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7화
나는 팔을 위로 높게 들어 일리안의 앞에 내밀었다. 일리안이 살짝 허리를 굽히더니 이내 가까이 머리 끈을 살펴보았다.
“이게 뭐지, 아가씨?”
“이거, 어디서 본 적 없어?”
“내가 알아봐야 하는 물건인 거야?”
진짜로 처음 보는 물건인지 일리안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물론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이골이 난 그이니, 알고도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거짓말을 고하면 즉사야.”
“알아. 그렇지만 나는 진짜로 이것을 본 적이 없어.”
“진짜?”
“진짜.”
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단정 짓는 것을 보니 진짜로 그는 처음 보는 물건인 듯했다.
나는 팔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잡히는 벨벳의 느낌이 부드러웠다.
“모르면 됐어.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흐음. 혹시 죽음의 협곡과 관련된 물건인 건가? 즉사 운운하는 것 보니까?”
나는 하필이면 눈치 좋게 바로 답을 맞혀 버린 일리안을 흘겼다.
일리안이 싱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감이야, 감.”
“그 감 잘못 썼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오늘따라 말이 험하네. 왜, 이 물건의 주인을 알아?”
“…….”
“그리고 그 주인을, 알고 보니 믿고 있었다던가.”
일리안의 말에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일리안은 자신의 말이 진짜 일줄 몰랐다는 듯이 멈칫했다.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의 입가에 실린 미소가 나를 향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보통 일을 꾸밀 때 이렇게 칠칠치 못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지?”
“지금 나 위로하는 거야?”
“아니 그냥. 최소한 그날 나를 찾아온 사람은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는 부류는 아닌 것 같았어. 오히려,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였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그걸 알고 있으면 애초에 초상화라도 그려 냈겠지? 아, 하지만 이건 알아. 남자였어.”
“흑마법도 하는데 그 정도 외형이야 어떻게든 바꿀 수 있어. 그건 별로 도움이 못 돼.”
“그런가? 하지만 이건 바꾸지 못하겠지.”
“뭘?”
“마법의 감각.”
“마법의 감각?”
마법에도 감각이 있어?
처음 들어 보는 개념이었다.
일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연금술사들이 자주 쓰는 개념이야. 마법의 감각. 연금술사들은 보통 아티팩트를 만들잖아? 하지만 필요에 따라 마법사들에게 도구도 만들어 줘.”
“그래서?”
“하지만 이 마법사에게 어울리는 도구가 저 마법사에게 어울리라는 법은 없어. 그래서 연급술사들은 각 마법사들이 갖고 있는 마법의 특징을 마법의 감각이라고 해.”
“…….”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외모 같은 거지. 마법사들은 대체적으로 이걸 신경 쓰지 않아. 자신에게 내재된 마력을 운용해서 그저 최대한 마법 효과를 보면 되니까.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마법사들의 요구에 맞춰서 도구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 마법의 감각에 엄청 예민해.”
“그래서 네 말은, 만약 너를 사주했던 인간이 네 앞에서 마법을 쓰면, 알아볼 수 있다는 건가?”
“이론적으로 그렇지. 하지만 멍청하지 않고서야, 나나 아가씨가 있는 상황에서 마법을 쓸까?”
“쓸 수도 있지. 나라면 몰라도 네 앞에서는.”
“그건 아니지, 나는 지금 아가씨 편이잖아.”
나는 일리안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언제 내 편이었다고.”
“어, 지금은 맞는데?”
왠지 모르게 제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더 능글맞아진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잘해 줬나.
특히 저번 축제 이후로 일리안의 태도가 묘하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내게 해만 되지 않는다면 나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살짝 턱을 들고 일리안을 응시했다. 내 눈길에 일리안이 곱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
“너, 진짜 내 편이야?”
일리안은 내 물음에 멈칫했다. 그러나 곧, 그가 짓궂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원래는 그랬는데, 왠지 모르게 뭔가를 더 시킬 것 같아서 갑자기 아가씨 편 안 하고 싶어졌어.”
“헛소리하지 말고. 혹시 그 마법의 감각이라는 거, 마법을 쓰고 나서도 볼 수 있나?”
