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87화 (87/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7화

범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현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 사이에서 가장 먼저 이성을 찾은 것은 다름 아닌 범인으로 지목된 델멘 공작이었다.

범인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 낸 그가 느릿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그러나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한 결과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침묵을 깨뜨린 그가 말을 채 끝맺기 전 에스트리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헛소리군.>

델멘 공작은 그녀의 말이 범인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뱉으려 한 부정의 말을 향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판이 짜여 있음을 인지한 순간, 애초에 그는 자신이 에스트리아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이곳에 서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등받이에 기대 나른하게 앉아 있던 에스트리아의 무심한 눈길이 범인에게 꽂혀 있었다.

<지금 델멘 공작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

<무엄한 것. 이실직고를 하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대체 델멘 공작이 왜 그런 짓을 해?>

순간 주변에 모여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요, 델멘 공작마저도 그녀가 진심으로 그의 결백을 믿고 있다고 여길 뻔했다.

그만큼 살짝 일그러져 있는 에스트리아의 얼굴은 진실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범인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잠긴 눈동자가 왕좌를 향했다.

“그, 그것이…….”

<…….>

“그것이…… 폐, 폐하와 엘비어츠 공작 사이를 갈라놓아야…….”

“헛소리.”

결국 델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우습게도 실제로 그는 한때 황제와 엘비어츠 공작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즉위를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일 뿐. 이후 엘비어츠 공작이 뒷선으로 물러났기에 굳이 그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폐하, 저 간악무도한 자가 폐하의 귀와 눈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델멘 공작의 말에 에스트리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묘하게 공허해 보이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눈동자는 그저 한참 동안 차분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에스트리아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엄하군, 감히 내 앞에 끌려와서까지 이리 헛소리를 하다니.>

“사실입니다, 폐하. 저는 절대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델멘 공작은 참으로……!”

<그 입 닥쳐라. 대대로 원로원과 황실의 관계가 삭막한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런 기막힌 이유로 황제의 외척을 독살하려고 할 정도로 델멘 공작은 멍청하지 않다.>

“그…….”

<하아. 짐의 실책이다. 연좌제를 묻지 않겠다 하면 무릎을 꿇고 진실이라도 말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군. 네 배후가 델멘 공작의 이름을 이 앞에서 말하라고 하든?>

“아닙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저는 진정으로, 진정으로…… 아, 그래, 폐하, 제게, 제게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범인의 처절한 목소리는 에스트리아의 낮게 깔린 음성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대비가 현재 에스트리아가 누구보다도 델멘 공작을 믿고 있다고 여기게끔 했다.

델멘 공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겨우 이런 거로 델멘 공작가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저자가 가진 증거가 무엇인지 들어보는 게 좋겠어.’

애초에 그가 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증거를 완벽하게 만들어 올 수는 없다.

그리고 설사 조작된 증거가 그럴싸해도 그 정도의 수작에는 대응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입을 열었다.

“하면…….”

하나 정작 에스트리아는 그의 말을 잘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군. 그깟 증거를 짐이 믿을 것 같나?>

“폐하, 차라리…….”

<뭣들 하는 것이지? 어서 이 자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에스트리아의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리자 기사들이 빠르게 다가와 범인을 끌고 갔다.

“폐하! 저는 진정으로……!”

탁.

아스라하게 퍼지던 목소리는 알현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알현실은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것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에스트리아의 한숨 소리였다.

<귀경들의 시간을 빼앗았군.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 준다고 했는데 그만 엉망이 되고 말았어. 특히 델멘 공, 짐이 사과하마. 저자가 저런 허무맹랑한 말을 할지 누가 알았겠나.>

그렇게 말하는 에스트리아의 얼굴 위로 마치 그를 위로하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내 비올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자를 더 심문해야겠어. 비올레,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런 에스트리아의 목소리에 비올레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다가 다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방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폐하께 적극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올레의 대답에 에스트리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를 아까 전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한 리건이 따랐다.

당황한 얼굴을 한 귀족들은 그녀가 알현실을 떠나려 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배웅했다.

몇 분 뒤, 에스트리아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하.”

델멘 공작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 망할 계집이…….”

