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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1화 (71/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1화

나는 저도 모르게 망연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마치 내 마음속 깊숙이에서 누군가가 시큰둥하게 읊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내가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가 포크를 들었을 때, 주변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괜찮겠느냐.”

그곳은 다름 아닌 내 궁의 복도였다.

커다란 창문 앞에 열일곱의 내가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더없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엘비어츠 공작이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이날을 기다려 왔어요.”

“에스트리아.”

“내게, 이것 말고 선택지가 있나요?”

내 물음에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에 덩달아 씁쓸한 미소가 서렸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거사를 앞둔 우리를 비난하기라도 하듯, 창밖에서는 폭설이 펑펑 쏟아지며 땅을 온전히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트리아? 네가 여기 웬일이냐? 갑자기 내 궁으로 찾아오고? 손에 든 건 뭐냐, 검? 나한테 그것을 주려고 온 거냐?”

시작은 셋째 오빠부터였다.

갑자기 내가 찾아온 것이 이상했는지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빼 들 무렵에야,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야.”

하나 이미 늦었다.

서걱.

허공에 핏방울이 튀어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시녀의 비명 소리와 함께 비로소 비극의 막이 올랐고, 나는 천천히 내 오빠를 향해 다가갔다.

“쿨럭, 이, 이게 뭐 하는.”

거무스름한 피를 토해 내면서 내 오라비가 크게 외쳤다. 아니, 크게 외치려고 했다.

하나 이미 크게 베인 그의 몸은 그에게 피를 토해 낼 여력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의 앞에서 무심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게.”

“…….”

“그동안 뭐 했어.”

내 말에 내 오라비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마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고 있는 듯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궁은 이미 엘비어츠 공작가의 이들로 차 있었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오빠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너……!”

“홀로 절망 속에서 울어 봤어?”

“이, 이 멍청한 게, 대체 뭘 믿고…….”

“나는, 내가 당한 대로 갚아 주지 않을 거야.”

“…….”

“고통 없이 죽여 줄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알아차렸는지 에딘 오빠의 얼굴에 절망이 들어찼다. 나는 서늘하게 웃어 주었다.

푹.

“내가 당한 걸 다 돌려주기에는, 그사이에 너무 많은 시간의 침전이 있었어.”

“……커헉.”

“오빠, 나는 말이야. 오빠가 진짜로 나를 옷장 속에서 꺼내 줄 거라고 믿었어.”

“……쿨럭. 미…… 미안…….”

“그런데 왜 그날 오지 않았어?”

“……미안. 에스트…… 내가 미안…… 살려…….”

“나는, 오빠를 기다렸는데.”

“…….”

“아니야. 나는 사실 오빠만 기다린 게 아니었어. 나는 오빠도, 아멜리 언니도, 에론 오빠도, 다이넬라 언니도, 바이올렛 언니도, 그냥…… 그냥 다 기다렸는데.”

“…….”

“오빠가 오지 않아서 결국 내가 왔어, 기뻐?”

내 물음에 답은 없었다. 줄줄이 새어 나가는 생명의 흔적에 나는 눈을 감았다.

비릿한 혈향이 사방에 퍼진다. 이윽고 내 앞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변했다.

오빠였다가, 언니였다가, 다시 오빠였다가 다시 언니였다.

그중에서 몇몇은 내게 잘못을 빌었고, 몇몇은 내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장담했다.

그들 중 내 말을 알아들을 만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내가 이 검을 들고 아바마마의 알현실까지 가는 동안에도 아무도 내가 왜 검을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아.”

나는 달라붙은 눈이 녹아 반쯤 씻긴 검을 들고 아바마마의 앞에 섰다.

마치 내 등장을 어렴풋이 예상한 듯 아바마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나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단상으로 다가갔다. 이내, 그가 서늘하게 말했다.

“이 아비를 죽이기라도 하려고?”

그의 물음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글쎄, 내가 폐하를 죽이러 왔나?

온몸에 묻은 피가 머릿속까지 들어갔는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저 권력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저지른 모든 일들이 모두 이곳으로 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 왔고, 결국 내 아비의 앞에 섰다.

“한심한 것. 제가 왜 그런 취급을 당했는지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질책하는 것이냐? 이 미치광이 계집 같으니라고.”

“…….”

“너는 그런 취급 받아 마땅하다. 아니, 너를 살려 둔 것부터가 내 실책이었다. 너 같은 것이 황실에 남으면 우환이 될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재밌네.

아바마마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우환. 그 단어의 말을 곱씹던 나는 천천히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은은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천천히 손에 들린 검을 그를 향해 겨냥했다. 하나 그것은 그를 찌르려는 것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장난감을 자랑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럼에도 그것에 큰 위협을 느꼈는지 아바마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이 검을 보세요. 아바마마께서 그리도 아끼는 자식들의 피가 여기에 묻어 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죽였지요.”

“……네가 감히!”

“한데 아바마마, 이래도 제가 당신의 가장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라 하시겠습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했을까. 나는 말을 내뱉고도 그만 저 스스로가 한심하여 웃고 말았다.

아바마마는 내 말에 입매를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걸린 명백한 분노가 이미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내 수치다. 영원히.”

“……하아.”

그 순간 터진 것은 과연 실소였을까, 아니면 그저 분노였을까, 아니면 완전한 체념이었을까.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바마마의 말에 내가 검을 내렸다는 것.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저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는 것뿐이었다.

그래, 놓아 버렸던 것 같다. 하긴, 내가 내 형제자매를 벤 순간부터 이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였고, 나는 그의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얼마나 죽음으로 몰려고 했든지 그것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그저 형편이 없는 딸이었고, 죽어 마땅한 자식이었던 것 같다.

내 앞에 서 있던 아바마마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검을 빼 들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이곳에서 나한테 사형을 내리려는 것일까.

‘그냥 죽어야 하는 걸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네가 왜?’

…….

‘네가 왜 죽어?’

이 목소리는?

나는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아바마마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 두통.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은 현실일까. 진짜로 이랬던가? 아니, 진짜라고?

아니야. 아바마마는 이렇게 천천히 나를 경계하며 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어.

그는 애초에 내가 입을 열던 순간부터 검을 빼 들고 나를 찌르려고 했어. 그리고 그때…….

탕!

갑작스럽게 알현실에 퍼지는 총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귀를 찌르는 총소리. 줄줄 새어 나가는 생명의 흔적들.

아바마마.

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읊조렸다. 그대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에서 왈칵 무엇인가가 쏟아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나는 왜 울지.

왜 울고 있는 것이지? 왜 나는.

“아바마마.”

나는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총알 한 발로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죽지? 어떻게 아바마마가 죽지? 어떻게?

“아바마마, 눈 좀 떠 보세요. 떠서, 저를 죽이셔야죠.”

“…….”

“아바마마.”

그 순간 그저 울음이 왈칵 흘러나왔던 것 같다.

나는 그대로 내 아바마마의 시신 위에서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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