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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6화 (76/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6화

별나다.

그것이 에스트리아가 들은 리건에 대한 첫 번째 평가였다.

그 뒤로 에스트리아는 한동안 리건 델멘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았다.

그런 그녀가 정식으로 그를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델멘 공작가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했을 때였다.

한때 업신여겼던 막내 황녀라는 사실과 별개로 델멘 공작은 어떻게든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생일 파티에 에스트리아를 초대했다.

그녀 또한 델멘 공작이 탐탁지 않았던 것과 별개로, 어쨌든 그의 가문의 조력이 필요했으므로 초대에 응했다.

당연하지만 델멘 공작이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그의 자랑이자 긍지인 제 딸 아이리스였다.

그 뒤로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둘째 딸까지 나왔으나 그 막내아들은 없었다.

그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파티에 참석한 에스트리아는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나온 곳에서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누구지?”

테라스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밑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완전히 책에 집중하고 있는 청년은, 델멘 공작가 특유의 잿빛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에스트리아는 천천히 테라스의 작은 계단을 통해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에 책에 집중하고 있던 청년이 기척을 듣더니 고개를 들었다.

“리건 델멘?”

“……황제?”

“흐음.”

에스트리아의 부름에도 리건의 얼굴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나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그녀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례하군. 황제를 그리 부르면 안 된다.”

그러나 에스트리아의 목소리에는 딱히 노기나 불쾌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은 리건의 손에 들려 있는 책에 닿았다.

그녀는 그 책을 알고 있었다. 황실 서고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르시스의 초대 황제에 관한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에스트리아는 읽기를 포기했다.

그녀의 스승 역시 이 책은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서도 어렵기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한데…… 그런 책을 홀로 읽다니.

‘델멘 공작가의 이들이 영특하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에스트리아는 잠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있나? 역사에 관심이 많아?”

“아니, 별로.”

“별로? 그런데 왜 읽고 있지?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데.”

“……그냥, 피곤해서.”

“…….”

“피곤해서, 그냥 쉬운 걸로 읽고 있었어.”

이걸?

에스트리아는 살짝 눈썹을 까닥했다.

그녀는 리건의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문득 이 청년의 눈빛이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공허하면서도 평온한 눈빛에는 적의도, 호의도, 의문도, 귀찮음도,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녀는 문득 일전에 엘비어츠 공작이 한 말을 상기했다.

‘천재라더니 설마.’

그녀는 엘비어츠 공작이 한 말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천재인데 별나다.

귀족가에서 원하지 않는 천재.

‘혹시, 감정 표현에 서툰가. 아니면 그 이상으로 인간과 교류하는 방법을 모르나?’

그런 것이라면 델멘 공작이 아들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귀족들은 황실과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눈치 빠르게 제 몫의 권력을 챙기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함정에 빠뜨리고 남을 견제하느라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판에서, 인간을 잘 모르는 고귀한 귀공자는 먹잇감이 되기 쉽다.

아니,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칫하다가는 가문의 수치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문제였다.

에스트리아가 더 묻지 않자 리건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딱히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여기서 그녀가 조금만 화를 내도 델멘 공작은 바로 그녀에게 사죄를 해야 함에도, 그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지, 아니면 인지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저 제 책에 골몰히 집중했다.

에스트리아는 모종의 의미로 저와 반대이면서 비슷한 이 청년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리건 델멘.”

그녀의 부름에 리건이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트리아가 곱게 웃으면서 말했다.

“일어나. 황제 앞에서 그리 앉아 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리건은 조금 망연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제야 이 청년이 저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수려한 얼굴을 가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존대도 해야 하고.”

“그렇습니까.”

“아까 전의 결례에 대해서 내게 사과를 해야지.”

“……송구합니다.”

“그리고?”

“…….”

“책에서 가르쳐 주지 않든가?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리건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입을 뗐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옳지.”

마치 강아지라도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이라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야 함에도 리건은 그저 조용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에스트리아의 입가에 피뜩 웃음이 스쳤다.

“황궁에는 재미있는 책들이 많아. 언제 한번 황궁에 방문하지 않겠나?”

“…….”

“델멘 경, 황제가 이리 말하면 그때는 그저 영광이라고 받는 거다.”

“영광입니다.”

“그래, 이제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낼 테니 그때 보지.”

그렇게 말한 에스트리아는 살짝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있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청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주일 뒤, 에스트리아는 진짜로 리건을 황궁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리건 델멘은 정식으로 그녀의 보좌관이 되었다.

* * *

“그때는 진짜 귀여웠는데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건지.”

집무실에 앉아 서류에 서명하고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에 옆에서 무더기로 쌓인 서류철을 정리하던 리건이 살짝 고개를 들고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정말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못나게 컸을까.”

리건은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대꾸했다.

“별걸 다 기억하십니다. 그것도 8년이나 지난 일을.”

“귀여웠으니까.”

“폐하는 징그러웠습니다.”

“…….”

“금방 즉위한 황제가 공작가의 막내아들에게 사기를 친 희대의 사건이었죠.”

“내가 언제 사기를 쳤어?”

“제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데려오셨잖습니까. 황궁에 있으면 귀족들의 생리를 익힐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익혔잖아. 지금 이 황궁에서 너보다 더 귀족의 생리를 알고 있는 녀석이 있어?’

나는 그만 어이없어 입을 딱 벌렸다.

리건은 인간관계에 취약하다기보다는 아예 그쪽으로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왜 예의라는 것이 존재하고, 왜 귀족들 사이에서는 말을 돌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교계에서 배척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괴짜에 별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게다가 말수가 적고 조용한 분위기는 그를 더욱더 거리감 있는 자로 보이게 했다.

그러다 보니 리건은 자연스럽게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사실은 그저 이해를 못 했을 뿐인데. 아무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고, 그저 해야 한다고만 강요를 하고는 이상한 취급을 했으니.’

물론 리건이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이 몇 년 동안 그는 보좌관으로서 딱히 문제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가끔 좀 깐족거리는 것을 빼면.

“어차피 머리는 좋으니까 인간관계나 대화법은 내가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내 물음에 리건은 전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네.”

그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뺀질거리는 귀족놈보다는 그냥 머리 좋고 잡생각이 없는 놈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클 줄이야. 이제는 익숙해져서 버리기도 힘들잖아.”

“폐하는 제가 보좌관인 걸 다행이라고 여기십시오. 상사가 펜을 던진다고 그걸 가만히 맞아 주는 사람이 어디 많습니까.”

“그건 네 반사 신경이 너무 느린 탓이야. 내가 펜을 던지면 요리조리 피해 갔어야지.”

나는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에 리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리건은 사람을 대하는 데 꽤 능숙해졌고, 최소한 내 앞에서는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초기의 그 맹한 모습도 좋았지만, 기실 지금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리건을 힐끔 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래도 널 가르친 건 나니까, 날 배신하면 난 울 거야.”

“그럼 끔찍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가 배신하면 울지 말고 그냥 저를 죽여 주십시오.”

“역시 그게 더 효과적이지? 내가 우는 것보다 널 죽이는 게.”

리건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옆에 놓인 서류를 전부 정리한 뒤 품에 가득 안고 내 앞에 섰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리건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묻듯이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빨간색 머리 끈을 내놓은 뒤 리건에게 물었다.

“이거, 죽음의 협곡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건데, 혹시 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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