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4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다가 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의사가 그랬어. 마법에 걸린 건 아니라고. 내 소견도 그래. 내가 아는 범위 내에는 확실히 중독 증세를 일으킬 만한 공격 마법은 없어.”
“하지만 흑마법은 다른 문제입니다.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지. 완전히 다른 문제지…….”
“…….”
“그래서 일부러 신관을 부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혹시라도 진짜로 흑마법에 당한 것이라면 신성력이 엘비어츠 공작의 몸에 어떻게 작용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뭐, 엘비어츠 공작가도 자기 주인이 신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부를 것 같지 않지만.”
“하지만 신성력은 엄연히 흑마법에 대항하는 힘입니다.”
“지금 신관 중에, 진짜로 흑마법을 상대해 본 자가 있나?”
“그건…….”
“확실히 고서에는 신성력이 흑마법을 상쇄한다고 나와 있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실제로 흑마법을 상대해 본 신관은 아무도 없어.”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게다가 애초에 신성력은 상태를 더 좋아지게 하는 힘이지, 몸에 있는 독소를 빼내는 것까지는 불가능해.”
“레르하겐 님은.”
“뭐?”
“혹시, 레르하겐 님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때였다.
리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내가 멈칫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다.
진짜로 독에 당한 것이든 아니면 흑마법에 당한 것이든 레르하겐은 확실하게 해결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치료하진 못해도 최소한 연유 정도는 쉽게 밝혀내겠지.
하지만.
“좋아. 로드님에게 물어보기 전에 일단 아네로제 후작에게 무슨 독이 쓰였는지부터 알아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소포를 보낸 그 새끼부터 잡아서 족쳐야겠어. 오늘 내로 가까운 시일 내 엘비어츠 공작가에 드나든 모든 사람들을 조사해.”
리건은 내 말이 뭔가 꺼림칙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리건이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정적으로 가득 찬 방에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귀족들에게 소문이 퍼졌겠지.’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분명 이번 사건은 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특히.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특히.
너한테.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며, 나는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 * *
과연 내 예상대로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사건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몰고 왔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한때 원로원의 우두머리였던 황제의 외할아버지가 독살을 당할 뻔했다.
아무리 귀족들 사이에 독살이 암암리에 꽤 좋은 암살 방법으로 쓰인다고 하나 어쨌든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나면 귀족들이 어느 정도 경계를 세우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무도 독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이 더욱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원래 인간은 미지의 것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언제나 죽음의 테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귀족들에게, 미지의 것은 더욱더 큰 불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원로원의 정기 회의가 열리는 날, 회의실은 온통 엘비어츠 공작의 독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로 차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짐짓 엘비어츠 공작을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했지만, 귀족들은 하나같이 제 안위를 신경 쓰기 바빴다.
“엘비어츠 공작께서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시다니, 그야말로 염려스럽군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동안 정정하시던 분이 갑자기 그리 누워 계신다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게다가 무슨 독인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게 가능합니까?”
“해독제도 없는 독이라니, 그러면 좀 위험한데…….”
“아니 대체 범인이 누구랍니까? 엘비어츠 공작은 원로원 회의에도 참여를 하지 않아 딱히 정치적으로 제거해도 별 쓸모가…….”
“혹여 이것을 시작으로 귀족들에게 무슨 나쁜 일이라도…….”
“혹시, 폐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건…….”
“흠흠. 말을 주의하게.”
평소와 다름없이 영상 마법을 통해 원로원 회의의 상황을 살펴보던 나는 귀족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일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대화의 끝은 궁극적으로 나를 향했다.
물론 그간 어느 정도 내 성격을 파악했으니 내가 직접 독살을 지시했다거나 꾸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배후에 혹시나 내 다른 의도나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계속 이어지는 대화는 무서울 정도로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서 오히려 더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엘비어츠 공작가가 입이 무거워서 다행이지, 그 독이 든 소포가 황제의 명의로 보내진 것임을 알게 됐다면 또 어떤 난리 법석을 떨었을지 모른다.
