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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88화 (88/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8화

하시스는 내가 대꾸하지 않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놓고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곧 머리를 정리하는 날 가만히 보고만 있는 일리안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뭐하냐? 안 나와?”

일리안은 나를 묘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에 괜히 그를 쏘아보자, 일리안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아가씨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정도야 뭐.”

아니, 언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그러나 내 의문 섞인 눈빛을 뒤로한 채 일리안은 걸음을 옮겼다.

달깍. 문을 연 하시스는 리건을 힐끔 보더니 이내 일리안과 함께 방을 나갔다.

리건은 하시스와 일리안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의자에 올라간 뒤, 문을 닫고 있는 리건을 향해 물었다.

“비올레는? 마탑으로 돌아갔어?”

“마탑주님께서는 마법사와 더 나눌 말씀이 있다 하십니다.”

“무슨 말을 또 해. 어차피 이곳으로 끌고 오기 전에 다 말을 마쳤을 텐데.”

“그래서, 진짜로 그자입니까? 엘비어츠 공작의 차에 독을 넣은 자가?”

그의 물음에 여상스럽게 서류를 정리하던, 정확히 말하자면 정리하는 척하던 나는 멈칫했다.

이내 긴 한숨을 쉬며 손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려 리건을 바라보자, 그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지금까지 보인 적 없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 사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저 표정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그날, 나무 아래서 조용하게 책을 보다가 내가 다가옴을 발견한 순간에도 리건은 이렇게 차갑게 식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면 그저 공허함만 가득했던 그의 눈빛이 지금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일까.

알고 있었다. 이 몇 년 동안 내 옆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배운 것’일 뿐, 그가 진정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적절할 때에 적절하게 행동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법을 연구했다. 그런 후 타인을 관찰하고 모방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진심으로 행한 것도 그저 분쟁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내 앞에서 보였던 것들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눈빛이 더욱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자’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지?”

“……폐하.”

“지하 감옥에 감금된 그자? 아니면 지금쯤 나를 향한 분노를 터뜨릴 네 아비?”

“왜 제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뭘?”

“엘비어츠 공작에게 독을, 아, 폐하께서 직접 하셨으니 아마 독은 아니겠죠. 엘비어츠 공작을 저리 만들고 제 아비를 범인으로 몰 거라는 걸요.”

“나는 딱히 네 아비를 범인으로 몬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 앞에서 그리 감추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이면 몰라도 이 몇 년 동안 폐하를 모셔 온 저는 폐하께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내 옆에서 나를 봐 온 네가, 진짜로 왜 네게 알리지 않았는지 몰라서 묻는 거니?”

“…….”

리건은 입을 다물었다. 하나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 눈빛에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네가 화내는 이유가 뭐야? 네 아버지를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밀어붙일 것을 미리 말하지 않은 것? 아니면 이 일을 꾸며 델멘 공작가를 궁지로 몬 그 자체?”

“…….”

“어느 쪽이든 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재잖아, 똑똑하잖아. 네 머리로 진짜로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폐하.”

“아니면, 오히려 이해를 할 수 있어서 화가 난 건가?”

“저는…….”

“리건 델멘, 나는 말이야. 내가 아이가 되었음을 알게 된 그 가장 위험하고 급박한 순간에도 네게 방문을 열어 줬어.”

“…….”

“너니까 열어 준 거야.”

“……”

“그리고 너니까, 선택의 기회 따위 주지 않았던 거고.”

마지막 말은 다소 이상하게 나왔다. 그러나 리건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깃든 짙은 혼란이 그대로 내게 쏟아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를 어디까지 징벌하실 예정입니까.”

“글쎄. 그간의 괘씸죄까지 더해서 제대로 받아 낼 예정이긴 하다만,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네 누이한테 달려 있어.”

“여기까지 계획하시고 아이리스 누님을 만찬에 초대하신 겁니까?”

“그런 셈이지. 애초에 초대를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도 안 했지만, 설사 그랬더라도 결국 네 누이는 내 앞에 왔을 거야.”

“만약 제 누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실 겁니까?”

“그럼 델멘은 그냥 한 줌의 잿더미가 되어 역사의 바람과 함께 흩어지는 것이겠지.”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리건은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빤히 응시했다.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나였다.

“이제 됐지? 어차피 이곳에 온 것도 나한테 따지기 위해서인 듯하니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나가 봐.”

나는 다시 여상스럽게 입을 뗐다.

그러나 놀랍게도 혼자 생각에 잠긴 듯했던 리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응?”

“저도 굳이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제 답은 애초에 정해져 있는 것이니. 폐하께서 이리 굴지 않으셔도 제 선택은 너무 쉽게 이뤄졌을 겁니다.”

