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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93화 (93/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3화

“로드…… 어?”

“스승님 없다.”

집무실에서 나와 후원으로 달려갔다. 레르하겐을 불렀으나 돌아온 것은 하시스의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후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드님은?”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아. 그럼 안 되는데.”

“무슨 일 있냐? 왜 그렇게 다급해?”

나는 쯧 혀를 찼다. 그러나 이렇게 조급하게 군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갑자기 궁금한 게 있어서.”

“뭐?”

“세베르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그 녀석은 네 눈에 언제나 이상한 존재 아니었냐?”

“그게 아니라, 아까 나를 알현하러 왔어. 아, 내가 아니라 ‘황녀’를.”

내 말에도 시큰둥하던 하시스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판단했는지 조금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냥 우연히 너를 찾아온 것 아니야? 뭔가 볼일이 있겠지.”

“켈리어드 대공이 열 살도 안 되어서 국정에 간섭도 못 하고 그저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게 전부인 황녀한테 볼일이 있어서 만나기를 요청했다고?”

“……하긴, 그것도 좀 말이 안 되긴 해.”

“게다가…… 왠지 모르게 이상했어.”

“뭐가?”

“그 녀석이 나를 보는 눈길. 창문 너머로 봤을 뿐인데,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어.”

“흐음.”

하시스는 내 말에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진정으로 세베르가 뭔가를 눈치챘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하필이면 지금, 이 눈치 빠른 자식!’

“왜 이럴 때 로드님은 자리에 안 계시는 거야!”

결국 나는 다시 한번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는 하시스의 눈매가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뭔가 발견한 듯이 갑자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스승님을 찾아서 뭐 하게?”

“물어봐야지. 세베르가 진짜로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 빨리 대책을 세우든가 말든가 해야 할 거 아니야.”

“흐음. 도움을 청하러 왔다?”

“아니 뭐, 도움까지는 아닌데…….”

“왜? 혼자 처리 안 하고?”

“어?”

그에 나는 멈칫했다. 눈을 깜박거리자, 하시스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너 원래 혼자 처리하는 거 좋아하잖냐. 이번 일도 우리를 쏙 빼놓고는?”

“그거야, 권력 다툼은 내가 제일 잘하니까.”

“켈리어드 대공 관련 문제는 권력 다툼의 문제가 아니고? 어차피 너도 켈리어드 대공을 경계하는 이유가 정치적인 문제 아니었어?”

“아니, 그 이전에 로드님은 내 정체를 숨겨 줘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게 계약의 내용이었거든?”

“아하. 그래서 아빠, 도와줘, 하고 달려온 거냐?”

아빠, 도와줘- 하는 꼴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그는 여전히 눈가에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하시스의 표정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확 나빠졌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물론 나도 맨날 혼자 하겠다고 한 주제에 문제가 생기면 쪼르르 레르하겐에게 오는 것이 꽤 웃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지. 그전에 난 왜 이렇게 당연하게 도움을 청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 고민이라도 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너무 당연하게 레르하겐에게 도움을 청하러 후원까지 달려온 나 자신이 어이없어서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하시스가 그런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뭐, 스승님이 일 해결을 잘하긴 하지. 게다가 넌 지금 델멘 공작가인지 뭔지를 상대해야 하니까.”

“그렇긴 하지.”

왠지 모르게 나 대신 핑계를 말해 주는 느낌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쨌든 하시스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자잘한 것에 신경을 쓸 시간도 없었다.

“하여튼 로드님이 오시거든 내가 왔다고 전해 줘.”

“그래.”

하시스의 대답을 들은 후 터덜터덜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진짜로 세베르가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거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세베르의 성격을 안다. 그는 한번 의심한 것을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쉬이 넘어가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의심을 잠재워 줄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에게 내 어른 모습과 아이의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세베르는 내가 만든 인형도 간파해 낸 사람이었다.

‘그럼 차라리 밝히는 것이 좋을까. 내가 흑마법에 걸려서 아이가 되었다고?’

어쨌든 지금 상황을 볼 때 세베르는 확실히 나를 아이로 만든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서 숨긴 게 아니었잖아. 어디까지나 그가 이 틈을 타 내 지위를 흔들까 봐 그랬던 거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문득 드는 의문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의 그도 그럴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그만 나 스스로가 어이없어지고 말았다. 세베르가 갑자기 나에 대한 적의를 거둬들일 리가 없었다. 그럴 만한 계기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변해서일까.’

내가 아이가 된 뒤 세베르가 보여 주었던 그 행동 하나하나를 속으로 짚어 보다가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고 이렇게 풀어지다니, 한심해.’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다는 것은 꽤 멍청한 짓이다. 세베르가 진짜로 나를 그렇게까지 증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증오하지 않는다고 갑자기 우리 관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때였다.

