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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69화 (69/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9화

‘어? 방금 마법으로 날 올려놓은 건가?’

그와 동시에, 레르하겐이 말 위로 올라탔다.

나는 펄럭거리는 그의 외투 자락에 미미하게 눈을 찡그렸다.

“뭐야. 익숙하잖아요.”

“말은 기댈 데가 없잖나. 피곤하다.”

아니.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곧, 귀족들을 쭉 훑어보며 레르하겐을 향해 작게 읊조렸다.

“일단 숲으로 들어간 뒤에, 다시 말에서 내리면 돼요. 그리고 우리 계획, 잊지 않았겠죠?”

“그래.”

“말고삐는 잡을 힘은 있는 거죠? 제가 잡아요?”

나는 괜히 불안해져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때, 레르하겐이 내 옆으로 팔을 뻗더니 이내 읊조렸다.

“가지.”

그와 동시에 앞발을 치켜든 말이 그대로 앞으로 질주했다. 나는 순식간에 차갑게 내 뺨을 때리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며 레르하겐의 팔을 잡았다.

질주는 생각보다 꽤 오래 이어졌다. 애초에 숲의 크기도 크거니와 삐뚤빼뚤하게 이어진 곳이 꽤 되어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르하겐이 고삐를 그대로 잡아당겼다.

히이이잉-!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리고 곧, 주변의 환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호수네요? 제가 이쪽으로 올 걸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저기 흔적이 남았지만 이쪽으로 오는 흔적이 가장 강하던데.”

아.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레르하겐은 의외로 내 흔적을 확실히 알아채는 방법이 있어 보였다.

‘이제 물어봐야지.’

곧 나와 레르하겐은 말을 옆에 묶어 둔 뒤 호숫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호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작게 읊조렸다.

[미렐로프(영상 구현).]

곧 호수에 몇 개의 영상이 촤륵 펼쳐지기 시작했다.

“영상 마법인가.”

레르하겐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답사를 할 때 영상 마법을 군데군데 심어 놨거든요. 이러면 귀족들이 뭘 하는지 실시간으로 감시가 가능하죠.”

나는 거울 속에 비낀 몇 개의 구역을 관찰했다. 마법이 오류 없이 잘 발현되고 있는지 몇몇 귀족들의 인영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러다 사냥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느긋하게 주변이나 구경하고 있는 아네로제 후작을 발견하곤 혀를 찼다.

“저럴 줄 알았어.”

아네로제 후작가의 모녀들은 기회주의자로 유명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는 무조건적으로 잡지만 오늘처럼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상황에서는 힘을 빼지 않았다.

그래도 후작인지라 그녀를 부르긴 했지만 솔직히 아네로제 후작이 범인이라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저들에게 있어서 흑마법은 그리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네로제 후작가는 연금술 가문으로서 가장 잘하는 것은 독극물 제조였다.

그러니 미지의 독을 만들어 나를 처리한다면 모를까, 흑마법을 쓸 법한 위인들은 아니었다.

‘물론 모르는 일이지. 저런 자들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그렇게 읊조리며 나는 레르하겐을 보았다.

“이제 흑마법을 쓸 만한 상황을 만들어 줘요. 할 수 있죠?”

레르하겐은 내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볍게 고개를 돌리더니 턱짓을 했다. 그에 나 또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호숫가에 갑자기 금빛 매가 푸드덕거리면서 내려앉았다.

아니, 매인가?

평범한 매와는 조금 다른 생김새의 매는, 누가 봐도 평범한 동물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듯 신성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뭐죠?”

“신물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신과 흡사한 순도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지.”

“그래서요?”

신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설마 이대로 이 숲에 있는 이들을 마구 공격하는 무식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아니, 분명 정신 마법을 쓴다고 했었는데.’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갑자기 금빛 매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우아하게 원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몇 마리의 매들이 나타나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맴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 뒤, 그저 제자리에서 날갯짓을 하던 매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명령이라도 듣는 것 같잖아?’

나는 레르하겐을 힐끔 보았다. 레르하겐은 공격을 할 때 뭔가 커다란 움직임이 없는 편이라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마침내 의문을 해결해 주듯,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했지. 마족들은 정신 마법에 약하다고.”

“네.”

“흑마법의 기본은 생명을 제물로 바쳐 힘을 얻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어마어마한 죽음을 초래하고, 그 과정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 흘러 들어가.”

