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2화
“아가씨와 대화는 끝냈어?”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시스는 마치 습관처럼 미간을 팍 찌푸렸다.
“네가 웬일이냐?”
“아가씨 호출.”
깔끔한 대답에 하시스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일리안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아가씨는 별다른 반응 없지?”
“무슨 헛소리냐?”
“배신, 그것 때문에 아가씨를 찾아간 거 아니었어? 내 말을 듣고.”
일리안의 말에 하시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네가 나한테 알려 준 게 있긴 했던가?”
물론 하시스가 오늘 이곳으로 찾아오게 된 계기 중에 일리안이 있기는 했다.
그날, 죽음의 협곡으로 가겠노라고 폭탄을 던져 놓고서 정작 에슈트 본인은 유유자적하게 사라졌다. 그 뒤로 일리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 배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생각보다 멀쩡한데?
- 그게 무슨 말이냐? 배신이라니.
-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아가씨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네. 절망하고 분노할 줄 알았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 물었지만 일리안은 끝까지 미소만 지을 뿐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시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사냥 대회, 배신, 후작 이상의 가문.
그동안 알음알음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조금만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오늘 하시스가 에슈트를 만나러 온 이유였다.
‘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하지만 하시스는 그것이 에슈트가 느낀 감정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군가의 배신에 아플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봐 온 에슈트는 아픈 부위를 절대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날카로운 성격과 논리적인 이성을 지녔다 해도 인간의 말랑말랑한 마음까지 무장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일리안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그때 갑자기 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너나 로드는 아가씨를 깨지기 쉬운 인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아가씨는 생각 이상으로 강해.”
그렇게 말한 일리안이 살짝 고개를 돌려 하시스를 보았다. 언제나 웃음을 담고 있던 일리안의 눈동자에 미묘한 빛이 흘렀다.
그것은 얼핏 보면 긍정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웃음 같기도 했다.
무엇에 대한 비웃음일까.
하시스는 그런 일리안의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내 언제 웃었냐는 듯이 서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강한 것과 배신에 의한 고통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
“겪어 보지 못했으면 입 닥치고 있어라.”
말을 마친 뒤 하시스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이내 복도에서 사라졌다.
일리안은 미묘한 얼굴로 복도의 끝을 응시했다.
‘겪어 보지 않고서는 말하지 말라’라.
“자기는 겪어 봤다는 거네.”
그렇게 읊조린 일리안이 눈썹을 까닥였다. 그의 얼굴에 비낀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긴, 굳이 생각해 보자면 그의 인생에는 배신 따위는 없긴 했다.
배신은 신뢰나 호감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는 배신하는 쪽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일리안은 고개를 돌려 에슈트의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주인을 닮아 화려하고 단단한 문 앞에 선 채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나야. 불렀어?”
“들어와.”
곧 안쪽에서 승낙이 들려오자 일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에슈트는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펜을 가볍게 돌리며 턱을 괴었다.
일리안은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나를 다시 부른 거야?”
“네가 해 줄 게 있어.”
“내가 또 아가씨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영광인데?”
“헛소리하지 말고.”
“그래서, 시킬 게 뭐야?”
일리안의 물음에 에슈트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흑마법 기운을 가리는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어?”
* * *
에슈트가 연무장에 다녀간 뒤에도 세베르의 일상에는 딱히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최소한 세베르의 보좌관인 펠릭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펠릭스는 황제와 똑같이 생겼다고 알려진 황녀가 아마도 황제의 명령을 받고 머리 끈을 돌려주러 왔을 것이라고 암암리에 퍼진 소문을 들었다. 그걸 들은 후 당연히 조만간 세베르가 어떤 조치를 취하리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그가 알기로 이 머리 끈은 절대 황제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애초에 귀족과 보좌관들만 주로 이용하는 곳에서 머리 끈이 도둑맞은 거나 다름이 없는데, 그걸 폐하가 갖고 있었다는 게 이상해. 심지어 나는 그날 폐하를 본 적도 없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펠릭스는 누군가가 자신이 방심한 틈을 타 머리 끈을 훔쳐 갔고, 그것을 무슨 연유로 황제에게 넘겼다는, 아주 진실에 근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그의 예상과 달리, 세베르는 머리 끈을 훔쳐 간 범인을 찾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손에 들어온 머리 끈을 다시 검 손잡이에 묶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오늘, 펠릭스는 세베르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멈칫하고 말았다.
“마탑주에게 연락하라.”
갑자기?
물론 그동안 켈리어드 대공가와 마탑이 암암리에 어느 정도 연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에는 대공가에서 마탑에 전력을 빌려주기도 했고, 그 대가로 마탑은 처리하고 남은 마물의 사체를 연구용으로 켈리어드 대공가에 넘겼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었다.
