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6화
갑작스러운 소환에 귀족들이 이렇게 모인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에스트리아는 귀족들과 그리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원로원 회의나 정말 중요한 공무를 제외하고는 귀족들을 굳이 모집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귀족들은 이번 소환에 저마다 조금씩 당황한 눈치였다.
하물며 마지막으로 에스트리아가 그들을 소환한 날, 그녀가 갑자기 사생아의 존재를 발표했음을 생각해볼 때 이번 예정에도 없던 소환이 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벌써부터 불안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황궁으로 향하는 귀족들은 그들을 소환한 목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가늠을 하고 있었다.
이 며칠간 귀족과 황궁을 아주 뒤집어 놓은 일이 무어 있겠나.
샤트 공작은 그리 생각하면서 제 옆에 있는 델멘 공작을 향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엘비어츠 공을 독살하려고 했던 자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트 공작은 주변을 힐긋거렸다.
다행히도 켈리어드 대공이 보이지는 않았다.
저번 회의실에서 켈리어드 대공에게 한소리를 들은 이후로 샤트 공작은 혹여라도 대공이 황제에게 뭔가를 고했을까 며칠을 고민했다.
어쨌든 그 또한 황제에 대해 논하는 대화의 행렬에 낀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샤트 공작에게 큰 ‘후유증’이 되었다.
그는 이제 황제를 입에 올릴 때면 켈리어드 대공이 있는지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글쎄. 그건 모르지.”
그러나 샤트 공작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달리 델멘 공작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여유롭게 대꾸했다.
샤트 공작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델멘 공작을 은근히 흘기다가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델멘 공, 샤트 공.”
알현실에는 이미 꽤 많은 귀족들이 와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제 자리를 찾아간 두 공작을 향해 귀족들이 가볍게 목례했다.
“그나저나 켈리어드 대공 전하는 오지 않으신답니까?”
애들러 후작이 어느새 옆으로 와서 넌지시 물었다.
델멘 공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소환을 하셨으면 오겠지.”
“혹 ‘그날’ 왜 그러셨는지 대공 전하의 의중은 알아보셨습니까?”
애들러 후작의 물음에 델멘 공작이 잠시 침묵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아까 전부터 아무런 표정도 없이 여유로움을 가장하던 그의 얼굴에 약간의 금이 가더니 이내 노골적인 짜증이 드러났다.
“아니. 나도 모르겠네.”
델멘 공작의 대꾸에 애들러 후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번 원로원 회의에서 대공이 델멘 공작을 겨냥하는 듯한 말을 내뱉은 뒤 귀족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물론 엄연히 잘못한 것은 그들이었고 켈리어드 대공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대공의 황제를 향한 그 작은 비호 하나에도 민감하게 굴어야 하는 위치였다.
그래서 일부러 한동안 켈리어드 대공을 예의 주시했다.
“알잖나. 대공이 얼마나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지.”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골치 아프군요. 설마하니 켈리어드 대공께서 갑자기 황제 폐하와 화해라도 하신 건.”
“화해는 무슨. 어린아이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폐하의 성정에 켈리어드를 가만히 내버려 둔 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두 사람, 어렸을 때는 은근히 친하네 뭐네 하는 말이 돌지 않았습니까. 사실 저는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 대공 전하께서 충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얌전하게 자리를 지킬 줄 알았습니다.”
“권력 앞에서 소꿉친구의 정이 어디 있나. 하물며 그저 멍청한 계집아이였던 치가 갑자기 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니 틀어질 법도 하지.”
“역시 그렇겠지요? 그럼 저번의 그 모습은 그저 괜히 저희에게 보여 주려고 그런 걸까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엘비어츠 공이 갑자기 쓰러진 이때…….”
“크흠.”
그때였다.
귀를 기울이던 애들러 후작이 헛기침하자 델멘 공작이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실의 문을 열고 켈리어드 대공이 등장했다.
그의 서늘한 눈빛 아래 아까까지만 해도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예를 취했다.
“대공 전하.”
대공은 그저 조용히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갈 뿐 그들의 인사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눈빛에 섞인 기색만으로 그가 얼마나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을 같잖게 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물론 그것을 눈치챈다고 해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켈리어드 대공가는 언제나 그랬다.
대대손손 가주의 성정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고고하게 서서 다른 귀족들을 눈에 넣지 않은 채, 모든 이들의 경배를 받았다.
대공을 마지막으로 알현실에는 거의 모든 고위 귀족들이 모였다.
그러나 소환장에 약속된 시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등장하지 않았다.
애초에 에스트리아는 이런 식으로 종종 귀족들을 기다리게 했으므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저 황제의 방만함에 귀족들이 속으로 마뜩잖음을 읊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트리아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30분 정도가 더 흐른 뒤에도 그녀는 등장하지 않았다.
귀족들이 서서히 뭔가 이상함을 느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에 귀족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하나 문을 연 자가 누군지 확인한 순간, 그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델멘 공, 저건 델멘 공자…….”
말을 잇던 샤트 공작은 델멘 공작의 싸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델멘 공작의 시선이 제 막내아들에게 꽂혔다.
