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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2화 (72/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2화

왜, 어째서, 어째서 그는 죽을 때까지도,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이리 굴었을까.

어째서, 나는 이렇게 가증스럽게 그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을까.

어째서.

‘아.’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실체가 있던 공간이 갑자기 흐트러지고, 나는 그대로 어둠에 던져졌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이곳에 있지?’

순간 나는 마치 내가 미궁 속에 던져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의 그것은 무엇이었지. 속으로 생각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속삭였다.

[도와줄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읊조리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의 실체를 밝혀내고자 움직였다.

그러나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그대로 옥죄었다.

“윽.”

[벌이다.]

“벌?”

[그래, 벌. 네 형제자매를 죽인 죄에 대한 벌.]

“…….”

[그 벌로 너는, 영원한 고통과 죽음에 갇히게 되는 거야.]

“…….”

[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것이 아닌가? 모두가 죽고, 너마저도 무로 돌아가는 것. 어차피 모두가 너를 버렸잖아. 안 그래?]

“…….”

[어차피 아무도 너를 반기지 않아. 오죽하면 아이가 됐겠어. 안 그래?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이나 당하다니, 정말 가엽기도 하지.]

아이가 됐다고?

그 순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렴풋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히는 듯해서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래, 맞아. 나는 아이가 됐었어.’

왜 갑자기 아이가 되었지?

아니 그전에,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무엇인가가 나를 자꾸만 건드려 대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더욱더 찡그렸다.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내 앞에 떨어졌다.

[이걸로 네 스스로를 베라.]

응?

[그럼, 모든 것이 끝날 거야. 너를 강하게 옥죄는 모든 고통이, 그리고 너를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그리고 지금까지 너를 고통스럽게 했던 모든 감정들이 사라지고, 너는 죽음으로서 구원받을 수 있어.]

나는 조용하게 내 앞에 놓인 검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검을 향해 다가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구속하듯 옭아매는 듯한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앞에 놓인 검은 다름 아닌 내가 아까 전 그들을 벨 때 쓰던 그 검이었다.

[네 검이야.]

‘…….’

[그 검으로 속죄하라. 너만 죽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냥 죽어.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나를 향해 지시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래, 그렇게. 그렇게 네 목을 향해 찔러 넣는 거야.]

나는 천천히 검날을 내 목에 겨냥했다. 그리고-.

“하. 진짜 저질스럽다더니, 로드님의 말이 맞네.”

나는 그대로 손에 들린 검을 반대 방향으로 고쳐 쥐고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앞을 향해 그대로 찔렀다.

푹. 땅에 막힌 검이 그대로 파스스 사라졌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어쩐지, 역시 거짓이었구나.

하긴, 내가 진즉에 없애 버린 검이 여기서 나타날 리가 없지.

“수단 좀 바꾸면 안 되나?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아? 안 그래도 저번에 환각 따위에 당해서 짜증 나는데 또 같은 수법을 쓰다니 날 얼마나 같잖게 봤으면.”

[…….]

“됐고, 나를 자결시키려고 했다는 데서 너는 이미 끝났어.”

사실 처음부터 뭔가 이질적이긴 했다. 과거의 영상이야 그저 내가 겪은 것이라고 해도, 마지막 아바마마와의 장면은 뭔가 이상했다.

“아바마마는 내가 오자마자 검을 빼 들었어. 그리고 내 목에 겨누었지. 뭐, 너는 모르는 것 같지만.”

진심을 담은 공격이라는 것은 나도, 그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굳이 피하지 않았고, 그저 그의 검날을 그대로 받아 내며 그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총소리가 울렸다.

“내가 슬펐다는 건 인정하겠어.”

[…….]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누군가가 내 목에 검을 겨누는 상황에서 눈을 감고 죽기를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야. 그럴 거면 검을 들지도 않았어.”

예전에 세베르가 그랬다. 검을 든 순간 상대의 검에 죽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검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죽는 것과는 다르다고.

그래, 달랐다.

하나는 싸우다가 죽는 것이고 하나는 반항을 포기하다 죽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누구보다도 나약하고 겁쟁이였고, 그래서 진짜로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황궁을 멀리하고 싶었을지언정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죽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약하고, 멍청하고, 겁이 많고, 한심했지만 그래도 비겁하지는 않았으니까.

“저지른 일이 있는데 어디서 비겁하게 죽음 따위로 끝을 내겠어?”

내가 고통을 받은 것도 참이고, 내가 악을 저지른 것도 참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징벌은 살아서 그 모든 고통을 안는 것이다.

한 번뿐인 삶이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살아서 그 죗값을 치러야 하고, 잘못한 것이 없으면 더더욱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절대 안 죽어. 대체 무슨 환각을 어떻게 만들어서 내 앞에 보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 통해.”

내 말에 목소리는 답이 없었다. 나는 턱을 들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아. 넘어지면 거기서 일어나야지 더 지옥으로 추락할 수 없어.’

일전에 레르하겐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절대 정신 공격에 먹히지 않을 거라고.

그건 내가 정신적으로 단단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이미 그것을 한 번 당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 무수한 실패를 겪으면서 유일하게 터득한 스킬이란, 최소한 한 번 틀렸던 것은 다시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도 딱히 같은 수법에 걸렸던 적은 없잖아? 그들이 자꾸만 방법을 바꾸어 내게 접근하는데 어떡해?’

괜히 변명하듯 한마디 했으나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환각 마법에서 ‘암시’란 딱히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죽음으로 몰려는 암시는 또 처음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실패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환각 마법에 대항하는 방법은 한 가지야. 내가 환각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

그리고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염원.

다행히도 내 생각이 통했던 걸까.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나를 감싸던 검은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창문에 금이 가기라도 하듯,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주변이 조각조각 갈라지기 시작했다.

챙그랑!

유리의 파열음과 함께 눈앞에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노을이 근사한 풍경이 나타났다.

‘여긴…….’

겨우겨우 환각에서 나왔더니 이번에는 또 어디지?

혹시 이중 환각인가? 흑마법사놈들은 확실히 정신 공격을 잘하는 편이니 이중 환각을 만들어 나를 다시 가두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어떤 협곡의 위쪽이었다. 아래를 보자 마치 그대로 추락할 것같이 아찔했다.

‘일단 이곳이 실존하는 곳인지 확실치 않아. 허구일 수도 있어. 아까 전의 어둠처럼 그저 대충 만들어 놓은 곳일 수도 있지.’

젠장. 이래서 정신 마법은 귀찮아.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단순히 역추적 마법에 걸린 게 아니라 레르하겐이 아까 전 썼던 마법까지 완전히 되돌려 받은 듯했다.

‘일리안이 떨어진 날에도 내가 한 공격을 복사해서 내게 써먹더니, 흑마법사 놈들은 결국 이런 것밖에 할 줄 모르나. 치졸하고 나약해.’

아무리 대단한 흑마법사라도 인간 따위가 레르하겐의 마법을 그대로 무효화시킬 수는 없으니, 차라리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반사한 듯했다.

물론, 그 반사 과정에 흑마법을 약간 섞은 듯했지만.

‘그런데 대체 환각의 내용이 뭐지?’

사실 환각 마법은 평범한 공격 마법과 조금 달랐다.

공격 마법에 대항하는 방법이 더 강한 마법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면, 정신 마법은 걸린 사람의 의지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 의지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환각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

‘근데 나는 이곳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 왜 벗어나지 못하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갑자기 새빨간 무엇인가가 펄럭거렸다.

‘어? 저 여자는.’

노을빛이 우아하게 퍼지는 협곡의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새빨간 망토를 입고 금발을 펄럭거리는 여자는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고요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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