“아. 뭔지 알 거 같아요. 원한이나 증오 같은 것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족들은 상관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부정적인 감정은 오히려 양분이 되지 독이 되지는 않거든. 하지만 인간들은 달라. 아무리 위대한 흑마법사라도 정신적으로 흘러들어 오는 온갖 부정적 감정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어.”

“아. 그래서.”

“그래. 본인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하는 그 짙은 부정적인 정신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갉아먹지.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대개 오래 살지 못한다.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붕괴하거든. 그리고 마족의 먹이가 되지.”

“으으. 한심해.”

나는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레르하겐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한심하다고?”

“한심하지 않으세요? 더 큰 힘을 갖기 위한 건 결국 더 오래, 강하게, 단단하게 살기 위한 것인데, 정작 그것 때문에 일찍 죽는다니. 그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어요?”

“보통은 공포를 느끼던데.”

“저는 그런 나약해 빠진 정신머리를 지닌 놈들한테 느낄 공포 없어요.”

“그런 것치고는 흑마법의 정신 공격이 꽤 잘 먹혀들던데.”

“윽.”

나는 레르하겐의 평온한 목소리에 입을 꽉 다물었다. 일리안이 내 방에 떨어진 날, 그 검을 보고 옴짝달싹 못 했지 그러고 보니.

“그건 너무 갑자기라서 그런 것이고요!”

“흐음.”

“아무튼, 그래서 이제 정신 마법을 쓰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신성력을 곁들어서 쓸 거다. 다만 나는 마법에 집중해야 하니, 신물의 신성력을 좀 빌렸지.”

아. 어쩐지 갑자기 신물을 불러낸다 했더니.

아니 잠깐만.

“신성력이요? 신성력으로 공격할 수가 있어요?”

신성력이 공격에 쓰이는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마물을 만났을 때 정화를 이용해서 퇴치를 하긴 하지만,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인간에게는 공격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 물음에 레르하겐은 무척 간단하게 대답했다.

“쓸 수 있다.”

“어떻게요?”

“마력과 섞어서 쓰면 된다.”

“……그게 가능해요?”

“나는 가능하다.”

“…….”

“다른 이들은 모르겠군.”

못할 거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공격 수법은 듣도 보도 못했거든.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아까 전 신물의 신성력을 이용해서, 환각 마법을 걸 것이다. 다만 신성력이 방패막이가 되어서 평범한 인간에게는 듣지 않을 테지.”

“하지만 흑마법사에게는 어마어마한 공격이 되겠군요!”

“그래. 그리고 환각에 사로잡힌 흑마법사는 아마도…….”

그때였다. 레르하겐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아까까지만 해도 고요하기 그지없던 호수에 파문이 확 일었다.

“어?”

그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신물의 공격이 먹혔나요?”

“아마도 그런 것 같군. 환각에서 나오기 위해 흑마법을 펼친 듯하고, 그 과정에 네가 미리 심어 놓은 마법의 흔적을 지운 듯해.”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오다니, 대체 무슨 환각을 보여 준 건가요?”

레르하겐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굳이 더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제 차례겠군요.”

이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숲속에서 현재 신성력에 고통을 받고 있는 흑마법사를 찾아라.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힐긋 보았다.

그와 동시에 눈을 감고 마력을 운용했다.

그리고 몇 초 뒤, 시동어를 외쳤다.

[가르시에타(추적)!]

내가 발현한 마법은 다름 아닌 추적 마법이었다.

추적 마법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미 남겨진 흔적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법사의 몸에 지니고 있는 일부 흔적과 비슷한 흔적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쓰는 것은 다름 아닌 후자였다.

내 명령과 동시에 갑자기 하얀빛의 나비가 팔랑거렸다.

이것은 다름 아닌 내 마력의 실체화로서, 내 몸에 있는 마법의 흔적과 비슷한 결의 기운을 찾아갈 수 있었다.

“추적 마법으로 뭘 하려는 거지?”

“보면 몰라요? 흑마법의 기운을 쫓으려는 거잖아요.”

“추적 마법은 마법사 본인의 몸에 있는 기운만 추적이 가능할 텐데.”

“그러니까요.”

나는 레르하겐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여기 있잖아요. 현재 흑마법에 고통받고 있는 이가.”

말을 마친 나는 주저 없이 회복 마법의 시동어를 읊조렸다. 다만, 이번 마법의 시전 대상은 바로 나였다.

[라르가트(회복).]

그 순간, 마치 레르하겐에게서 처음 반지를 받았던 날 느꼈던 심각한 두통이 그대로 나를 강타했다.

“윽.”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반지에서 검은 기운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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