결국 얼마나 지났을까, 세베르가 등장하는 것을 기점으로 조용해진 회의실에 인형을 들여보낸 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내내 독살 미수에 관련된 것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먼저 그에 관련된 사항을 묻지 못했다.
그렇게 필요한 것만 언급한 뒤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그때 갑자기 델멘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그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인형의 무심한 눈길을 받고도 델멘 공작은 이미 몇 번이나 속으로 연습을 한 인간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엘비어츠 공작께서 독살을 당할뻔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독이 든 차를 마셨다고 하던데. 그 독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사실입니까? 혹여…… 아시는 것 없으십니까?”
그에 ‘내’가 흥미로운 기색을 얼굴에 띄웠다.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그를 보았다.
그 미소에는 명백한 조롱의 뜻이 담겨 있었다.
‘나’는 살짝 눈썹을 까닥이곤 다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글쎄, 딱히 아는 건 없고…… 나는 그것보다 공이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군.>
“…….”
<델멘 공작가에 특별히 연락하고 있는 이라도 있나?>
‘내’ 물음에 델멘 공작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무엇인가 변명을 하려는 듯이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나는 그대로 인형을 밖에 내보냈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마자 회의실은 다시 소란으로 시끄러워졌다.
황당으로 가득 찬 귀족들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아니 독이 든 차를 마셨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굳이 저렇게 숨기실 이유가…….”
“폐하께서 저러시는 것을 보면 확실히 폐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전에 폐하께서는 왜 저렇게 담담하십니까?”
그들은 생각 이상으로 내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하나 애초에 그들 앞에서 내 근심 걱정 따위를 말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범인’을 잡는 일이니까.
그래, 범인.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영상 마법 시전을 멈추었다.
아니, 멈추려고 했다.
갑자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경박하군.”
“……대, 대공 전하?”
예상치 못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세베르였다.
회의실에 등장해서부터 공무와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던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귀족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나 또한 그가 이 상황에서 입을 열 줄은 몰랐던 지라 떨떠름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특히 아까까지 수군거리고 있던 이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하듯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이내, 빌크렌 백작이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그게 무슨 말씀-.”
“경박하다 했다.”
“……?”
“경박하고 무엄하고 교양도 없고 심지어 겁도 없군.”
거의 대부분 귀족들의 시선 아래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베르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곧 보좌관에게 몇 가지 서류를 넘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외투의 단추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장갑까지 낀 그의 눈길이 델멘 공작에게 꽂혔다.
“수장이 형편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세베르의 묵직한 목소리는 그야말로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조롱도, 분노도, 비웃음도,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은 오히려 말이 겨냥하는 상대를 더욱더 분노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델멘 공작의 낯빛이 흙빛이 되었다. 하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말을 마친 세베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심한 얼굴로 회의실을 나갔다.
그러나 그의 여유로운 뒷모습을 본 나는 정작 그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뭐야. 지금 화내는 건가?’
솔직히 세베르가 저렇게까지 자신의 분노를 언사로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였으니까.
어렸을 때도 그는 내 앞에서 그 흔한 짜증조차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멍청하거나 답답하게 굴어도 그는 그것을 언제나 다 받아 주었으니까.
그런 그가 유일하게 확실한 분노를 드러낸 적이 바로 내가 황궁을 피로 씻은 그날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오늘 그가 보이는 모습은 또 그날의 분노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하나 더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뭐지.’
세베르가 이 상황에서 고요한 분노를 터뜨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조금 미묘한 눈길로 영상을 응시했다.
그곳에서는 나머지 귀족들이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황당함만큼은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대공께서는 언제부터 폐하를 위해…….”
그즈음 샤트 공작이 작게 읊조렸으나 옆에 있던 애들러 후작이 눈치를 주자 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아까 전부터 조용하게 이 모든 것을 눈에 넣고 있던 아네로제 후작이 갑자기 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웃음에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으나, 아네로제 후작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이윽고 귀족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뜨는 것을 보다가 나는 영상 마법 시전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아까 전 세베르의 목소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