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3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그녀가 내 꿈에 한 번 나온 적이 있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내가 처음으로 흑마법을 두 눈으로 본 그날, 일리안이 내 방으로 떨어진 그 날, 나는 정확히 저 여자를 꿈에서 보았다.
‘저 여자는 뭐지?’
나는 일단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보통 환각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꽤 중요한 존재였다.
최소한 그가 실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벗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하게 서 있던 여자가 갑자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왜냐하면 고개를 든 여자의 망토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나와 심각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닮았다는 말로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아예 내 본모습, 그러니까 에스트리아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뭐야.’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지? 물론 하늘 아래 똑같게 생긴 인간이 한둘 정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너무 말도 안 되잖아?
‘설마 일부러 또 무슨 함정을 파서 심리적으로 내게 덫을 놓으려는 수작인가. 아니 이 새끼들, 진짜 고약하게 구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저 여자가 누군지부터 알아보아야 했다. 그래야 이곳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천천히 접근하던 그때, 갑자기 펄럭거리는 망토를 걸친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역시 돌고 돌아 협곡만이 제 안식처가 되나 봐요.
- …….
- 제가 죽으면 슬퍼하지 마세요. ……저도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요.
‘협곡? 죽어?’
나는 미간을 좁혔다.
여자는 마치 누군가를 향해 읊조리고 있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여자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그때, 놀랍게도 레르하겐의 모습이 시야에 안겨 왔다.
‘어, 로드님?’
그 순간 너무 반가워서 나는 하마터면 그를 크게 부를 뻔했다.
환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레르하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부르려던 찰나였다.
푹-.
“어?”
갑자기 짙은 혈향이 나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내 앞에 있던 여자가 그대로 쓰러졌다.
“……!”
허공에 화려한 핏방울이 새겨졌다. 마치 그대로 허공에 수놓아지듯 점점이 흐르는 것은 인간의 생명력, 그 위로 흐트러지는 것은 석양빛을 머금은 금발.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레르하겐?’
레르하겐의 허망한 표정.
그것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다.
비록 오랜 시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그치고는 꽤 다양한 표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하나 그중에서 가장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무력함이었다.
‘말도 안 돼, 무력함이라고?’
그 레르하겐이?
나는 입매를 굳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앞에 있는 레르하겐이 환각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진정한 레르하겐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보여 주는 그 짙은 허무함과 무력감에 갑자기 내 심장이 조여 왔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침착하게 그를 불렀다.
“로드님.”
그와 동시에, 거짓말같이 레르하겐이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에슈트?”
레르하겐의 표정이 다시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왔다. 하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혼란이 남아 있어서, 나는 기묘한 감정으로 꽉 찬 그의 시선을 보다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기서 뭐 하세요?”
“그러는 너야말로.”
“환각에 갇혔어요.”
“…….”
“이곳은 로드님의 환각인가요?”
환각은 죽어도 자신이 환각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마법에 걸린 이가 이곳이 환각임을 인지하고 바로 빠져나가니까.
만약 그가 진정한 로드라면 이곳이 환각임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환각이라고 생각했더라도, 내가 묻는 순간 그는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똑똑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레르하겐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곧, 그가 답했다.
“그래.”
그에 내가 방긋 웃었다.
“이게 그만 나갈까요?”
레르하겐은 내 말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대꾸했다.
“그러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주변의 풍경이 와장창 깨졌다.
우리는 사냥 대회가 열리는 시치프 숲으로 돌아왔다. 아까 호숫가 나무에 묶어 놓은 말이 푸르릉 울고 있었다.
레르하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입매를 굳히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숲을 나왔다.
* * *
사냥 대회는 무사하게 막을 내렸다. 가장 많은 사냥물을 잡은 샤트 공작에게는 예정대로 보석이 하사되었다.
진짜로 보석이 탐나긴 했는지 샤트 공작은 입이 째져라 웃고 있었다.
그 옆에서 엘비어츠 공작은 멧돼지를 잡지 못했다고 한참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꽤 많은 사냥물을 잡았는지라 나는 그에게 성의 없는 박수를 쳐 주었다.
놀랍게도 가장 사냥물을 적게 잡은 것은 델멘 공작이었다.
젊었을 적 꽤 사냥을 했다고 하던데 운이 안 좋았나. 그것을 증명하듯 델멘 공작의 얼굴에는 탐탁잖은 기색이 역력했다.
사냥 대회를 마치고 우리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사냥은 잘 마쳤어?”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일리안이 넉살 좋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냥 대회는 성공이었고, 사냥은 실패했어.”
“저런.”
“너는?”
“나? 나야 뭐…….”
“…….”
“언제나 잘했지? 뭐든?”
그 말인즉슨 내가 시킨 건 누구보다도 잘했다는 것이다. 그에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지금 바로 말해 줘?”
그러나 일리안의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일단 좀 쉴래.”
“아. 그럴래?”
“내일 오전 내 놀이방으로 와. 알지?”
일리안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쉬겠다는 말과 달리 나는 레르하겐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리고 로드님은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저한테 할 말 있잖아요?”
레르하겐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챈 듯, 잠시 얼굴을 굳히고 대꾸했다.
“그래.”
대화의 장소는 자연스럽게 내 방으로 정해졌다.
나는 셀라에게 취침 준비는 나 홀로 할 테니 굳이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럼 평안한 밤 되세요.”
셀라는 밤 인사를 건넨 뒤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방 안이 침묵에 잠겼다.
나는 레르하겐의 얼굴을 빤히 보다 입을 뗐다.
“물어볼 게 지금 너무 많으니까 하나씩 물어볼게요.”
“그래.”
“일단, 왜 저희가 갑자기 환각에 빠진 거죠?”
“역추적 마법이다.”
“역추적 마법이라면 제 추적 마법에 기반해 저희의 위치를 알아낸 건가요?”
“그래.”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듯, 레르하겐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단순한 역추적 마법이 아니었다. 내가 걸었던 마법에 흑마법까지 더해서 자신이 느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한 거다.”
“그러니까 로드님이 건 마법은 단순한 환각 마법이지만, 저희가 당한 건 거기에 흑마법이 더 추가되었다는 건가요?”
“그래. 아마도 극악의 선택까지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던 듯한데.”
어쩐지.
왜 내게 몇 번이나 죽으라고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긴 했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면 저도 모르게 검을 들어서 찔렀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환각 마법은 보는 것만 환각일 뿐 하는 행동은 현실로 이어진다.
내가 거기서 스스로를 찔렀다면 아마도 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로드님이 건 환각 마법의 내용이 뭔가요? 환각 마법은 대체적으로 특정된 내용이 있잖아요.”
그러나 내 물음에 레르하겐은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답했다.
“절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 그게 환각의 내용이었다.”
그 순간 그의 벽안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속에서 괴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입을 꼭 다물었다.
‘어쩐지 그딴 것을 보더라니.’
사실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절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지나온 모든 과거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것들이 파편화되어 내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