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4화
나는 쓰게 웃었다.
참 지독하네. 아니, 우리가 먼저 썼으니 이번에 지독한 존재는 우리인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레르하겐은 무심하게 벽에 기대어 있었다.
하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해 있었다.
이제 대충 기본적인 것은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중요한 것을 물어볼 차례였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나는 침묵하고 말았다.
‘어떻게 물어보지? 그 여자가 누구냐고? 왜 나와 닮았냐고? 아니, 왜 죽었냐고?’
어느 쪽이든 전부 레르하겐의 마지막 표정 때문에 쉽사리 말을 뱉기가 힘들었다.
그때 본 레르하겐의 표정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여자는 누구예요?”
“…….”
“저와 똑같게 생긴, 로드님의 환각 속에 나왔던 그 여자.”
레르하겐은 내 질문을 예상한 듯싶었다.
그의 눈가에 서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뻐근하게 눌러 댔다. 왠지 모르게 물어보지 말아야 할 것을 물어본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르하겐이었다.
“라세니타는, 내 제자였다.”
“라세니타……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레르하겐의 제자라면 못해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법한데,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로드님의 제자라면 혹시.”
“내 첫 번째 제자였지. 그 아이와 나는 계약으로 맺어진 사제 관계였다. 아니, 사제 관계보다는.”
“…….”
“내가 그 아이를 키웠지.”
신기했다.
라세니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레르하겐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을 말하는 레르하겐의 얼굴은 전례 없이 평온해 보였다. 애정이 없다면 절대적으로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아이의 오라비는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그때는 제국이나 왕국이 그리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히지 않았을 때였다.”
“왕의 여동생인데 왜…….”
“그 오라비의 나라는 마족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졌고,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다. 그때는 겔라가 영면에 잠들고 천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라 내가 겔라 대신 종종 인간 세상을 둘러보았으니까, 그 오라비도 그러다가 알게 된 거고.”
“…….”
천 년밖에?
그럼 이 이야기는 대체 얼마나 오래전의 이야기인가.
주신 겔라의 정확한 영면 시간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얼추 그 뒤로 달력의 종류도 여덟 번 정도 바뀌었고, 현재의 달력은 827년까지 세고 있었다.
“그래서 키우게 되었다.”
“…….”
“그러다가 죽었지.”
“……왜요?”
“스스로 자결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러니까 레르하겐은 제가 키우던 아이가, 제 딸이 제 눈앞에서 자결한 것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그제야 그의 그 허망한 얼굴이 이해가 갔다.
아니, 오히려 그 허망한 얼굴마저도 약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그의 동요가 느껴졌다.
“어째서 자결했는지 알고 있나요?”
“……모른다.”
“…….”
“그 아이는 자신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아.”
“……세상을 구해요?”
다소 거창한 이유였다. 동시에 조금 비현실적이었다.
‘아, 그래서 내가 죽으면 슬퍼하지 말라고 했던 거였구나.’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얼마 전 내가 납치를 당했을 때의 레르하겐을 상기하고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설마 레르하겐이 그렇게 과하게 반응했던 게 그것 때문일 걸까?
하지만 나는 절대 다른 누구를 위해 죽지 않을 거다. 상하고 다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절대 죽지는 않을 것이다.
분위기가 더욱더 무거워졌다.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래서 저를 도와주신 건가요? 제가 라세니타와 똑같게 생겨서?”
“그런 셈이지.”
그럼 그런 거지 그런 셈은 뭐지.
“제가 왜 그 사람과 똑같게 생겼는지는 아세요?”
“글쎄.”
레르하겐은 진짜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라세니타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전에 그 사람을 꿈에서 본 적이 있어요.”
“……뭐?”
“일리안이 죽음의 협곡에서 온 그날, 제가 처음으로 직접 흑마법과 마주하게 된 그 날. 꿈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았어요.”
이쯤이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나는 분명 라세니타와 뭔가 관계가 있었다. 그 관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순간 고개를 들어 레르하겐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켜 버렸다.
별로 의미 없는 가설이었다. 설사 진실이라고 해도 가치가 없었다.
최소한 나한테는.
“저는 라세니타가 아니에요.”
그렇게 내뱉은 말에 레르하겐이 살짝 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혹시 헷갈리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예요.”
“헷갈릴 일 없다. 라세니타는 너와 생긴 것만 똑같지 성격은 완전히 달랐어.”
“제가 더 성격이 좋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농담이라도 하려는 건가?”
나는 레르하겐의 말에 칫- 입을 삐죽였다. 하나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뭐지.”
“제가 본 그곳, 혹시 죽음의 협곡인가요?”
이것은 그저 던져 보는 질문이었다.
나는 죽음의 협곡에 가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내 상상 속 죽음의 협곡은 아무런 생명체도 나지 않는 썩은 황무지였다.
분명 환각 속에서 본 그곳은 노을이 우아하게 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죽음의 장소치고 너무 아름답고 황홀한 곳.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이 죽음의 협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감일 뿐이었으나, 강하게 뭔가가 나를 찔러 오는 느낌이었다.
레르하겐은 내 말에 긍정했다.
“그래.”
“역시…….”
“…….”
“죽음의 협곡에 뭔가가 있는 것이 확실하군요.”
내가 흑마법으로 아이가 된 순간부터 나는 죽음의 협곡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죽음의 협곡과 지나치게 얽혀 있지 않은가.
일단은 일리안이 그곳에서 왔고, 심지어 세베르에게 주었던 머리 끈도 발견됐다. 지금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레르하겐의 첫 번째 제자가 죽은 곳이자 꿈에서 본 그 장소였다는 거다.
물론 머리 끈은 다른 이의 모함일 가능성이 크지만.
‘죽음의 협곡에 한번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나 나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레르하겐이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곧 우리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일단은 뭐가 뭔지 생각을 해 볼게요. 일단 우리의 임무는 흑마법사를 찾는 것, 그리고 제가 어른으로 돌아오는 것이니까요.”
“그래.”
“다만…….”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다만.
“이쯤 되면, 단순히 흑마법사나 정치적인 문제는 아닌 거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아마도.”
“역시 그렇죠?”
왠지 모르게 일이 자꾸만 커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일이 커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커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진정한 배후가 있다는 걸까요.”
“굳이 그렇게 고민을 해 보지 않아도 된다.”
“무슨 소리예요?”
“흑마법사의 배후는 마족이다. 그리고 마족의 배후라면-.”
“마왕, 카렌이요?”
그러나 정작 말을 내뱉으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신화서에나 있는 존재의 이름을 내뱉기는 했으나 딱히 현실성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더 현실성이 없는 레르하겐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레르하겐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다.”
“하아. 뭐가 됐든 골치 아파지겠네요. 일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설사 그런 배후가 있다고 해도, 저를 노리는 건 필시 귀족 중 누군가일 테니까요.”
일단은 작은놈부터 쳐 내고 최종 악당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역시…… 죽음의 협곡으로 가야 하잖아. 거기에 가장 큰 단서가 있으니까.’
모든 것이 죽음의 협곡과 강하게 얽힌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을 바꾸어 보아도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럼 역시 답은 하나인 걸까.’
레르하겐은 내가 더 캐물을 생각이 없는 듯하자 살짝 몸을 돌렸다.
“이제 다 물었나?”
“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예정이지? 오늘 계획은 실패했고, 너는 결국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했다.”
“아.”
“또 한 번 더 모을 건가?”
“그것도 한 번이지, 너무 자주 하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오늘 실패로 인해서 아마 적은 이미 우리가 자신을 노린다는 걸 눈치챘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