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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66화 (66/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6화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세베르의 허리춤을 힐끔 보았다. 언제나 허리에서 팔랑거리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폐하를 알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강녕하신지요.”

에스트리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세베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아이리스는 그에 놀라지 않았다.

“델멘 소공작께서 굳이 내게 와서 폐하를 이리 입에 올리는 이유를 알 수 없군.”

“그저 여쭙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리 사석에서 폐하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도 결례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7년 전, 갑자기 수도를 떠나셨지요.”

“…….”

“왜 갑자기 돌아오셨습니까, 그것도 지금.”

아이리스는 세베르의 싸늘한 태도에도 침착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에 깃든 미세한 감정 동요는 그녀의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세베르는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모른 척 보다는 그저 깔끔한 거절이나 마찬가지인 무관심이었다.

“내 거처와 소재에 소공작이 이리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군.”

“대공 전하.”

“하나 그것은 델멘이, 소공작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세베르의 물음에 아이리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세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차갑게 아이리스를 향해 말했다.

“델멘 공작에게 일러.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켈리어드 대공가가 수도로 다시 귀환한 이상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라고.”

말을 마친 그가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에 아이리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래서.’

그녀가 속으로 읊조렸다.

‘그래서, 제가 그녀를 싫어하는 겁니다.’

* * *

“사냥 대회에서 어떻게 놈을 끌어낼지는 생각해 봤어요?”

사냥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황제로서 한쪽으로는 업무를 처리하고, 다른 한쪽으로 사냥 대회를 준비하던 나는 오랜만에 레르하겐을 찾았다.

오늘도 나무 위에 누워 있던 레르하겐은 내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나 곧 다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그래.”

“무슨 방법을 쓸 예정인데요?”

“며칠 뒤면 보지 않나.”

“아니 뭐, 미리미리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답에 위쪽에서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입을 삐죽 내밀었는데,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레르하겐이 위에서 내려왔다.

“아, 깜짝이야. 이제는 그냥 기척도 안 내시는 건가요?”

“내가 언제 기척을 내면서 다녔지?”

“그래도요. 좀 내고 다니시라고요.”

“귀찮다.”

“어련하시겠어요.”

그러나 나는 딱히 진심으로 불쾌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를 기대 어린 눈빛으로 보자, 레르하겐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정신 계열의 마법을 쓸 거다.”

“정신 마법이요?”

“흑마법사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흑마법사들이 정신 마법에 약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솔직히 마족에게 영혼을 팔고 그딴 짓을 할 정도라면 웬만한 정신 공격은 먹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흑마법사들은 오히려 정신적으로 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자세한 건 실제로 보면 알아.”

“그거 하나 설명해 주기가 귀찮아서.”

그러나 나는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제일 강한 존재가 아니던가.

어쨌든 그에게 부탁하는 입장에서 그를 닦달하기도 좀 애매해서, 나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신 마법을 쓰실 줄은 몰랐어요. 로드님은 강하니까 그냥 물리적으로 극한으로 밀어붙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무식한 방법은 귀찮아서 안 쓴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지.”

“그럼 뭐 정신 마법은 무식하지 않은 방법인가요? 결국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는 건 같잖아요.”

“하지만 정신 공격은 가장 적은 힘을 들여 교묘하게 인간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

“…….”

“그래서 마족들이 잘 쓰지.”

“마족들이 잘 쓴다고요?”

“그들의 특성이다. 정신 공격으로 상대의 정신세계를 헤집어 놓고, 적군의 내부를 이간질로 분산시켜. 그런데 갈라놓을 여지가 없다면 그때는 귓가에 감언이설로 죽음을 종용하지.”

그러나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로드님, 인간들은 보통 그런 걸 책략이라고 불러요. 그건 그냥 영리한 거 아닌가요?”

애초에 레르하겐이 한 말 모두 병법서에 써 있는 것이다.

하나 레르하겐은 내 말에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래서 인간이 마족들과 닮았다는 거다.”

