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2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을 보다가 잔을 들었다. 레몬수로 입을 가셨다.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치 못 챘나? 꽤 영리한 줄 알았는데 순진한 구석이 있어.>
“엘비어츠 공작 각하 독살 미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제 아비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믿나?>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당연히 믿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내가 했으니까.
속으로 말을 삼키며 마법으로 펼쳐진 영상 속을 응시했다.
삽시에 다이닝 홀에 찾아온 침묵은 내가 있는 집무실까지 물들였다.
영상 속에서 차갑게 흐르는 공기는 아이리스의 분노를 은은하게 전해 주고 있었다.
“폐하께서 델멘 공작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신다는 거 압니다.”
<딱히 그런 적은 없는데.>
“폐하.”
<……라고 해 봤자 믿을 것 같지는 않고.>
“…….”
<맞아. 짐은…… 나는 델멘 공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델멘 공작가를 무너뜨리거나, 함부로 죄를 뒤집어씌울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아. 델멘 소공작, 소공작도 머리가 있다면 알겠지만, 원로회에 남은 귀족 중에서 그나마 가장 쓸 만한 건 델멘 공작뿐이야.>
“그래서 기라도 꺾어 놓을 요량이신 겁니까.”
<기를 꺾는다라. 진짜로 그게 목적이었다면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지도 않았어. 리건을 내 옆에 두지도 않았을 거고 이렇게 소공작을 내 앞에 앉혀 두고 입을 열지도 않았겠지.>
“리건은…… 그 아이는 폐하를 많이 존경합니다.”
막냇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리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와 리건 사이의 관계를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남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비교 따위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나는 그녀가 리건의 이름이 나올 때 조금이지만 동요를 보인 것에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미소를 지으며 물이 들어 있는 잔을 비웠다.
탁. 잔을 내려놓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지.>
“…….”
<그래서 이러는 거야. 나는 그 아이가 가족을 잃고 오갈 데 없이 그저 내 옆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한데 대체 왜…….”
<그러나 어쩔 수 없었어, 소공작. 델멘 공작은 금기를 건드렸다.>
“금기가 아니라 심기가 아닙니까?
<아니, 금기가 맞아. 내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참아 줄 수는 있지만, 금기를 건드리면…… 죽어야 하니까.>
“그래서 대체 그 금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점을 빙빙 돌리는 내 화술을 참지 못한 듯 아이리스가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어디까지나 평소의 그녀와 비교해서 격한 것일 뿐, 이 상황에서조차 아이리스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다.
‘나’는 그에 길게 숨을 들이켰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살짝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 그녀에게 일렀다.
<흑마법.>
“……?”
<소공작의 아비가, 흑마법에 연루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법사와 결탁을 했지.>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무엇을 상상하는 것일까. 혹시 평소 아비가 보여 주었던 행동 하나하나를 속으로 짚으며 ‘혹시 그래서’ 따위를 읊조리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물론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중요한 건 소공작이 믿냐 안 믿냐의 문제가 아니거든. 중요한 건…….>
“…….”
<내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공작도 알고는 있을 거야.>.
“…….”
아이리스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나 나는 그녀의 침묵이 그 어떤 말보다도 더욱더 복잡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로 팔을 기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디 한번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그런 그녀의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답했다.
<소공작이 공작이 되는 것.>
“……!”
<그러면 델멘 공작가의 안녕을 보장해 주지.>
그와 동시에 아이리스의 인상이 파리해졌다.
그것을 보며 나는 다정하게 웃었다.
* * *
만찬이 끝나고 아이리스는 마차를 타러 밖으로 향했다. 리건에게 누이를 배웅해 주라 명한 뒤, 나는 영상 마법을 시전하던 것을 멈추고 창가로 다가갔다.
아이리스가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볼 때마다 묻어 있던 그 고고함이 사라진 채였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가문의 존속? 자신의 안위?
아니면 아비를 부정해야 한다는 공포?
나는 그녀에게 아비를 전복할 것을 명했고 그녀는 그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이 무엇일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뭐, 그 선택이 무엇이든지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만.’
아이리스를 태운 마차가 떠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되든 부디 그녀가 자신과 가문을 위한 결과를 내놓기를 바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급적 가문을 살리며 내 보좌관 또한 살리는 쪽으로 선택하기를 바랐다.
