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8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표정을 갈무리한 델멘 공작은 곧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데 로드께서 참여를 하신다는 것이 참입니까.”
“응. 이제 어마마마와 함께 오실 거야.”
“그렇군요. 리건 녀석도 거기에 있겠군요.”
“물론이지. 어마마마가 아끼는 보좌관이니까.”
델멘 공작이 얼마나 리건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지 알고 있는 나는 일부러 ‘아끼는’을 강조하며 말했다.
델멘 공작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선택적으로 무시를 한 것인지, 그저 ‘흐음’ 하고 의미 모를 감탄만 내뱉고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이리스, 이리 와서 황녀 전하께 예를 취하렴.”
‘아. 후계자도 왔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델멘 공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는, 사냥복을 입고 짧은 단발을 뒤로 묶은 아이리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름에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기사는 아니지만,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델멘 공작이 오늘 모든 시비를 그저 유하게 넘긴 이유를 알아차렸다.
‘하긴, 제 첫째 딸이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긍지요 자부심인 인간이 딸이 옆에 있는데 다른 게 귀에 들어올 리가.’
애초에 델멘가의 대부분 이들이 그랬지만, 아이리스 델멘은 그야말로 귀족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다.
수려한 외모에 기품 있는 행동거지,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습득 능력이 빠르고, 그런 주제에 또 귀족으로서 인간관계에도 능통한 편이라 과하게 인정받으려고 나서지 않아 그녀를 딱히 싫어하는 이가 없었다.
위로 오빠가 셋이고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 만들 만큼 델멘 공작의 첫째 딸 사랑은 유별났는데, 아이리스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할 만큼 총명했다.
물론, 리건 때문에 나는 그녀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탓은 아닐지라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이리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몇 년 동안 가문의 일로 바쁘게 뛰어다닌다고 들은 듯한데 수도로 돌아왔나 보다.
“이제 황녀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시게 된다면 제 딸이 옆에서 보필을 하게 될 터인데, 혹여 미숙하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품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델멘 공작의 얼굴에는 ‘감히 너 따위가 어떻게 내 딸이 민폐를 끼쳤다고 할 수 있겠어?’ 따위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에 나는 얄밉게 웃었다.
“괜찮아. 미숙한 신하를 품는 건 주군의 덕목이지. 내 어마마마처럼.”
델멘 공작은 황녀가 말한 ‘어마마마의 신하’ 중에는 자신도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사냥 대회를 열어 주신 것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저는 이만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델멘 공작이 물러났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엘비어츠 공작이 나를 향해 말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저 아이리스인지 라일락인지 하는 아이보다 우리 에슈트가 더 총명하다.”
“……너무 유치해요.”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느냐. 델멘 공작가는 꾸준하게 제가 첫 번째가 아닌 것에 불만이 있는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 할아비한테 불만이 많지.”
그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럼 켈리어드 대공가는요? 그 가문이 더 센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다만, 켈리어드 대공가는 개국 공신 가문이지 않으냐. 지금까지 황실의 검이었던 가문이니, 오히려 그에 열등감을 갖는 것이 우스운 게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열등감과 질투는 대상과 수준을 가리지 않는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지만, 진짜로 일인자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그런 건 별로 의미가 없다.
그저 갖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증오가 완성이 된다.
그리고 나는 델멘 공작이 켈리어드 대공가를 마뜩잖게 여김을 은근히 느끼고 있었다. 참고로 그것은 일전에 리건이 알려 준 것이다.
- 아버지께서 많이 화나셨습니다.
- 왜?
- 켈리어드 대공께서 원로원으로 복귀를 했으니, 지금까지처럼 원로원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뭐, 이해는 가지만.’
원래 적당한 열등감과 박탈감은 인간을 노력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쁜 방향으로 틀어지지만 않으면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럼 이 할아비도 멧돼지를 잡기 위해 노력하마.”
“그러니까 이 숲에는 멧돼지가 없다니까요.”
엘비어츠 공작은 딱히 내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귀족들이 도착할 무렵, 나는 멀리서 보이는 인영에 미소를 지었다.
“어마마마!”
마치 내 목소리가 신호라도 되듯 귀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르시스의 존귀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께 주신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귀족들의 눈길을 받으며 인형은 조용하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세베르의 눈길이 다시 우리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하나, 그는 굳이 와서 인사를 더 나누지는 않았다.
‘진짜 황제가 아니니까 그냥 무시한다는 건가.’
괜히 속으로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으려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때, 언제 왔는지 하시스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뭐야. 일리안 오빠는?”
내 물음에 하시스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떨떠름한 기색이 비꼈다. 하나 곧 다시 짜증이 섞인 얼굴로 그가 쯧 혀를 차더니 답했다.
“늦는대.”
“뭐? 왜?”
“복통.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그냥 쉬라고 했어.”
“그래?”
그에 나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박이며 다시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사냥 시간이 다가올 무렵, 갑자기 뒤편에서 레르하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시작하지?”
아, 깜짝이야.
나는 갑자기 나타난 레르하겐을 향해 좀 기척을 내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언제나 입는 둥 마는 둥 대충 걸치고 다니던 것과 달리, 오늘의 그는 평소와 완전히 다르게 반듯하게 사냥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큰 키에 단단한 체형, 무심한 분위기와 달리 화려한 사냥복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그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묘하게 사람을 기죽이고 있었다.
나는 햇빛에 반짝이는 그의 은발을 응시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나른한 포식자 같은 눈빛.
분명 그의 분위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이렇게 새로운 모습을 보자 새삼스럽게 다시 그의 존재감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정말 빨리 조용하게 오시네요.”
“네가 말한 시간에 맞춰 왔을 뿐이다.”
나는 괜히 심술궂게 한마디 붙였다.
“폐하, 이제 곧 예정하신 시각입니다.”
리건의 말에 나는 더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곧, ‘인형’이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 사냥 대회를 시작하지. 오늘 우승한 자에게는 주신 겔라의 축복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마르가르트석’을 하사하겠다.>
마르가르트석이라는 말에 일순 몇몇 이들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신전에서도 한동안 찾다가 못 찾은 보석 중 하나였는데, 레르하겐의 레어에서 굴러다니다가 현재는 내가 소유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리 큰 상을 하사하시니, 당연히 노력해야겠군요.”
“허허, 이 늙은이도 그 보석은 한번 구경해 보고 싶군.”
곧 귀족들의 덕담이 오갔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샤트 공작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폐하, 설마 로드님도 참석을 하시는 겁니까?”
언제나 존재감 없이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근래의 모토로 삼던 그가 물어볼 정도로 레르하겐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사냥은 짐 대신 레르하겐이 에슈트를 데리고 참석한다.>
내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각기 미묘한 기색이 서렸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봐도 딱히 ‘자신이 우승을 하지 못할까 봐’ 따위의 시답잖은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르하겐이 귀족들의 행사에 끼는 것은 처음이라, 슬슬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를 돕는 것이 국정에 관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사이 나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럼 시작할까? 아빠, 가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이 미리 준비한 말을 데려왔다.
레르하겐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내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사냥을 하려면 말이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그냥 들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일단 겉으로 사냥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아요?”
“……나더러 이걸 타라고.”
“왜, 설마 못 타요?”
아니, 그럼 안 되는데?
당연히 그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그때, 레르하겐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읊조렸다.
“일단 너부터 올라가라.”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예전이라면 쉬이 올라갔을 말이 너무 높아 도움을 청하고자 리건을 부르는데, 갑자기 내 몸이 살짝 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말 안장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