“그거 욕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지킨다는 데서 신을 닮기도 했지.”

나는 레르하겐의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확실히 오래 살아서 그런가, 예전부터 느꼈지만, 레르하겐은 인간들에게 모종의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신 공격이라니. 진짜 거기에 매달려도 되는 건가. 혹시라도 상대의 정신력이 강하면 어떡하지.’

이번 계획의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역시 실패를 하면 범인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외치는 꼴이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물론 레르하겐의 정신 마법이 그저 평범한 마법사들의 최면 따위와 비교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래도 퇴로가 없다는 것은 그리 든든한 상황은 아니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나를 힐끔 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이제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네?”

하나 그때, 정적을 깨고 레르하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르하겐을 응시했다.

곧, 그가 나를 힐긋 보고는 말을 이었다.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라.”

“아, 전 또 뭐라고. 알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저도 그렇게까지 무모한 성정은 아니거든요.”

“글쎄. 딱히 그래 보이지 않아서 말이다.

진짜인데.

저번 축제의 여파가 너무 컸던 걸까. 레르하겐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아끼는지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흐음. 뭐, 그거야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어차피 이제 나와 종종 다녀 보면 알겠지. 내가 얼마나 삶에 집착이 강한지.

곧 레르하겐이 자취를 감추고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 * *

사냥을 빙자한 함정 대회는 착실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내 명령 아래 황실 마법사들은 그동안 시치프 숲을 감싸고 있는 방어막을 공고히 했다.

리건의 보고에 의하면 그 뒤로 중앙기사단도 거의 매일 시치프 숲에 수상한 접근이나 이상한 낌새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준비도 이번 사냥 대회의 주역인 나보다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내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내 고통을 함께 분담하게 되었다.

“일단 내 계획을 들어. 사냥 당일, 나는 로드님과 함께 초대에 응한 여섯 개 가문의 가주들과 함께 숲에 들어갈 거야.”

사냥 대회가 열리기 전날, 나는 하시스와 일리안을 집무실로 불렀다. 두 사람은 의아한 얼굴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얼굴을 굳힌 나를 보았다.

“숲으로 들어간 뒤 일단 가장 먼저 숲의 테두리에 차단막을 칠 거야.”

“차단막?”

“차단막을 치면, 숲 밖에 있는 사람들은 숲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 그러면 나와 로드님의 행동이 조금 더 편해질 거야.”

“그래서 숲속에서 뭘 하려고 하는 거냐.”

“그건 나와 로드님이 할 일이야. 너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숲 밖에서, 우리와 함께 들어가는 여섯 가문의 가주 외 식솔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지.”

“반응을 살피라고?”

“일리안이 있잖아.”

나는 일리안을 향해 턱짓을 했다. 일리안은 그제야 깨달은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사냥개 역할을 하라는 건가?”

“비슷하지. 비록 가주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긴 하나, 어쨌든 그 가문의 식솔들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하시스는.”

“나?”

“넌 그런 일리안이 허튼짓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장난해? 내가 개 목줄도 아니고!”

“그럼 어떡해? 너 빼고 할 만한 인간이 없어. 우리 중에서 네가 가장 할 일이 없잖아.”

“아니……!”

“…….”

“아니, 그렇긴 한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러나 짜증을 내면서도 하시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들어줄 거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저 성격이 문제였다.

“그럼 이제 됐냐? 뭐 더 없지?”

하시스는 내 방에 있다가 더 큰 문제를 안게 될 것이 두려웠는지 내 방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 났다.

나는 그런 그를 살짝 흘겨보다가, 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남아.”

“나?”

의외의 상황에 하시스가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일리안도 예상하지 못한 듯 그의 얼굴에 다소 유한 미소가 섞였다.

“이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또 나한테 협박이라도 할 게 있어?”

“헛소리하지 마.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내 말에 하시스는 나를 힐긋 보고는 ‘그럼 난 간다’라는 말을 남긴 뒤 바로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바닥 위로 하얀색의 빛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빨간색 머리 끈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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