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9화
“이런 망할, 어떻게 감히 나를……!”
아이리스는 침착한 얼굴로 델멘 공작을 응시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소환에 응한 뒤 돌아온 그녀의 아비는, 거친 말을 내뱉으며 에스트리아를 저주했다.
“그 계집을 진즉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그것이 감히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혐의를 내게 뒤집어씌웠다.”
그의 말에 아이리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그것이었다. 아이리스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아버지를 굳이 말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딸의 평온한 목소리에 델멘 공작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애썼다.
입술을 꽉 깨문 그가 길게 코로 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눈동자가 분노를 싣고 있었다.
“오늘 엘비어츠 공작에게 독이 든 차를 가져다줬다는 치를 잡았다고 하더군.”
“그자가 아버지의 이름을 말했습니까?”
“그래. 그뿐만이 아니다, 알고 보니 그 차는 에스트리아의 이름으로 엘비어츠 공작가에 보내진 것이었어. 영악한 계집, 어쩐지 한껏 침착한 얼굴이더라니. 제 외할아버지까지 죽음으로 몰면서 델멘 공작가를 해하려고 할 줄이야!”
“폐하께서 하신 일이 확실한 겁니까? 아무리 델멘 공작가를 처리하고 싶다고 해도 폐하께서 설마하니…….”
“맞아. 네가 그치의 눈을 봤어야 했다. 이번 일은 분명 에스트리아가 꾸민 일이야!”
델멘 공작의 설명을 들은 아이리스는 얼굴에 미묘한 기색을 띠었다.
그녀는 어쨌든 제 아비의 판단을 믿었다. 그 현장에 그녀가 없었으니 에스트리아가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왜?’
왜 그래야만 했는가.
지금까지 델멘 공작가와 황실의 관계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제가 태도를 바꾸게 된 계기나 이유가 없었다.
물론 갑자기 델멘 공작가가 거슬려서 행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아니, 사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황제에게 있어 즉흥적으로 귀족들 상대하는 ‘습성’은 그리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그녀는 에스트리아가 그렇게 앞뒤 구분을 못 하고 그저 감정에 따라 귀족들을 겨냥하는 멍청한 주군이기를 바랐다.
다만.
아이리스는 에스트리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왜 갑자기 폐하께서 이렇게 구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이리스의 물음에 점점 진정을 찾아가던 델멘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미간에 서린 의문은 그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델멘 공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뭔가 짐작 가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그녀의 물음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딸을 힐끔 본 델멘 공작은 갑자기 기이할 정도로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분노를 뿜어내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오던 아까의 기세가 마치 거짓이라도 되는 양, 갑자기 입매를 굳히고 흐음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럴 리가.”
“…….”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번 일에 엄연한 피해자다. 황제의 광기에 그저 당했을 뿐이지. 그것도 아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해 가면서.”
“……리건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리건의 이름이 언급되자 아이리스가 더더욱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가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문이 서렸다.
“리건이 뭘 했습니까?”
“그 아이는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더군. 심지어 범인을 끌고 온 것도 그 아이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폐하의 보좌관이라고는 하나.”
“그 아이의 마음이 어느 쪽에 가 있는지야 지금까지 너와 내가 이미 목도한 바가 있지 않으냐.”
델멘 공작의 말을 들은 아이리스의 눈가에 잠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곧바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번 일을 어떻게 넘기느냐가 중요하겠군요.”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이번 일은 아비가 알아서 해. 너는 그저 아비가 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가문 내부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공작의 말은 매번 그가 당부하던 것이므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왠지 모르게 지금 델멘 공작의 기색이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곧 그녀는 델멘 공작의 방에서 나왔다.
잠시 복잡한 머릿속을 안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문득 그녀의 시녀가 준비한 예복을 안고 오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저녁이 폐하와의 만찬이야. 설마…… 이것을 예견하고 나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인가?’
아이리스는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은 편이긴 하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정식으로 가문 외적인 일에 관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에스트리아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저 아버지가 알고 있는 몇몇 귀족들에게서 얻어 낸 것뿐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아까 전 폐하의 의중을 알고 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묘하게 리건 쪽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러나 생각해 보았자 딱히 좋은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몇 분 뒤.
“집사, 리건을 호출해. 잠시 볼일이 있으니 오늘 저녁 본가로 돌아오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아이리스는 집사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왠지 모르게 속이 꺼림칙했다.
