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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7화 (77/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7화

리건은 내 물음에 잠깐 미간을 좁혔다.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본 적 없습니다. 그냥 흔한 머리 끈 아닙니까?”

“알았어.”

“그냥 죽음의 협곡에 흘러 들어간 쓰레기 아닐까요? 별로 특별한 머리 끈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그렇지?”

말을 마친 리건은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사리진 곳을 쭉 응시했다. 그러다 의자에서 내려와 방을 나갔다.

* * *

집무실에서 나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중앙기사단이 있는 연무장이었다.

이 며칠 동안 고민을 해 보았으나 대체 왜 이 머리 끈이 그 죽음의 협곡에 있었는지, 나는 도저히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여러 가지 가설 속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차라리 세베르에게 이것을 보여 주고 반응을 얻는 것이 더욱더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게 직접 돌려주는 것은 별 의미 없었다.

그전에 나는 몇 가지 조사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연무장으로 직접 가는 이유였다.

“안녕?”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기사들이 다소 놀라운 얼굴을 했다.

언뜻언뜻 보이는 익숙한 얼굴의 기사들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어, 필론 경이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응! 아, 테넷 경도 있었군.”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때 고개를 돌리던 나는 테넷 경의 뒤에서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나를 보고 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누구보다 기대하는 듯 그가 나를 향해 예를 먼저 취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리 기사단에 왕림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오랜만이야. 재스민의 남자 친구.”

“…….”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테넷이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에 예를 취하던 기사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흘렀다. 나는 다시 웃었다.

“농담이야, 이슨 경.”

“황녀 전하의 언변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나는 이슨 경의 모습에 왜 아일린 테넷이 그렇게 그의 말에 꼬박꼬박 답해 주는지 깨닫고 말았다. 놀리는 맛이 꽤 괜찮은 친구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주변을 훑었다.

“지금은 휴식 시간 아니야? 왜 다들 연무장에 나와 있어.”

지금쯤이면 점심시간이 아직 지나지 않아 가볍게 휴식을 취해도 좋은 시각이다.

필론 경이 온화하게 대답했다.

“비록 점심이긴 하나, 저희 제1분단은 언제나 평소보다 빠르게 집합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

“한데 황녀 전하,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시녀도 없이.”

“나 원래 시녀 없이 잘 다녀. 그것보다…… 혹시 켈리어드 대공 있어?”

“켈리어드 대공 전하라면 아직 복귀하지 않으셨습니다. 점심에 잠깐 원로원에 다녀오신다고 하셔서.”

전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내 목적은 세베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야. 그냥 어마마마의 심부름 때문에 잠깐 전해 줄 게 있어서.”

“심부름?”

“응. 대공이 저번에 어마마마를 알현할 때 떨어뜨린 물건이 있어서, 그걸 가져다주려고.”

“그런 건 시녀를 시켜도 되셨을 텐데요.”

“내가 졸랐어. 기사단 구경을 하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일부러 샐쭉 웃었다.

아무도 내 대답이 딱히 이상하다고 느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께서 기사단 쪽으로 걸음을 하신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응. 그동안 그냥 어마마마의 궁에만 있었어. 어마마마가 위험하다고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했거든.”

거짓말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슬슬 느는 것 같다.

설마하니 이러다가 나 혼자도 헷갈리는 거 아니겠지.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나는 기사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레스의 소매 안에서 익숙한 감촉의 부드러운 끈을 만진 나는 그것을 살짝 풀어 바닥에 던졌다.

“어?”

반응은 꽤 순식간에 왔다. 우리 뒤를 따르던 기사 한 명이 끈을 발견한 듯이 먼저 입을 뗐다.

“저거…….”

“아, 내가 가져온 거야!”

“단장님 검에 매어져 있던 머리 끈 아니야? 어쩐지 요즘 보이지 않더라니.”

어?

나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기사들이 알아보자 당황하고 말았다.

‘이 많은 사람 중에 한 명 정도는 우연이라도 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뭐야, 다 알고 있어? 심지어 검에 달고 다녔다고?’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가 이것을 검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내 앞에서 일부러 하지 않았다는 건가? 왜?’

나는 조금 기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세베르가 이것을 갖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심지어 검에 달고 다녔다는 사실이 나를 이상한 감각에 휩싸이게 했다.

