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3화
엘비어츠 공작 독살 미수 소식이 황궁에 들려온 것은 정확히 사건이 일어난 지 두 시간 뒤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몇 초간 멍하니 있던 나는 금세 제정신을 차리고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원래라면 리건과 동행해야겠지만 황녀의 신분인지라 나는 드물게 셀라와 함께 나왔다.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괜찮으실 거예요. 다행히 일찍 발견한지라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시다고 해요.”
셀라는 그런 나를 보고 위로의 말을 꺼냈다.
그러나 정작 내 귀에는 그녀의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곧 덜컹거리는 마차가 멈춰 서고, 나는 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바로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무슨 말이야? 갑자기 독살이라니?”
그에 자세를 바로 한 집사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분명 오늘 점심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오후에 집무실로 들어가니 쓰러져 계셨습니다.”
나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집사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작게 물었다.
“한데 황제 폐하께서는…….”
그에 내가 아- 하고 가볍게 읊조렸다.
“어마마마께서는 이번 사안에 관련하여 따로 더 조사를 해 보시기 위해 조금 늦으실 거야. 그래서 내가 먼저 왔어.”
“그렇군요.”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집사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석연찮음이 보였다.
누가 봐도 황제가 직접 오지 않은 것을 신경 쓰는 듯한 그의 얼굴은 내가 무례하다 꼬투리를 잡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황제가 걸음을 하든 말든 그것은 황제의 자유지 일개 귀족가의 집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나는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그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곧 집사가 나를 안내했다.
나는 한동안 방문하지 않아 다소 낯설면서도 눈에 익은 저택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이내 엘비어츠 공작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방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자 의사와 고용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녀 전하?”
나에 관한 소문을 알음알음 들었는지 그들은 빠르게 내 신분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에 화답하는 대신 나는 잔뜩 착잡한 마음을 안고 침대로 다가갔다.
엘비어츠 공작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파리한 안색은 그야말로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처럼 메마르기 그지없었고, 이대로 숨이 멎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생명이 줄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다가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대체 왜, 어째서.
나는 바로 시선을 들었다.
일단은 침착해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호들갑을 떨고 운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죽어 가는 얼굴로 누워 있는 그가 자꾸만 눈에 밟혀서 나도 모르게 시야가 뿌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주먹을 꼭 쥔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의사가 자연스레 나와 시선을 부딪쳤다.
“무슨 독인지는 알아냈어?”
내 물음에 의사의 얼굴 위로 난감함이 피어올랐다.
이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제가 파악하고 있는 독의 종류만 수천 가지인데, 그 어떤 것도 아닌 듯합니다.”
“중독인 건 맞아?”
“확실히 중독 증상입니다. 혹시나 하여 마법사들에게 증상을 자문해 보았는데, 환각 마법으로 중독 증상이 보이게만 하면 모를까, 중독 자체를 일으킬 수는 없다고 합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그건 알아?”
내 물음에 의사는 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나 또한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의 눈길을 받게 된 집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실…… 며칠 전에 공작저로 온 소포가 있었습니다.”
“소포?”
“네. 몇 가지 귀한 차들이 함께 포장되어있는 소포였습니다.”
“설마…… 그 소포에 있는 차를 마시고 쓰러진 거야?”
내 물음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공작 각하께서 차를 드시겠다고 하시어, 특별히 그것으로 내드렸는데, 그만……. 제 불찰이었습니다. 미리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아야 했는데.”
“그러니까. 선물로 들어온 차인데 미리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해 봤다는 것이 말이 돼? 대체 어떻게 시중을 드는 거야?”
내 목소리에 들어 있는 명백한 노기에 옆에 서 있던 의사가 움찔했다.
어린아이이긴 하나 어쨌든 황녀이고, 이곳에서 그들을 벌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자이니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을 거다.
심지어 엘비어츠 공작이 얼마나 황제와 사이가 좋고, 그 딸인 나를 예뻐하는지 정도야 공작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알 법했다.
그러나 정작 내 말을 들은 집사의 얼굴에 짙은 난감함이 섞였다.
그 난감함은 마치 그가 내게 알려 준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보다가 물었다.
