셨어.”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본분을 눈치챘는지 허리를 굽혔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어. 당분간 공작의 몸조리에나 신경 써. 저번에도 편찮으셨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그럼 시녀장에게 일러…….”
“아니, 진짜 괜찮아. 마차는 여전히 문 앞에 세워져 있지?”
“네.”
“그럼 나 혼자 나갈래. 그게 편해.”
그렇게 말을 마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집사는 굳이 더 배웅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나를 알아본 시녀와 시종들이 중간중간 멈춰서 인사했다.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화답해 주던 나는 문득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액자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마마마.’
소박하지만 정교한 액자들 속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어마마마이자 황후였던 레베카의 초상화였다.
아장아장 걷던 어린아이 시절의 초상화부터 십 대 소녀를 거쳐 이십 대 아가씨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은 액자들은, 귀족가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장식이었다.
귀족들은 대개 이렇게 가족끼리 그린 초상화를 벽에 장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정적인 물건은 귀족가의 웅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나는 그중에서도 아직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머니를 안고 있는, 젊은 시절의 외할아버지가 그려진 초상화를 응시했다.
그러나 이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황궁으로 돌아오자 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누님께서 전언을 보냈습니다.”
“건방지게, 본인이 직접 오는 선택지는 없었나?”
“아무래도 폐하와 그리 접점이 없는 누님께서 자주 황궁에 들락거리면 아버님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테니까요.”
“어차피 알게 될 건데 무슨. 그래서 전언의 내용이 뭔데?”
나는 의자에 올라간 뒤 책상을 잡아 가까이했다. 리건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읊조렸다.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 때문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됐네. 그럼 어디 한번 델멘 공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나 볼까.”
“…….”
“왜 그래? 무슨 할 말이 따로 있어?”
나는 분명 말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게 내 앞에 서서 나를 응시하는 리건을 향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며칠 전 아이리스가 가고 난 뒤 그와 나눈 대화를 상기하며 가볍게 아- 하고 읊조렸다.
- 아버지를 어찌 처리하실 예정입니까?
- 글쎄, 그건 네 누이의 선택에 따라 갈리겠지.
- 만약 제 누이가 결정을 내리면, 제게도 폐하의 결정을 알려 주십시오.
- ……왜 갑자기?
그 이유를 묻는 내게 리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리건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네 누이도 결정을 내렸으니, 나도 네게 결정을 알려 주면 되나?”
“네.”
“간단하게 말할게. 나는 네 아버지만 끌어낼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네 누이가 끌어내겠지.”
“그리고요?”
“그리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네 아버지가 가주직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델멘 공작가를 처벌할 생각이 없어.”
“진정으로 그렇게만 끝내실 예정입니까?”
“그럼, 이 이상 더 해야 할 게 있나?”
“…….”
리건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침묵이 그를 감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탐색하듯 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이건 네 탓이…….”
“저를 버리십시오.”
“……응?”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내 경악과 달리, 리건은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폐하의 보좌관직에서 사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