“몇 분 정도는. 하지만 대부분 마법 효과가 끝나면 바로 사라져.”
“그럼.”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곧, 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내일, 재미있는 거 해 볼래?”
일리안은 내 얼굴을 보더니 뭔가 불안함을 감지했는지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가 다시 유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한번 해 보기는 할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지도 모른다면서 하겠다고 하는 거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계획 설명이 끝난 뒤.
“진심이야, 아가씨?”
일리안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응, 진심이야. 역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냥 계획 하나로만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 내 성정에 맞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잔말 말고 시키는 거나 해. 혹시나 말하지만 이미 내 계획을 들은 이상 퇴로는 없어.”
일리안은 내 말에 미간을 살짝 짚었다. 그러나 곧,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뭐, 노력은 해 볼게.”
“노력이 아니라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턱을 살짝 들었다.
* * *
사냥 대회는 햇빛이 화창한 오후에 열렸다. 셀라는 양산을 씌워 주는 것도 모자라 얇은 보호 외투를 하나 더 입혀 주었다.
그래 봤자 숲에 들어가면 그늘이 져서 필요는 없을 테지만, 나는 그저 그녀의 마음을 얌전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일부러 약간 일찍 나왔던 터라 모든 귀족들이 다 모이지는 않았다.
나는 내게 인사를 하는 애들러 후작과 아네로제 후작, 그리고 샤트 공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 내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세베르에게 닿았다. 그의 옆에는 오늘 사냥에 쓰일 예정인 흑마가 우아한 갈기를 뽐내며 서 있었다.
“황녀 전하.”
세베르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문득 빨간 머리 끈이 아른거려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굳이 그에 대응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곧 셀라가 건네주는 주스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에슈트! 오랜만이구나! 어쩜 이리도 귀여울꼬.”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오늘 초대받은 엘비어츠 공작의 목소리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 그는 단숨에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다소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내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제 익숙해진 것인지 엘비어츠 공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 이 할아비가 에슈트가 먹을 멧돼지를 잡아 주마!”
“……품위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숲에는 멧돼지가 없어요. 설사 있다고 해도 굳이 그걸 왜 잡아먹어요.”
그러나 엘비어츠 공작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호탕하게 웃으면서 내 어깨를 톡톡 쳤는데, 그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에스트리아는?”
“아, 어마마마는 이제 곧 오실 거예요.”
“오늘 설마 그 놈팡이도 오는 것 아니겠지?”
“어느 놈팡이요?”
“네 아비 말이다! 내게는 놈팡이야! 감히 네 어미를 데려갔으니. 아 물론 우리 에슈트가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튼, 네 아비는 놈팡이다!”
나는 레르하겐을 놈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엘비어츠 공작의 간덩이에 그만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 반응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이런, 로드께서 사냥에 참여하신다면 우승은 포기해야겠군요.”
나는 목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델멘 공작이 여유로운 얼굴로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곧, 내 앞에 선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의 모습에 시큰둥하게 읊조렸다. 그러나 델멘 공작은 개의치 않은 듯,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이번에는 엘비어츠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엘비어츠 공도 오랜만입니다. 수도에 올라오셨다고 들었는데, 어찌 원로원 회의에 얼굴을 비추시지 않고.”
“이 늙은이야 이제 거의 은퇴를 할 나이인데 무어 급하다고 수도에 오자마자 회의부터 참석하겠나. 어차피 엘비어츠에 명할 일이 있으면 폐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리겠지. 외척이 너무 중앙에 관여하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 않나.”
“역시, 엘비어츠 공작은 영명하십니다. 저 또한 그리 짐작해 언젠가 뵈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만 공무가 다망하여.”
“흥. 누가 들으면 아르시스의 공무는 홀로 다 맡아서 하는 줄 알겠군. 이 늙은이도 원로원의 원장이었던 시절이 있다. 핑계도 가지가지지. 그저 오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닌가.”
엘비어츠 공작의 말에 델멘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록 작위상으로는 같은 공작가이긴 하나, 황제의 외척인 데다가 연륜까지 있는 엘비어츠 공작은 대부분 귀족들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존재였다.
나는 델멘 공작의 눈가에 서린 기색에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