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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85화 (85/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5화

‘대체 뭐지, 저번에 머리 끈을 전달하러 갔을 때의 상황도 그렇고, 진짜로, 설마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싫어하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먹은 건가?’

어느 쪽이든 그 이유로 짐작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독살 사건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예상과 달리 세베르의 반응을 보게 되어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니, 내가 당황할 게 뭐가 있지?’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세베르의 생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해도 쉽사리 머릿속에서 아까 전 세베르의 모습이 떠나가지 않았다.

결국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억지로나마 머리를 털었다.

물론 그것은 딱히 내 궁금증과 당황함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 * *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아네로제 후작조차도 독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 흐음. 안타깝지만 저로서는 역량 부족인 것 같아요.

- 일부러 하지 않는 건 아니고?

- 폐하도 참.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제가 폐하의 눈 밖에 날 만한 행동을 했나요?

- 그런 건 없지만 딱히 눈 안에 들어올 행동도 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 섭섭하기도 해라.

- 그래서, 진짜 방법이 없나?

- 없어요. 독의 종류를 모르는 이상 해독제를 함부로 쓰기도 위험해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세상에 제가 모르는 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무슨 말이지?

- 독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 독이 아니면 무엇이지?

- 글쎄요. 그건 저보다는……마법사인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네로제 후작과의 대화는 삽시에 귀족들에게도 퍼졌다.

당연히 독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독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귀족들은 더욱더 크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쯤 되면 이것을 빌미로 나에 대한 헛소리를 흘리고 다녔을 귀족들이 웬일인지 내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유를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나는 혹시라도 말을 잘못 뱉었다가 내가 진짜로 얽혀 있다면 다음 표적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날 세베르가 보여 준 태도 때문이었다.

귀족들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켈리어드 대공가의 수장이 황제 때문에 원로원 전체를 나무랐다.

얼핏 듣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동안 원수지간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나와 세베르라면 말이 달라졌다.

게다가 엘비어츠 공작이 쓰러지면서 내심 내 기가 한풀 꺾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들은, 되레 켈리어드라는 복병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떨 만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불안이었지만.

하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계속해서 질질 끌고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는 별다른 과격한 반응이나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리건에게 어떻게든 소포를 보낸 이를 찾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사흘 뒤, 나는 오랜만에 일전에 선물로 받은 세드리거?머리가 셋 달린 새-에게 모이라도 주려고 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온실에 한 걸음 내딛자마자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드님?”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하게 스며든 햇살 속에 마치 파묻힌 듯한 사내는 다름 아닌 레르하겐이었다.

그는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긴 하얀색 의자마저도 미처 담아내지 못한 커다란 키에 그의 긴 코트가 바닥에 소복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뻗은 몸체는 누가 봐도 겁을 먹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이제 그 앞에서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코트에 먼지 쌓여요. 로드님이 무슨 빗자루인가요?”

분명 내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게 뻔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레르하겐은 내 말에 눈도 뜨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상관없다.”

“마법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아니 그런데 평소에는 후원에 계셨잖아요. 왜 갑자기 이곳에 계시는 거예요?”

“날이 쌀쌀해져서. 이곳은 따뜻하고.”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무슨 추위를 그렇게 많이 타요? 혹시 곰이에요? 이러다가 겨울이 되면 동면하러 사라지는 거 아니죠?”

“딱히. 나는 하지 않는다. 다른 일족은 모르겠지만.”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세상에, 동면을 하는 드래곤이 진짜로 있다고?

진짜? 곰이야?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세상에는 원래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으니까.

나는 레르하겐의 옆에서 걸음을 옮겨 세드리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셀라가 잘 관리해 왔는지,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새는 나를 보자마자 입을 뻐금거렸다.

내 팔에 걸려 있는 바구니를 본 것 같았다.

나는 그 속에서 모이를 좀 덜어서 조롱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세드리거가 그것을 쪼아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새인데.’