기껏 황제의 보좌관이 되고도 가문을 위해 제구실 하나 못 하는 쓸모없는 막내아들 따위에게 그는 진즉에 기대를 버린 지 오랬다.
다만.
델멘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저게 뭐지?
그를 비롯한 귀족들이 서로서로 시선을 교환하는데, 리건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기사 몇몇이 무엇인가를 끌고 오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임을 깨달은 것은 그 정체불명의 물건,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색 마대 자루 속에서 누군가가 발버둥을 치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였다.
순간 귀족들은 직감적으로 저 안에 있는 것이 오늘의 핵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엘비어츠 공작을 지금 상태로 만들어 놓은 원흉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발버둥을 치는 범인은 그렇게 검은색 자루 안에 갇혀 긴 카펫의 끝에 질질 끌려왔다.
다소 비인간적인 대우였으나 일국의 공작을 독살하려고 한 범인에게 하기에는 퍽 자비로운 대처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귀족들이 저 천에 쌓인 인간의 정체를 가늠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에스트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모였군.>
“……폐하.”
<어떻게, 범인 구경은 잘 했나?>
“폐하, 대체 이게.”
<이런, 왜 자루를 풀지 않았지? 자네들은 참으로 참을성이 많군. 나라면 당장에 천을 찢어 범인의 면상부터 구경했을 터인데.>
알현실로 들어온 에스트리아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마치 인형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에스트리아’ 대신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다른 인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탑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에스트리아의 뒤를 따라오는 자는 다름 아닌 비올레였다.
‘왜 갑자기 마탑주가?’
귀족들은 저마다 속으로 의문을 안고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를 유유하게 가로지른 에스트리아가 왕좌에 앉았다.
에스트리아를 따라가던 비올레가 자연스럽게 단상 바로 아래에 조용하게 섰다.
에스트리아의 시선이 아직도 꿈틀거리는 검은색 자루에 닿았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들 짐작은 했겠지만, 짐이 오늘 귀경들을 이곳으로 부른 건 다름 아닌 짐이, 엘비어츠 공작을 독살하려고 한 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역시.
<보아하니 귀경들도 그 범인을 꽤 궁금해하는 눈치기에, 어디 한번 귀경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자 소환하게 되었어.>
“…….”
<그럼, 이제 한번 볼까, 어떤 간악한 자가 감히 아르시스의 공작을 해하려고 했는지?>
그렇게 말하며 에스트리아가 리건을 향해 턱짓을 했다. 리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루를 봉해 놓은 끈을 풀었다.
털썩.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사내였다.
꽤 오랜 시간 자루 안에 갇혀 숨쉬기가 힘들었는지 사내가 거나하게 기침을 했다.
사내의 몸 위로 마력으로 칭칭 감긴 빛나는 밧줄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시선이 사내에게 향했다.
대체 저자가 누구인지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순간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킨 사내가 쓰고 있던 망토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마법사?”
사내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마탑의 망토였다.
“설마 마탑에서……!”
에스트리아는 귀족들의 동요를 알아챈 듯 미미하게 웃었다.
가만히 콜록거리던 범인을 응시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경들도 보았다시피, 이 자가 바로 범인이다. 얼마 전 감히 짐을 사칭해 독이 든 차를 공작가에 선물하고, 엘비어츠 공을 독살하려고 했지.>
“잠깐,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칭이라니.”
델멘 공작이 황당하다는 듯이 의문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에스트리아가 침착한 얼굴을 보였던 것은 결국 귀족들에게 괜한 빌미를 제공하여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려는 수작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그 차가 황제의 명의로 온 것을 알았다면 필시 그것을 빌미로 잡아 온갖 언사를 내뱉을 것이 분명하니까.
에스트리아는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자가 감히 짐을 사칭하여 엘비어츠 공작에게 독이 든 차를 보냈다.>
“…….”
<하나 결국에는 짐의 자랑스러운 보좌관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지. 이미 엘비어츠 공작가의 집사에게도 증언을 받아 두었어. 차를 가져온 것이 이 자라고.>
“아니, 왜 마법사가 그런 짓을…….”
<글쎄, 그걸 물어보기 위해, 오늘 짐이 경들을 부른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델멘 공작은 묘하게 불안해졌다.
이 느낌은 대체 뭐지?
모든 상황이 왠지 모르게 괴기스럽게 흘러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에스트리아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범인을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그래, 벨콧 위드.>
“…….”
<짐이 하나만 묻지. 만약 진실을 말하면 짐은 그대 하나만 처벌하고, 그대의 가족까지는 연좌하지 않겠다.>
“…….”
<그대에게 이 독살 사건을 사주한 것이 누구지?>
에스트리아의 목소리는 여상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구는 황제의 묘한 태도에 델멘 공작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황제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범인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마치 무엇을 찾듯이 두리번거리던 그가 일순 멈칫했다.
그리고.
“저자.”
“……!”
“저자가 나를 사주했다.”
델멘 공작은 그제야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범인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짜인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