곧 마차가 사라지자 나는 걸음을 돌렸다.
이제 아이리스에게도 ‘제안’을 마쳤으니 남은 건 한 가지였다.
‘슬슬 엘비어츠 공작가로 가야겠는데.’
애초에 이번 사건을 꾸민 근원 자체는 델멘 공작가의 명예를 바닥에 처박고 공작의 손에 쥐어진 권력을 앗으려는 조치였다.
그래서 비올레를 통해 마탑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고, 그자에게 일부러 ‘독’이 든 차를 준 뒤 엘비어츠 공작가로 보내 이 모든 일을 꾸몄다.
‘어차피 마탑의 쥐새끼도 잡혔으니 외할아버지도 눈을 뜰 때가 됐어.’
엘비어츠 공작이 죽지 않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던지라 질질 끌 이유도 없었다.
이제 내일 중으로 엘비어츠 공작가로 간 뒤, 빠른 시일 내 이 일을 대충 일단락 짓고 델멘 공작가의 동태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가벼이 한숨을 쉬며 커튼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음?’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약간의 소란이 아니었으면.
‘뭐지? 오늘 더 올 사람은 없는데?’
나는 다시 커튼을 열고 목을 살짝 빼 들어 조금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검은색 인영이 정체를 드러냈다.
“어? 쟤가 왜…….”
인영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세베르였다.
심지어 그는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있었다.
빠르게 질주하는 말은 주인을 닮아 거침없이 우아하게 정리된 정원 사이를 가로질러 내가 있는 궁으로 오고 있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멈춰 선 세베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집무실이 궁의 입구와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기는 힘들었지만, 말에서 내리는 모습에서 묘하게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의 등장에 조금 당황한 듯 기사 둘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몇 마디 나눈 뒤 기사가 곤혹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바로 고개를 숙이고는 걸음을 옮겨 궁으로 향했다.
‘나를 보러 온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트리아를 보러 왔을 것이다. 하나 에스트리아가 잠들어 있다고 알고 있는 그가 굳이 이렇게 헛걸음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설마 흑마법과 관련된 뭔가를 눈치채고 리건을 보러 온 건가?
아니 그래도 굳이 저렇게 말을 몰고 황제의 궁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나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으나 그리 조급하거나 당황한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보러 온 것이 나인 이상 당연히 기사는 리건에게 보고를 할 것이고, 리건이 알아서 처리를 해 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탐색하듯 세베르를 볼 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을 응시하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
어?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눈이 마주쳤어?’
그와 동시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앞으로 몇 걸음 걸어 이제는 선명해진 그의 얼굴 위로 서린 차가운 표정 사이로 금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나 그것보다도 더욱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속이 이상해졌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얼핏 보면 서늘함 같았으나 동시에 일종의 탐색 같기도 했다.
탐색? 대체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노크했다.
“저, 전하.”
기사의 목소리?
“켈리어드 대공 전하께서 황녀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합니다.”
기사의 목소리에 나는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연통도 없이 황제의 궁에 온 세베르가 갑자기 나를 찾는다고?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경고를 했다.
세베르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황한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나가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한번 들어 봐야 하나?
하지만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이대로 나갔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세베르는 아직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단순한 일은 아닐 거야. 그럼 역시…….’
이것은 내가 아이가 된 뒤 그가 나를 찾아왔던 때와 완전히 결이 달랐다.
어떤 대비책 없이 그의 등장에 당황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싫어! 나 피곤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부러 기사에게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단칼에 대답했다.
고집스럽고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하자 기사가 조금 버벅거리는 듯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급한 일이라고, 꼭 뵈어야 한다고…….”
“싫다니까. 그리고 내가 무슨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아? 미리 약속을 잡고 오라고 해!”
일부러 신경질을 잔뜩 담아 말하자 기사는 내 생각이 확고함을 알아차린 듯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곧 기사의 발걸음 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베르는 더 이상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그에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커튼을 닫았다. 덕분에 세베르가 어떤 반응일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의 그 눈빛에 들어 있는 속셈을 알아챌 수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내가 에스트리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겠지?’
그 생각과 동시에 급히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