나는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럼, 언제부터 이 머리 끈이 안 보이기 시작했는지 알아?”

“글쎄요. 단장님의 보좌관님이 이것 때문에 연무장을 한 번 뒤집듯이 수색을 했는데, 그게 아마 사냥 대회 닷새 전이었나.”

“아니, 그런데 원로원 회의 때 자기 부주의로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폐하께 있었던 거야?”

“그럴 수 있지 뭐. 헷갈리셨겠지.”

기사들의 대화에 나는 문득 짚이는 뭔가가 있어 얼굴을 찡그렸다.

“원로원 회의 때 잃어버렸다고?”

“네. 원로원 회의실은 무기 소지가 절대 불가능하니 잠깐 검을 보좌관에게 맡겨 두었는데, 그때 잃어버렸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원로원의 회의실이 있는 층은 원로원에 참석하는 가주들과 그 보좌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국사를 논하는 곳이니만큼 기밀 유출에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세베르의 성정상 검을 멀리 떨어뜨려 놓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그것을 들고 회의실이 있는 층까지는 갔을 테고.

그렇다는 것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는 가문들 중 누군가가 이것을 가져갔다는 것이군.’

그렇다면 역시 누군가가 이것을 훔쳐서 내 손에 들어오게끔 수를 썼다는 건데.

그 과정을 실제로 행동에 옮긴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목적도 없는 다른 가문에서 이것을 훔쳐 갔을 리가 없었고, 그렇다면 역시.

‘나를 어린애로 만든 범인이 마탑에 있는 첩자에게 주어서, 내 손으로 들어오게 유도했나?’

게다가 검에 차고 다녔다면 이것이 세베르의 것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는 뜻이다.

최근에 잃어버린 거라면 죽음의 협곡 폭발 당시에 떨어뜨렸을 리도 없다.

‘게다가 나도 의심을 하긴 했으니까.

그나마 내가 세베르를 잘 알아서 망정이지.

‘애초에 훔친 인간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겠지.’

범인은 그저 세베르의 검에 묶여 있어 모두가 주인을 아는 빨간색 천 정도로 인식하고 훔쳤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검에 묶고 다녔다면 죽음의 협곡으로 갔다가 끈이 풀려서 떨어진 것이라 몰아세우기도 딱 좋았다.

때마침 눈에 띄던 빨간색 천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에서도 인식을 할 것이고.

‘그런데 진짜로 이걸 검에 묶고 다녔다고? 왜?’

나는 애써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이리저리 가능성을 대 보았다. 하나 딱히 그럴싸한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 단장님?”

나는 필론 경의 물음에 괜히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세베르가 서 있었다.

“황녀 전하?”

세베르는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꽤 놀라운 듯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기왕이면 이 머리 끈이 대체 뭔지 아느냐고 기사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세베르가 등장한 이상 별 의미가 없었다.

“황녀 전하께서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어마마마의 심부름이야!”

“폐하께서……황녀 전하께 심부름을 시키셨다고요?”

“응!”

내 대답에 세베르는 석연찮은 얼굴을 했다.

확실히 일반적으로 황제가 황녀에게 심부름 따위를 시키지는 않는다. 실제로 나는 평소에 자잘한 일은 리건에게 맡겨 왔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직접 올 필요가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원래는 리건이 와야 하는데 내가 연무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졸랐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오게 됐어!”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과연 세베르는 갑자기 찾아온 어린 황녀에게도 예를 차렸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세베르와 함께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꽤 깔끔했다. 애초에 대부분의 업무를 대공저에서 보는지 딱히 서류나 책이 많지 않았다.

곧 세베르의 보좌관인 펠릭스가 내게 주스를 따라 주었다.

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는 처음 보는 그가 은근히 신기하다는 눈빛을 했다. 하긴 그럴 만했다.

꽤 오랫동안 세베르의 보좌관이었던 그는 내 어린 시절을 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곧 펠릭스가 방에서 나갔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태연하게 주스를 홀짝거렸다.

그러나 내 시선은 계속해서 바쁘게 주스 잔 너머의 세베르에게 닿았다.

세베르는 딱히 재촉하지 않은 채 내가 주스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나는 주스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활짝 웃으면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온 건 어마마마가 전해 주라고 한 게 있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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