* * *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가장 침착한 이를 꼽으라고 하면, 놀랍게도 그것은 다름 아닌 세베르였다.
집사의 전언을 들은 순간,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그저 ‘그런가’ 따위의 말만 남겼다.
물론 집사는 세베르가 엘비어츠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공작이 독살당한 사건이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희가 따로 조사를 해 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 독살이 무슨 전대미문의 사건도 아니고, 그럴 필요 없다.
사실 세베르의 대처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귀족가에서 독살 사건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켈리어드 대공인 그도 종종 독살 위협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 세베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엘비어츠 공작의 생사 따위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귀족들이 엘비어츠 공작의 독살 미수 사건에 동요를 할 때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런 그라도 귀족들이 에스트리아를 입에 올린 순간에는 분노하고 말았다.
그래, 분노.
우습게도 에슈트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귀족들을 미궁으로 빠뜨린 그의 태도는 그저 분노라는 그 단순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대쪽 같은’ 세베르의 성정을 고려해 그의 앞에선 가급적 황제를 입에 올리지 않던 귀족들이 그날따라 함부로 에스트리아를 입에 올렸다.
- 천박하군.
그래서 나간 말이었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황제와 켈리어드 대공 사이가 나쁘다고만 알고 있었던 귀족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어떤 반응을 할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자신의 파급력을 알고 있었기에 한 행동이었고 실제로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며칠 동안 귀족들은 감히 에스트리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고,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사건조차도 조심스럽게 언급하였다.
그것뿐이었다.
세베르에게는 그렇게 끝나야 하는 이야기였다.
귀족들이 조금이나마 그와 에스트리아의 눈치를 본다면 나머지는 그와 별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그에게는 흑마법사를 찾아야 하는 더 큰 임무가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에스트리아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였다.
엘비어츠 공작이야 이대로 죽으면 죽고 아니면 마는 문제였고, 범인이야 잡히든 말든 어차피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 마수가 에스트리아 쪽으로 갈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처리하면 되는 문제였으니 어렵지 않았다.
하나 정작 이런 그의 여유는 어제 낮의 갑작스러운 소환으로 인해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전하.”
“조사하라고 한 건?”
“과연 어제 폐하의 말씀대로 마탑 소속의 마법사가 맞습니다.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엘비어츠 공작가에 보낸 첩자의 말로는 그자가 독이 들어 있는 차를 엘비어츠 공작가에 갖고 온 것도 맞는다고 합니다.”
“그게 폐하의 이름으로 온 것도 사실이고?”
“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차를 본 엘비어츠 공작께서 집사에게 그 차를 우려 오라고 했답니다.”
“…….”
“……역시, 폐하께서.”
“펠릭스.”
세베르의 낮은 목소리에 펠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기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예상을 했을 것이다.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사건의 범인은 역시 폐하신가.’
사실 범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다.
애초에 엘비어츠 공작이 자신의 외손녀가 보냈다는 이유로 덜컥 차를 마신 데다가, 그 차를 진짜로 에스트리아가 보냈다면 누가 봐도 두 사람이 합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아마도 델멘 공작가를 처리하는 것.
굳이 이렇게 해서까지 델멘 공작가를 처리해야 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이나 뻔하게 보이는 작전을 짠 데는 에스트리아 나름의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
다만.
펠릭스는 왠지 모르게 다소 어두워진 세베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으실 일인가?’
물론 과거의 에스트리아가 이런 ‘계략’을 짰다면 그도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검을 들어 형제자매를 처단한 이가 눈에 거슬리는 공작가 하나 처리하겠다고 판을 벌이는 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까지 델멘 공작가를 가만히 내버려 두며 견제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의아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왜 저렇게 안색이 어두우시지?’
펠릭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세베르의 얼굴은 누가 봐도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 세베르가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마수들의 흔적을 쫓으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지?”
“아, 안 그래도 의심이 가는 흔적이 수도에서 발견되어…….”
“오늘 중으로 당장 결과를 가져오라고 해.”
펠릭스는 세베르답지 않게 급해 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얌전하게 명을 받고 방을 나갔다.
탁.
펠릭스가 나가자 세베르의 눈가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기색이 짙어졌다. 그것은 얼핏 보면 걱정 같기도 하나 자세히 보면 상당한 의문을 담고 있었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이가 진정으로 이런 계략을 생각해 낼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