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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81화 (81/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1화

아이리스에게 보낸 편지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답장이 왔다.

애초에 거절을 염두에 두고 보낸 초대장은 아니었던지라, 나는 꽤 흡족하게 답신을 서랍에 넣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대각선 방향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놀이방, 정확히 말하자면 내 집무실을 찾아온 하시스가 있었다.

나는 삐딱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보다가, 왠지 모르게 그가 할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죽음의 협곡에 가는 걸 말릴 거라면 그만둬. 로드님과 이미 상의를 끝낸 일이니까.”

“점쟁이냐? 어떻게 알았어?”

“네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나는 며칠 전 죽음의 협곡으로 가겠다고 말을 내뱉는 순간 하시스가 지었던 표정을 상기했다.

그야말로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를 그대로 얼굴에 걸어 놓은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후원이 떠나갈 듯이 결사반대를 외쳤다.

- 절대 안 돼!

물론 그렇다고 들을 내가 아니었다.

거의 통보나 마찬가지로 말을 내뱉은 나는 그 뒤로 이어지는 하시스의 모든 잔소리와 반대를 뇌를 거치지 않고 다른 귀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튿날 나를 찾아온 레르하겐이었다.

물론 내 말에 돌아올 격렬한 반응 정도야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굳이 찾아와서까지 나를 설득하려는 그의 정성만큼은 갸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사실은 하나도 갸륵하지 않았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펜을 들고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로드님께도 말했지만 지금 갈 거 아니야. 눈앞에 일들을 처리하고 천천히 가 볼 거야.”

“이러나저러나 가겠다는 말 아니냐?”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준비를 하고 간다는 거야. 나는 내 목숨을 허투루 걸 정도로 무모하지 않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무모하지 않은 거야? 무모의 기준이 너무 엉망이군.”

그렇게 말하며 하시스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에 내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맞을래?’라는 의미로 쏘아보자, 평소라면 리건과 다른 의미로 내게 깐족댔을 그가 갑자기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의 진지한 모습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다른 뭔가를 들었거나 짐작을 하고 왔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향해 물었다.

“야. 내가 그날 이후로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생각하지 마.”

“너 혹시, 그날 사냥 대회에서 뭔 일 있었냐?”

“뭔 일이 없었을 리가 없-.”

“범인, 찾았냐?”

그 순간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질문에 빠르게 움직이던 내 펜이 멈칫했다.

탁.

나는 펜을 거칠게 내려놓고 잠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찾았어, 범인.”

그 순간 하시스가 움찔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 굳어 있던 미간이 완전히 찡그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했다.

“누군지도 특정했고.”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또한 나와 같은 배를 탄 사람으로서 알고 싶다 한다면 알려 주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며칠 동안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상기하자 속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일부러 다소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협곡으로 가려는 것이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야. 엄연히 말하자면 별개의 문제지.”

“그래서, 네가 아는 사람이냐?”

“누구. 범인?”

하시스는 마치 내 안색을 살피듯 나를 응시하다가 왠지 모르게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후작 이상의 가문이야.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어?”

“…….”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으나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시스는 입매를 굳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뜸을 들이나 싶어 나는 드물게 재촉하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길고 긴 침묵을 더 이상 참지 못할 무렵, 그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야. 네 성격에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겠는데 말이야.”

“……?”

“그거 딱히 네 탓은 아닌 거 알지?”

나는 그의 말 속에 숨겨진 저의를 읽어 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내 탓이 아니라는 거지? 의문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자, 하시스가 살짝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널 배신한 놈이 나쁜 거라는 거 알고 있냐고.”

“날 배신한 놈이 좋은 놈인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네 잘못 때문에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말이야.”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제야 하시스의 말 속에 숨겨진 저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설마 그런 아침 댓바람부터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나 위로하는 거야?”

그의 의도를 알고 나니 다시 여유로워진 얼굴로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내가 턱을 괴고 그를 보자, 하시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얼굴을 보니까 딱히 자책하는 얼굴은 아니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지금 나 위로하는 거잖아. 그치?”

마치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언제나 그랬듯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리고 그가 화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웬일인지 하시스는 웃음기 섞인 내 목소리에도 그저 나를 빤히 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에 내가 칫-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등에 푹신한 의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겨우 배신 따위에 흔들리지 않아. 아니, 너나 로드님이나 왜 나를 그렇게 바람만 불어도 픽 쓰러질 것처럼 보는 거야?”