그가 작게 읊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야말로 한 편의 연극이 따로 없었다. 짐짓 신하를 위하는 왕처럼, 짜인 극본을 연기하고 사라진 에스트리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습기 그지없었다.

너무 ‘우스워서’ 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록 이번에는 에스트리아가 그를 감싸는 듯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지는 명백했다.

‘당장 손을 써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아까 전과 명백하게 달라진 귀족들의 눈빛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중에는 다소 의혹을 품는 눈빛도 있었고, 은근히 그를 의심하는 듯한 눈빛도 있었으나 그것보다도 더욱더 그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델멘 공, 괜찮겠습니까?”

애들러 후작의 목소리에 델멘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걱정하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 속에는 그와 에스트리아 사이를 저울질하는 계산으로 가득했다.

그는 애들러 후작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 * *

델멘 공작이 알현실을 나갈 무렵, 나는 느긋하게 셀라가 만들어 준 쿠키를 먹고 있었다.

그런 내 옆으로 질린다는 얼굴을 한 하시스와 미소를 짓고 있는 일리안이 있었다.

델멘 공작이 나가자마자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반응을 살핀 나는 무표정하게 알현실을 나가는 세베르를 힐끔 보고는 바로 영상 마법을 멈추었다.

쿠키를 집으려 다시 접시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입맛을 다시며 손을 탁탁 털었다.

“아, 딱 맞춰 먹었네. 너무 맛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건 아니고?”

그리고 그런 내 중얼거림에 하시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리건이 내 인형과 비올레 그리고 그 범인을 데리고 알현실로 가자마자 내 방으로 불려 온 그들은, 강제적으로 알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없었다. 원래 재미있는 건 다 같이 봐야 더 재밌으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귀찮았던 것도 있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두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니 그들은 아까 전 상황으로 대충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시스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래서, 네 외할아버지가 쓰러진 게 진짜로 네 짓이냐? 델멘 공작가에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야말로 요지를 정확하게 잡아낸 그의 물음에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다시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맞아.”

그 순간 하시스가 이마를 짚었다.

일리안은 그저 유한 표정을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손을 닦은 냅킨을 상 위에 내려 두고 그들을 향해 섰다.

“아무리 엘비어츠 공작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렇지 내 이름으로 전달된 차를 덜컥 마실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그건 나도 어느 정도 이상하다 생각했다만은…….”

“그 차를 보낸 건 내가 맞아. 다만 안에 있었던 것은 독이 아니었어. 그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저 숙면 마법에 중독 증세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을 섞었을 뿐이야.”

“…….”

“의사가 모르는 건 당연하고, 마법사가 온다고 해도 당연히 모를 거야. 내가 손을 썼으니까. 신관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예외로 치지.”

“어떻게 신관이 오지 않을 걸 알았는데?”

“내 외할아버지가 신전 측이랑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하거든.”

과거 그는 내 어머니의 문제로 신전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목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그래도 그 사실을 아는 가신들이 신전에 연락을 할 리가 없었다. 내 외할아버지가 깨어난다면 필시 신전에 도움을 청한 것에 크게 분노할 테니.

“아무튼, 알겠지? 나는 엘비어츠 공작에게 델멘 공작가를 처리하게끔 도와 달라고 했고, 그는 나를 도왔어. 그게 끝이야.”

“……과연.”

“응?”

“그게 진짜로 끝이냐?”

나는 갑작스러운 하시스의 반문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게 끝이 아니면, 또 뭐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내 물음에 하시스가 입을 열었다.

“뭐, 너와 네 외할아버지 사이가 얼마나 끈끈한지도 알겠고, 네가 델멘 공작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도 알겠는데.”

“그 정도는 아닌데.”

“그럼 네 그 보좌관은?”

“…….”

“네 그 보좌관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냐?”

하시스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나는 침묵했다.

“네 보좌관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배신감이 느껴지는 일 아니냐고.”

“글쎄.”

“글쎄라고 얼버무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네 보좌관 표정이 보통이 아니던데?”

“과연, 그것 때문에 표정이 보통이 아닐까?”

“설마…….”

하시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 하시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하나 그에 내가 대꾸를 하기도 전,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범인을 지하 감옥에 가뒀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리건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내 모든 계획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시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원망받을 준비는 미리 해 둔 거지?”

그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