대륙 곳곳에서 튀어나오던 마물이 슬슬 잠잠해지기 시작한 지금, 또다시 켈리어드 대공가가 마탑과 접촉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전하. 외람되지만, 마탑과는 사적으로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마탑은 그 어떤 나라에도 귀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집단이며 어마어마한 잠재적 전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왕실이라면 모를까, 귀족 가문이 마탑과 빈번하게 연락을 주고받거나 협업을 하는 것은 위험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펠릭스는 에스트리아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한때 괄시받던 막내 황녀였던 그녀는 제 신하가 조금이라도 힘을 키우려 하면 당장에 의심부터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켈리어드 대공가는 그전에 다른 황족을 지지했으니. 사실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 둔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 아닌가.’
“저희가 마탑과 사적으로 접촉을 했다가 어떤 음모를 꾸민다고 폐하께서 오해라도 하시면.”
펠릭스의 말에 창밖을 보고 있던 세베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무뚝뚝한 표정은 누가 봐도 움츠러들 정도로 서늘했다.
하나 세베르는 제 말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보좌관을 닦달하거나 처벌하는 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펠릭스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세베르의 말에 펠릭스의 얼굴이 쩌적 굳어 버렸다.
“이 머리 끈, 죽음의 협곡에서 발견되었다더군.”
“……네?”
“그것을 마탑이 발견한 뒤 폐하께 보냈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지?”
죽음의 협곡이라는 말에 펠릭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더듬거리며 제 상사를 향해 말했다.
“지금, 그러니까, 폐하께서 설마…… 서, 설마 전하께서 흑마법 같은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것을 내게 돌려주지 않았겠지.”
“떠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황녀를 보내지도 않았겠고.”
물론 마지막 말은 세베르 본인도 그리 자신이 없었다. 최소한 그가 생각하는 이유 중에, 에스트리아가 자신을 완전히 신뢰할 만한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황녀를 보냈다. 예닐곱 살짜리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그 정도 나이는, 세베르의 안색이나 기색을 살피라는 황명을 받더라도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할 나이였다.
사실 애초에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것부터가 에스트리아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치였다.
조금 순진한 면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는 성정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베르는 일단 그 의문은 펠릭스에게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에스트리아의 속이 어떤지 그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그는 펠릭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켈리어드 대공가를 노리고 있다.”
“한데 전하, 죽음의 협곡에 이 머리 끈을 훔쳐서 떨어뜨렸다는 것도 뭔가 이상합니다. 죽음의 협곡이 어떤 곳인데, 떨어뜨렸다가 발견이 안 되면 어쩌려고.”
“…….”
“설마.”
펠릭스는 그제야 세베르가 마탑에 연락을 하라고 한 이유를 알아챈 듯 입을 딱 벌렸다.
“마탑에 첩자가-.”
“마탑주에게 연락해. 내가 직접 알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세베르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잠깐 뭔가 고민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저 내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시킬 게 있다.”
“하명하십시오.”
“일전에 가져온 마물, 그 마물의 흔적을 쫓아. 일단은 수도를 시작으로 아르시스 제국 내 전부를 조사해라.”
마탑에 첩자가 있고, 그자가 켈리어드 대공가에 먹물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거라면 그 누군가는 아주 큰 확률로 아르시스 제국의 귀족일 터였다.
그리고 제국 내부의 귀족 중에서도 특히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라면.
‘후작 이상의 귀족.’
그게 아니라면, 굳이 에스트리아가 후작 이상의 귀족들과 사냥 대회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애초에 사냥 대회의 초대장을 받은 순간부터 세베르는 에스트리아가 뭔가 단서를 잡은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귀찮은 걸 극도로 싫어하는 레르하겐이 사냥 따위를 핑계로 숲에 들어간 걸 보면 그날 숲에서 무슨 일을 꾸몄겠지.
그것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건 아마도 이 머리 끈 때문일 거다.
딸을 시켜서 머리 끈을 돌려주게 한 이유는 왠지 모르지만 자신이 그 일과 연관되지 않았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겠지.
다만.
‘그런데, 잠들어 있다는 것치고는 의외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이 꽤 긴 것 같군.’
그나마 사냥 대회 때까지는 주요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레르하겐이라고 생각해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 머리 끈 사건까지 더해지자, 세베르는 에스트리아가 이 모든 일을 직접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신을 잃고 지낸다는 이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게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는 건가.’
물론 에스트리아의 성정상 그에게 뭔가를 더 숨기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하나 단순하게 ‘숨긴다’ 정도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어서 세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 펠릭스가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평소와 달리 다소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집사만 아니었다면.
“대공 전하, 급전입니다.”
다소 가라앉은 집사의 목소리에 세베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낮은 음성이 방을 울렸다. 그에 집사가 입을 뗐다.
“엘비어츠 공작이 독에 당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