“전하.”

나는 갑자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를 부른 것이 리건이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깜짝 놀랐네. 아이리스는 잘 배웅했어?”

“네.”

“별다른 말은 없었지?”

“없었습니다. 그것보다…….”

평소와 달리 심각한 리건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 거지? 혹시 또 델멘 공작가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이미 결정이 난 사항이니 네가 손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범인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그리고, 델멘 공작가의 처분에 대해서도요.”

나는 리건의 싸늘한 얼굴에 잠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 * *

- 죄송하지만 전하께서는 오늘 공사가 다망하시어 대공 전하를 뵐 수 없다고 합니다. 혹여 꼭 만나 뵙겠다면, 미리 약속을 잡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사의 난감한 표정을 뒤로하고 세베르는 황궁을 벗어났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말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으나 세베르의 표정은 일절 변하지 않았다.

그저 쉴 새 없이 말을 몰 뿐.

오히려 얼얼할 정도로 몸을 베며 지나가는 바람은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설마, 진짜로 폐하께서 아이가 되었나.’

그렇게 생각하던 세베르가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이이이잉- 말이 앞발을 들고 멈춰 섰다.

황궁에서 벗어나 교외로 빠지는 길은 꽤 울퉁불퉁했다. 그 위에 갑자기 멈춰 선 말이 방황했다.

세베르가 미간을 좁혔다.

‘대체 왜? 어떻게?’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혼자 세운 가설을 생각하며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그 골목길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일어난 의심의 불씨는 쉬이 꺼지지 않았고, 그는 결국 그대로 말에 올라탔다. 그렇게 다짜고짜 황궁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어려도 황녀는 황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황제에게 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순간처럼 그쪽으로 달려갔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언제나 그랬다. 에스트리아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나 그렇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황궁으로 갔다.

‘하아.’

그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진짜로 폐하께서 어려지신 것이라면.’

그래서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거짓을 말해야 했던 거라면, 그래서 지금까지 흑마법에 이렇게 매달린 거라면.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황제를 공격한 것과 황제를 아이로 만든 것, 언뜻 보면 전자가 더 위험한 듯하나 허무맹랑하고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후자의 경우가 더 심각한 상황을 빚어낼 수도 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시원한 공기에 조금은 침착함을 찾았다.

세베르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만약 진짜로 에스트리아가 잠이 들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녀가 아이의 몸으로 활동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달리 보아야 했다.

‘사냥 대회에서 후작 이상의 귀족만 모았다는 건 역시 그중에 범인이 있고 이번에 델멘 공작을 겨냥해 일을 벌인 것은 역시 델멘 공작이 흑마법과 연루되었다는 거겠지.’

하지만 에스트리아의 성정상 과연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범인을 살려 둘까?

살려 두기 이전에 이렇게 가볍게, 그저 독살 미수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 처리하는 것으로 끝낼 사람인가?

심지어 에스트리아의 태도를 보면 딱히 델멘 공작가를 완전히 살인 미수범으로 몰 의도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역시.

‘델멘 공작은 흑마법에 연루되어 있을 뿐, 그녀를 공격한 장본인이 아니다. 어쩌면 델멘 공작은 그저 이용만 당한 건지도 모르지.’

세베르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만약 델멘 공작이 이용만 당했다면, 누구에게? 왜? 어떻게? 아니 그전에 왜 하필 델멘 공작을 이용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세베르는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단서에 얼굴을 굳혔다.

‘폐하께서는 범인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군다는 것은 역시…….’

경고.

그녀는 이번 일을 빌미로 진정한 범인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세베르가 한숨을 살짝 쉬었다.

‘만약 진짜로 폐하께서 아이가 되셨다면 그녀가 내게 진상을 알릴 리가 없어. 그녀는 나를 경계하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만약 진짜로 ‘에슈트’가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고, 지금의 에슈트가 에스트리아라면 그녀와 레르하겐 사이의 ‘관계’도 완전히 바뀐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베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철썩-.

강하게 채찍을 내리치자마자 말이 질주했다. 곧, 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 * *

아이리스가 다녀간 뒤 며칠 동안 황궁은 잠잠했다.

리건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깐족거렸고, 나는 거기에 펜을 한 다섯 개 정도 집어 던졌다.

그렇게 정확히 사흘이 지나고 난 후 엘비어츠 공작가를 방문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집사를 향해 나는 방긋 웃었다.

“어마마마께서 보냈어!”

“폐하께서요?”

“응. 공작을 깨울 방법이 있다고 하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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