나는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멈칫했다.

말을 마친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조금 어리벙벙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게 무슨…….”

그러나 리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방을 나갔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그의 부모였고 하나는 그의 주군이었다.

그가 델멘 공작가에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모를까,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왕이면 그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깔끔하게 나를 증오하는 길을 선택하길 바랐다.

그런데.

나는 그의 대답에 오리무중에 빠진 느낌이 들어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 * *

문이 닫히자마자 리건은 걸음을 옮겼다.

그를 향해 인사하는 고용인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조금 멀리 떨어진 후원에서 사라져 가는 리건의 뒷모습을 보던 세 인영이 각기 다른 표정을 했다.

당연하지만 이 세 인영은 각각 레르하겐, 하시스 그리고 일리안이었다.

하시스는 리건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레르하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하게 에슈트의 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은 아셨습니까?”

하시스의 물음에 레르하겐이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침묵에 하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저 꼬맹이가 벌인 일이라는 거.”

“그래.”

답은 바로 나왔다.

하시스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안 말리셨습니까?”

“말려야 하나?”

“꽤 무모한 작전 같은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엘비어츠 공작이 죽기라도 했다면…….”

“그건 그자의 명이 그 정도라는 것이겠지.”

“…….”

“그 아이가 죽네 마네 하는 게 아니면 관심 없다. 죽이든 말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에슈트의 생명이 걸려 있지 않다면 레르하겐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딱히 어화둥둥 과보호를 할 법한 성정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레르하겐은 생각 이상으로 에슈트를 ‘방목’하고 있었다.

물론 에슈트의 입장에서야 어떻게 감히 방목이라고 표현하느냐 발끈할지도 모르겠지만. 레르하겐이 진짜로 마음을 먹고 에슈트를 말리려고 하면 못 말릴 것도 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두고 보는 행동은 확실히 ‘방목’이 맞았다.

“사고가 나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요?”

그때 일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레르하겐을 향해 물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그의 물음에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그래.”

“놀랍군요. 아가씨를 아끼는 줄 알았는데.”

“일이 틀어지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틀어진 뒤에야 해결해 주겠다는 건가요?”

“못 해 줄 것 없지.”

“그전에 해 줄 수도 있는데.”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레르하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 같았으나 놀랍게도 평소의 그 귀찮음이 딱히 묻어 있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문제가 생기면 내가 처리해 줄 테니.

상당히 오만한 태도였지만 레르하겐이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상대가 에슈트라서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긴, 아가씨는 뭐든 혼자 하려고 할 거야. 그렇죠?”

“그 꼬맹이는 이런 데서 고집이 세다니까. 평소엔 주변 사람들 잘 이용해 먹으면서 굳이 그렇게.”

하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하나 걱정이 묻어 나오는 그의 말에 일리안이 뭔가 고민하는 듯하다가 대꾸했다.

“어쩔 수 없어. 아가씨는 황제니까.”

“……황제면 다 혼자서 해야 하는 거냐?”

“아가씨가 진짜로 어린 황녀였다면 상관이 없었을 거야. 하지만 황제는 달라. 황제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만으로도 무능하다 평가받거든.”

“무능씩이나?”

“인간의 권력 구조는 원래 그래.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책임과 의무를 안는 것을 일종의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

“하지만 안 그런 왕도 있잖냐.”

“우리 아가씨는 제대로 된 왕이 되고 싶나 보지 뭐.”

하시스는 일리안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꼬맹이면 꼬맹이답게 그냥 둥개둥개나 받을 것이지.”

“그런데 너, 아가씨보다 어린 거 아니야?”

“꼬맹이가 꼬맹이지 뭐. 하는 꼴이 꼬맹이인데 나이가 많다고 꼬맹이가 아니게 되나?”

에슈트가 들으면 기함할 말을 하며 하시스는 나무에 기댔던 등을 뗐다.

그러고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레르하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번에 에슈트가 납치가 되었을 때 너한테 시비를 걸던 그자들.”

“아, 네.”

“그자들의 특징이 어땠다고?”

“그냥 평범했습니다. 다른 인간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그들의 목적이 진짜로 시비를 거는 것이었나? 너를 죽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니, 그건 아니었습니다. 제 눈으로 망자임을 눈치챈 것일 뿐, 별 전투력도 없어서 오히려 더 평범하게 느껴졌습니다.”

“평범이라.”

“그런데 왜 갑자기 그걸…….”

“아니다.”

말을 마친 레르하겐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시스는 이제 레르하겐의 행동이 익숙해진 듯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일리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이내 흐음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곧 후원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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