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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8화 (78/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8화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까?”

“대부분 시간은 잠들어 계시지만, 가끔 깨어나서 중요한 국정을 보시거나 나와 대화도 하셔. 어제도 그랬고.”

“……그렇군요.”

“이거, 어마마마가 전해 주라고 한 거야.”

그렇게 말하며 소매 속에 넣어 두었던 머리 끈을 내밀었다.

사실 원래라면 이 머리 끈을 알고 있냐고 물어볼 예정이었으나, 나는 일부러 ‘내’가 이 머리 끈이 그의 것임을 확신한다는 듯 굴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 끈을 보자마자 세베르의 얼굴에 적나라한 동요가 나타났다.

이 동요는 무슨 뜻일까. 나는 그의 표정을 세세하게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대공의 것이 맞지? 어마마마도 조금 긴가민가한 듯한데.”

“……맞습니다.”

역시.

나는 생긋 웃으면서 머리 끈을 그에게 넘겼다.

당장 이 머리 끈을 대체 왜 갖고 있었는지, 그 의도를 말하라고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에슈트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설사 내가 지금 에스트리아라고 해도 물어볼 수 없었을 거다.

세베르는 머리 끈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마치 보물을 손에 쥐듯이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을 보던 나는, 문득 그 머리 끈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을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세베르의 얼굴은 얼핏 보면 딱히 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오른 것 같았다.

왜?

아니, 애초에 미소가 맞나?

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치 떠보듯 그에게 물었다.

“이거, 어마마마가 그랬어. 예전에 어마마마가 준 것이라고. 진짜야?”

“네, 그렇습니다.”

“신기하네. 되게 오래전에 거 같아 보이는데, 왜 아직도 갖고 있어? 되게 비싼 거야?”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주스를 홀짝거리면서 물었다.

세베르는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하더니 쓰게 웃었다.

그 실소의 함의는 무엇인가.

“아닙니다.”

“그럼?”

“폐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거짓말. 나는 그걸 선물로 준 적이 없어.

내가 한 것은 그저 그 머리 끈으로 크지도 않은 상처를 묶어 버린 것밖에 없었는데.

나는 문득 저번 시치프 숲에서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나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그가 싫어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때는 그저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넘겼던 것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별거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 머리 끈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갑자기 그가 궁금했다.

분명 그날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나를 보던 그의 그 경멸에 가득 찬 눈동자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딱히 슬프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가 내 명령을 거역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가 나를 경멸하는 것도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경멸에, 나 또한 그를 향한 경멸로 갚아 주었다. 이것은 공평한 미움이었다.

나는 그만 속으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공평한 미움이라는 게 어디 있는가. 마치 그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미워하게 된 것 같지 않나.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베르가 조심스럽게 머리 끈을 자신의 코트 안쪽에 넣는 것이 보였다.

그걸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보는데, 갑자기 세베르가 내게 물었다.

“한데, 이건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역시, 이걸 물어볼 줄 알았어.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세베르의 성정상 당연히 이런 게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면 의문부터 품겠지.

애초에 나 또한 묻고 싶었던 문제가 있지 않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어마마마가 나를 보낸 건, 이걸 대공한테 주라고 한 것도 있지만 물어볼 것도 있다고 해서야.”

“말씀하십시오.”

“최근에 죽음의 협곡으로 간 적이 있어?”

“……죽음의 협곡, 말입니까?”

“응, 죽음의 협곡.”

“아니, 가지 않았습니다. 한데 왜 그걸 여쭈시는 겁니까? 설마…….”

물음을 던진 세베르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곧바로 이마를 짚었다. 그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내가 입을 열었다.

“이거 얼마 전에 마탑에서 보내온 거야. 이게 죽음의 협곡에서 발견되었대.”

세베르는 그제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아차린 듯했다.

동시에 ‘내’ 의도도.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내게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그건 모르겠어. 나는 그냥 어마마마의 뜻에만 따르니까.”