“…….”

“나는 황제야. 이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좋아하는 사람한테 배신당하는 건 내 일상이었어.”

나는 조금 어이없는 얼굴을 하며 하시스에게 대꾸했다.

그러나 하시스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고 이내 그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저 꼬맹이.”

“뭐야? 이 꼬맹이가 왜 갑자기 시비야?”

“야, 됐고. 그래, 멀쩡해 보이니까 됐다.”

나는 말을 마친 하시스를 향해 발끈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더욱더 미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설마 진짜로 저 말을 해 주려고 온 건가?

물론 하시스 녀석의 성정으로 딱히 못 해 줄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우리 중에서는 가장 상식적인 인간으로 보였으니까.

다만 오늘 그의 모습은 평소와 좀 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데 문손잡이를 잡은 하시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자면, 죽음의 협곡, 함부로 가지 마.”

“또 그 이야기야? 이미 로드님과 끝냈다니까.”

“그럼 스승님이 이건 안 가르쳐 주든?”

“로드님이 내게 숨기는 게 어디 한두 개야? 애초에 말해 주는 게 몇 없는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사실이지 않은가. 레르하겐은 웬만해서 내게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하도 똑똑해서 정보를 스스로 얻을 수 있었던 거지.

“또 뭐, 너도 숨기는 게 있어?”

“이건 숨긴다기보다는, 확실해지면 말해 주려고 스승님한테만 말한 건데.”

“뭐야? 불안하게.”

“너, 축제 당일 널 찾으러 갔다가 내가 시비 걸렸다는 거 기억하고 있냐?”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워낙에 성질머리 더러운 인상이라 시비가 걸려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해 넘어갔지만.

“기억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그날 내게 시비를 건 인간들, 그거 같았다.”

“그거?”

“네가 말한, 그…… 흑마법으로 부활한 망자들.”

그 말을 듣자마자 시큰둥하게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세웠다.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그 중요한 걸 지금까지 말 안 하면 어떡해! 누가 봐도 제일 중요한 게 그거 아니야?”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이를 악물었다. 하시스는 그런 내 얼굴을 보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식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는 문에 턱 기댔다.

“내가 말했잖냐, 확실하지 않다고. 그래서 더 조사를 해 보고 너한테 말해 주려고 했어.”

“그건 바로 말해야지! 조사를 해도 내가 하면 되는데!”

“그래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심통 난 얼굴 좀 풀어.”

“누가 심통이 났다고 그래? 난 화가 난 거야.”

그러나 말과 달리 나는 쯧 혀를 찼다.

하시스 저 짜증 나는 녀석.

“그런데 확실하지 않다는 건 뭐야? 흑마법으로 부활한 망자는 누가 봐도 평범한 인간과 달라, 네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이라고.”

“아니, 못 알아챌걸.”

“말도 안 돼. 내가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치들, 평범한 인간과 똑같았어.”

“어?”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있어 흑마법의 부활술은 그저 시체를 움직이는 술법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흑마법 관련 서적에서도 부활술을 ‘마족의 마리오네트’가 된다고 설명했고.

하시스는 내 얼굴에 비낀 의문을 눈치챈 듯,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야 알겠지? 내가 지금까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내가 본 것들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어. 솔직히 내게 그 저주받은 눈만 없었다면, 애초에 그치들을 그쪽으로 의심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

“그런데 네가 그런 무서운 적을 상대로 죽음의 협곡에 가네 마네 하니까 답답하다는 거야.”

“잠깐만.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느낌이야?”

“말 그대로야. 살아 있는 인간처럼 혈색도 있었고 말도, 행동도 그냥.”

“…….”

“그냥 인간이었어.”

그게 가능해?

나는 경악과 함께 얼굴을 굳혔다. 하시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다시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니까 조심해. 알겠냐? 하여튼 손이 많이 가.”

“누가 손이 많이……!”

탁.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빠르게 대꾸했다. 그러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시스는 아예 방을 나가 버렸다.

덕분에 내 말은 허공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게 탐탁잖아 한참 방문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생각을 돌렸다.

‘흐음. 인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라.’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흑마법사를 이해하려 노력해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이를 그렇게 부활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만약 하시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얼굴을 살짝 굳혔다.

솔직히, 동기를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이해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펜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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