머리가 셋이라서 모이도 세 배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빼고는 딱히 특이할 것 없는 신물이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본다고는 하지만 딱히 쓸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흘러간 일이나 예언 따위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니까.

속으로 생각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레르하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가하군.”

“오랜만에 서류를 빠르게 처리했거든요. 다들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사건으로 쓸데없는 헛소리만 하다 보니까, 오히려 제가 처리해야 할 중요한 서류들은 줄어들더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독살을 당할 뻔했는데 생각보다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레르하겐의 목소리에 내가 멈칫했다.

이윽고 바구니에 있는 모이를 전부 탈탈 털어 세드리거에게 준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레르하겐이 무심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인간을 뚫을 것 같은 그의 눈빛에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

“그냥, 조급해 봤자 바뀔 게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아시잖아요? 저 이성적인 거.”

“이성적인 건 모르겠고.”

“…….”

“귀찮은 일이란 건 알겠군.”

레르하겐의 말에 내가 흥- 코웃음을 쳤다.

“로드님 눈에 안 귀찮아 보이는 게 있기는 해요?”

“글쎄.”

나는 레르하겐의 애매한 대답에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늘 한결같은 태도였기에 굳이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내 내가 걸음을 옮겨 온실을 빠져나가려는 그때 레르하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의 협곡으로 기어이 가야겠다면, 가게 해 주지.”

그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놀란 얼굴을 하고 레르하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반대하던 거 아니었나?

물론 레르하겐의 반응이 하시스에 비해서는 다소 미미하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까지 반대 입장을 취하던 그였기에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게 의외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떻게든 가겠다고 기를 쓰는 게 눈에 보여서 그런다.”

“아니 제가 언제 기를 썼다고. 저 요즘 아주 얌전했다고 자부하는데요?”

“글쎄. 과연 얌전했나?”

레르하겐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내가 입을 꼭 다물었다.

이건 절대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내 ‘계획’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구는 그의 모습에 나는 괜히 속이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리건한테도 알리지 않은 사항인데?’

“네 성격에 이 상황에서 태연하게 새 모이 따위를 주러 온실에 올 리가 없으니 그런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얼굴에 의문이 쓰여 있어.”

“크흠.”

“아무튼 네 고집을 말릴 수 없다는 건 알겠으니.”

“아, 알았어요. 절대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 맞죠?”

왠지 모르게 속내가 간파당한 것 같아 나는 괜히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내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 있다가는 혹여라도 괜히 더 간파당할까 바로 바구니를 안고 종종걸음으로 온실을 나섰다.

그러나 그때, 나를 찾아 헤매는 리건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황녀 전하께서 어디로 가셨…….”

“무슨 일이야?”

급기야 기사에게 내 행방을 묻는 리건을 향해 내가 다가갔다.

리건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자신이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폐하께서 전하께 전하실 말씀이 있다 하여 왔습니다.”

“그래? 그럼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나는 일부러 내 옆에 있는 기사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는 여유까지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리건은 내 놀이방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페하를 사칭하여 소포를 전달한 이를 찾았습니다.”

“누구지?”

“마탑 소속의 마법사입니다.”

“마탑 소속이라.”

“……안 놀라십니까?”

“놀랄 게 뭐가 있어. 이 세상에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데.”

“아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평온하신 듯한데.”

리건은 내가 생각 이상으로 침착하자 조금 의아한 듯싶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명령에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그자를 끌고 와 내 앞에 꿇어앉혀. 그리고 그자뿐만 아니라 마탑주인 비올레까지 전부 황궁으로 소환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원로원의 귀족들을 집합시켜.”

“원로원까지 집합시켜야 합니까?”

“이 며칠 동안 아주 엘비어츠 공작가 독살 미수 사건으로 난리가 났던데, 한번 구경시켜 줘야지.”

“……네.”

리건은 내가 갑자기 귀족들까지 불러들이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는 말을 더 붙이지 않고 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흐음-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방 안에 깃든 정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느슨해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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