“…….”

“그냥 나한테 대공에게 물어보라고만 했어. 혹시 최근에 죽음의 협곡으로 간 적이 있는지.”

“없습니다.”

“응. 그렇구나.”

기왕이면 더 깊게 묻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예닐곱 살짜리가 그와 내막을 다 안다는 듯이 대화를 하는 것도 수상쩍을 게 분명했다.

이런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이의 몸이라서 그런지 세베르가 다소 경계를 푸는 것은 이득이었다.

‘그럼 이제 확인할 것도 거의 다 확인했으니.’

나는 세베르를 힐끔 보고 소파에서 내려갔다. 그러자 세베르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갈게.’라고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그가 말했다.

“전하.”

“응?”

“아까 폐하께서 깨어나셨다고 하신 듯한데.”

“아…… 맞아.”

“하면 폐하의 상태는 호전되고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멈칫했다.

그저 황녀인 내가 ‘황제’에게서 머리 끈을 받아 심부름까지 오게 된 상황을 해명하려고 대충 둘러댄 말인데 그가 이것을 신경 쓸 줄은 몰랐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생각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호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더 위독해지신 것 같지는 않아.”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세베르는 옅게 웃었다.

그것은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짜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기 그지없는 그 표정에는 에스트리아가 위독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말없이 방을 나갔다.

* * *

“세베르, 생각보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닌가?”

“…….”

그날 오후. 셀라가 가져다준 쿠키를 오독오독 씹던 나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정작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것은 하시스의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생물을 바라보듯이 입을 딱 벌렸다.

“와, 정말, 너, 너.”

그에 괜히 기분이 나빠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작 하시스는 정말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진짜 대단하다.”

“말 똑바로 해.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아니…… 그걸 이제야 알았다고?”

하시스의 말에 되레 어처구니없어진 것은 나였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뭘 알아. 세베르는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무슨 이유. 척살당하기 전에 미리 적들을 척살한 거? 아니면 황위에 오른 거?”

“둘 다 문제야. 세베르는 절대 그런 걸 용납할 성정이 아니야. 난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 왔어.”

“어렸을 때부터 뭘 봐 왔는데?”

하시스가 시큰둥하게 내게 물었다. 나는 쿠키를 다 입 안에 밀어 넣고, 우물우물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그냥 봐 왔어. 세베르는 정의롭지 못한 걸 진짜로 싫어해. 그는 검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도 싫어하고, 권력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도 싫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누구보다도 황실에 충성했어. 그런데 내가 그 황실을 완전히 망가뜨렸잖아.”

“듣고 보니 확실히 너를 싫어할 만한 이유가 가득하군.”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는 않지. 당사자 입으로 너를 싫다고 하는 말을 들었냐?”

그 순간 나는 얼굴을 살짝 굳혔다. 나는 손에 든 쿠키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하시스를 향해 말했다.

“그래. 들었어.”

“뭐?”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하시스가 눈을 크게 떴다. 곧 그가 이마를 짚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쩐지. 꼬여 있더라니.”

“뭐가 꼬여 있다는 거야?”

나는 뱁새눈을 하며 하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하시스가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로 켈리어드 대공의 진심을 알고 싶냐?”

“아니, 뭐 그렇게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야.”

이건 사실이었다. 내가 세베르의 진심을 알아서 뭘 할까. 오히려 그가 알고 보니 나를 그리 증오하지 않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하시스는 딱히 내 대답을 진심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타이르듯 말했다.

“꼬여 버린 인간관계를 푸는 특별한 방법은 별거 없어.”

“뭔데?”

“대화.”

그의 표정이 하도 진지해 저도 모르게 반문했던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물론, 대화로 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관계도 있기는 해.”

“알면서.”

“하지만 너희는 절대 아니야. 왜냐하면 너희는 애초에 대화라는 걸 해 본 적이 없거든.”

“…….”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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