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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5화 (75/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5화

“그런 것치고는 그리 슬퍼 보이지 않는데.”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거야 방법이 있겠죠.”

“일리안에게 뭔가를 시켰나?”

“역시 로드님은 눈치가 빨라요.”

“그럼 됐다.”

레르하겐은 그렇게 말하며 완전히 몸을 돌렸다.

더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바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조금 말을 고르다가 입을 뗐다.

“저는 꼭 범인을 잡아서 어른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꼭 살아남을 테니까.”

그때였다.

레르하겐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내게 등을 보였다.

“저는 절대 죽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제 성격.”

폭군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살아남은 나였다.

죄책감은 죄책감이었고,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살기 위해 저지른 짓이고, 그래서 살아간다.

“삶은 죽음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어요. 더 많은 기회를 가졌으니까.”

레르하겐은 내 말에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말없이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가 사라진 곳을 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마법사부터 족치고.’

싸움이 커져도 괜찮다.

판이 커지면 귀퉁이부터 조금씩 야금야금 해치우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다.

* * *

- 제가 죽는다면 이 모든 전쟁이 끝이 날까요?

- 아니, 끝나지 않을 거다.

- 하지만 저 하나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저는 죽을래요.

- 라세니타.

- 미안해요, 로드님. 저는 결국 로드님을 배신해야 하나 봐요.

에슈트의 방에서 나온 뒤 레르하겐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오늘 자신의 앞에 아른거렸던 그 광경을 상기했다.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그 긴 인생에서 유일하게 여한이 남는 일이 있다면 그 아이뿐이었다.

자신이 건 마법에 역으로 당해 버린 것이 다소 우습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그런 것이다.

그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 로드님.

자신을 부르던 그 차분한 음성.

- 이제 그만 나갈까요?

격앙됨 하나 없이, 충격 하나 없이 담담하게 자신을 향해 읊조리던 그 목소리가 그를 환각에서 구해 냈다.

‘저는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마치 저를 다독이듯, 저를 위로하듯, 나는 절대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해서, 레르하겐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죽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죽음도 삶보다 의미 있지 않으리라.

최소한 인간에게는.

* * *

이튿날 아침, 일리안은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친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뒤 느긋하게 앉아 그를 맞이했다.

“왔어? 그럼 어디 얼마나 밥값을 하는지 볼까?”

“우리 아가씨, 뒷골목 암흑 세력 보스가 되고 싶어? 그렇게 악당 같은 대사는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아.”

“헛소리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내가 시키는 건 잘했어?”

내 물음에 일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곧, 자신의 품에서 투명한 물이 든 병을 내놓았다.

“덕분에. 견딜 만했어.”

“그렇지? 성수가 쓸모없어 보여도 나름대로 예방 작용은 해. 나야 이미 아이가 된 뒤라서 성수를 병째로 들이부어도 쓸모가 없었지만.”

나는 내 앞에 놓인 병을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그것은 내가 며칠 전에 일리안에게 준 성수였다.

마족이 이미 소멸된 지 한참이 된 지금, 비록 성수는 흑마법을 퇴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외부의 공격은 적당히 막아 주었다.

일반 마법도 가능한데, 하물며 상극인 흑마법이야.

그리고 내가 이것을 일리안에게 준 이유는 간단했다.

“그 범인이 네가 마법의 감각을 쫓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어. 내가 범인이라면 죽어도 너와 만나지 않을 거야.”

“흐음. 뭐, 내가 아가씨의 편을 들지 않으면 모를까, 내가 아가씨 편인 이상은 역시 좀 그렇지?”

“헛소리하지 말고.”

나는 이 와중에 쓸데없이 웃음을 흘리는 일리안을 흘겼다. 그리고 한쪽으로 서랍을 열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러면 당연히 네게 손을 써 두겠지. 네가 사냥터로 나오지 못하게. 뭐, 자신이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될 일이긴 하지만, 어디 범인 마음이라는 게 그렇겠어? 어떻게든 목격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나는 일리안에게 미리 성수를 주어 혹시라도 있을 공격에 대비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역시 내 말대로, 일리안은 당일 아침에 조금씩 이상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미 성수를 조금 취한 상태였고, 나 또한 내 창고에서 독과 마법을 무력화하는 몇 가지 도구를 구해다 놓았기에 그래도 그리 큰 고통은 없었다.

“그리고 하시스더러 네가 아파서 못 왔다고 해 주면, 적은 당연히 네가 흑마법에 걸려서 사냥 대회에 오지 못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일리안은 모든 귀족들이 숲으로 들어간 뒤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모든 귀족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보았다. 내가 호수를 통해 귀족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면 자동적으로 그에게 전송되게 마법을 썼기에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마법의 감각은 비록 마법을 쓸 때만 감지할 수 있지만, 마법을 쓰고 한동안은 지속될 수 있어. 사냥 대회가 끝난 뒤에는 무리겠지만, 최소한 사냥 대회 중 마법을 쓴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겠지.”

“…….”

“범인은 죽어도 몰랐을 거야. 우리한테 역추적 마법을 거는 그 상황까지도 예상하고 너를 대기시켜 뒀다는 걸.”

상대가 흑마법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일리안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도 그는 이미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뭐, 흑마법을 몸에서 끌어내느라 회복 마법을 스스로에게 건 건 좀 많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목적을 달성했으니 다행 아닌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며 손에 든 서류 뭉치를 펼쳤다.

곧, 각 가문의 가주들의 초상화와 간단한 정보가 적힌 서류들이 책상에 흩어졌다.

“그러니까 이제 말해 봐. 네가 본 그 흑마법사가 누군지.”

나는 잔뜩 기대 어린 눈동자로 일리안을 보았다.

그러나 정작 내 물음에 일리안은 묘한 미소를 담고 내게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

그 눈빛에 걱정이 있어서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당연하지. 누굴 배신 따위에 충격받아 앓아눕는 멍청이로 보는 거야?”

“그런데 아가씨, 범인을 찾으면 바로 족칠 거야?”

“글쎄? 상황 봐서.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만 나를 다시 어른으로 되돌릴 수 있을 거야. 그 사람을 족쳤다가 자칫하면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수 있으니까, 신중하게 접근해야지.”

일리안은 내 말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가 내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 중 한 명을 짚었다.

그 순간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

“예전에 아가씨한테서 귀족들의 상황을 얼추 들은 적이 있어. 아무래도 누군가가 협조한 것 같지? 정황상?”

나는 조금 속이 울렁거려서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요동치는 속은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집무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읊조렸다.

“일단 잡을 건 잡고.”

“…….”

“그다음에 보자.”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애써 흥분과 감정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으나 그것 또한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알아챘을까, 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탓이 아니야.”

“…….”

“인간은 원래, 그렇게 욕망에 눈이 멀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 그의 다정한 음성도 나를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나는 결국 그렇게 긴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일리안이 조용하게 방을 나가고.

나는 결국.

결국.

방 안은 나지막이 흐느끼는 소리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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