“왜, 다른 뭔가가 더 있어?”
“…….”
“말해. 그래야 어마마마한테 보고를 드리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 아니야.”
내 추궁에 집사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짓하자 아까까지 방에 서 있던 고용인들이 뭔가 깨달은 듯이 눈치 빠르게 방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방에는 나와 엘비어츠 공작 그리고 집사와 셀라만 남았다. 집사가 셀라를 향해 눈치를 주는 것이 느껴져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시녀야. 어마마마도 신뢰하시고. 그냥 말해, 뜸 들이지 말고.”
내 말에 집사가 조금 말을 골랐다. 그러더니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사실 공작가는 주인님께 도착한 모든 선물을 엄격하게 검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은 굳이 하지 않은 이유가…….”
“…….”
“그 소포가 황제 폐하의 명의로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한 방 안에서 나는 멍하니 집사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어마마마가 소포를 보냈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나 집사는 난감한 듯 보였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아까 전 어마마마는 행차하지 않았냐고 물어본 게, 하…….”
집사는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지 못할 게 뻔했다.
그는 그저 어린 황녀가, 자신의 어미가 외할아버지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에 분노한다고 생각하겠지.
“이 일의 범인이 어마마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녀 전하. 그저.”
“그저?”
나는 서늘한 음성으로 집사의 말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피식 웃으면서 비꼬듯 물었다.
“자신의 형제자매를 척살했으니, 자신의 외할아버지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거 아니야?”
기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 말이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걸.
그러나 동시에 어린아이이기에 나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그에게 추궁을 할 수 있었다.
집사는 내가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이것은 감히 황제 폐하께 먹칠을 하려는 흉계가 분명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이가 나한테 그딴 것을 물어?”
“송구합니다, 전하. 벌하여 주십시오.”
나는 그런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됐어.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니. 하지만 이 무례는 어마마마한테 확실하게 알리겠다.”
“송구합니다.”
말을 마친 나는 다시 엘비어츠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생기 하나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던 내가 작게 읊조렸다.
“일단, 독에 당한 건 확실하다고 하니 어떻게든 해독제를 써 보는 것이 좋겠어. 아마 어마마마도 빠르게 사람을 보낼 거야.”
“네.”
“그리고.”
나는 조금 진정한 얼굴을 했다. 내 시선은 엘비어츠 공작에게 닿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침묵하던 내가 말을 이었다.
“그 소포를 보낸 것이 누군지, 제대로 찾아내야 해.”
“…….”
“어마마마는 그럴 분이 아니야. 그분은 지고무상의 자리에 있는 분이야. 어마마마는 독살 따위의 술수를 쓰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
“어마마마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에게 손을 쓸 리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데 왠지 모르게 코가 시큰거렸다.
그래, 나는 절대 엘비어츠 공작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도 알고, 엘비어츠 공작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 할아버지도 그래서 마셨을 거야. 어마마마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내 말에 집사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침대에 있는 엘비어츠 공작을 한 번, 그리고 나를 한 번 응시한 그가 이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 소포의 진짜 출처를 추적하는 데 전심전력으로 임하겠습니다.”
집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 * *
“어떻게 되셨습니까?”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리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의 의자에 올라간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네로제 후작을 불러.”
“아네로제 후작이요?”
리건은 내 갑작스러운 명령에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했으나 곧바로 뭔가 깨달은 듯했다.
“설마 아직도 해독을 하지 못한 겁니까?”
“무슨 독인지 의사도 알 수 없다고 해.”
“이 무슨…….”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어.”
“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독이 들어 있는 차가, 내 이름으로 공작가에 전해졌다는 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리건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의 눈가에 퍼지는 심각한 기색에 내가 쓰게 웃었다.
“재밌지?”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그래, 누가 봐도 나와 엘비어츠 공작을 갈라놓으려는 수작이야. 그동안 엘비어츠 공작은 꾸준하게 내 뒷배가 되어 주었어. 엘비어츠 공작을 제거하는 것도 모자라 내게도 먹물을 뿌리면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리건은 내 말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 드물게 서늘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걸렸다.
“혹시, 흑마법과는 연관이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