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5화
결국 나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일단 지금으로서 가능성은 두 가지야. 하나는 애초에 이 머리 끈이 세베르의 것이 아니었고, 정말 정말 우연하게 죽음의 협곡에 흘러 들어간 경우.’
비록 공식적으로 마탑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가끔 일부 왕실에서 마법 찌꺼기라거나 쓰레기를 죽음의 협곡에 유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버려진 머리 끈도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
‘만약 만에 하나, 진짜로 만에 하나 세베르가 이것을 갖고 있었다면 그 또한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첫째는 그가 죽음의 협곡으로 갔다가 흘렸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그의 것을 훔쳤다가 죽음의 협곡에 흘렸거나.’
하지만 세베르가 과연 이렇게 칠칠치 못하게 이딴 것을 떨어뜨리고 다닐까?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죽음의 협곡이라는 단서를 준 적이 없었다.
물론 흑마법이라는 말을 듣고 가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하지만, 죽음의 협곡에 함부로 쳐들어갈 정도로 무모하고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면 세베르가 흑마법사라서, 그가 모든 것의 범인이라서 애초에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전, 죽음의 협곡으로 갔을 수도 있다.
‘그러면 더 이딴 걸 흘릴 리가 없어. 그리고 애초에 죽음의 협곡으로 가는데 이딴 걸 왜 들고 가겠어? 이게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쪽이든 세베르가 직접 죽음의 협곡으로 갔다는 가설은 그리 타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그가 진짜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신념에 연연하지 않는 성정이라고 쳐도, 나는 그의 조심성을 믿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씩이나 되는 녀석이 굳이 이딴 걸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릴 리가 없지.’
그러면 그다음 가설로 넘어가 보자.
‘누군가가 이 머리 끈을 훔쳐서, 죽음의 협곡에 흘렸다?’
이 경우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일부러 갖다 놓고 마탑에 발견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더 옳았다.
하지만 죽음의 협곡은 흑마법의 기운이 강한 곳, 그런 곳에 이런 걸 남겨 두더라도, 언제 발견될지 누가 아나.
그럼 마지막 가능성은 단 하나.
‘누군가가 이것을 훔쳐서 일부러 내 손에 들어오게끔 죽음의 협곡에서 발견한 물건 중에 섞어 놓은 거야.’
그리고 이 가능성의 전제는.
‘마탑에 첩자를 심어 놨나?’
세베르가 나를 배신한 것이든 아니면 마탑에 첩자가 있든 모두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나는 약간 색이 바래진 리본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과거의 잔상이 나타난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설사 누군가의 의도라고 해도 왜 하필 이 머리 끈이지? 그냥 세베르가 자주 하고 다니는 물건 그 어떤 걸 훔쳐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어느 쪽으로 가설을 세워 봐도 의문은 계속됐다. 그것도 당장에 해결되기 어려운 의문들이.
‘이대로 세베르에게 따지거나 그를 의심하는 것은 오히려 적의 의도 그대로 움직이는 것일 수 있어.’
뭐가 됐든 일단은 사냥 대회를 열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그때 그놈들도 말하지 않았는가.
‘각하’라고.
나는 손에 든 머리 끈을 서랍 깊숙이에 넣었다.
‘그나저나 누군가가 진짜로 세베르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면.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사방이 적인 나와 달리 세베르는 대체적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를 누군가가 음해하려고 한다면, 기껏해야 질투 정도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나는 그대로 서랍을 닫아 버렸다.
* * *
이 제국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귀족, 세베르 켈리어드의 보좌관인 펠릭스는 언제나 자신의 직책에 긍지를 느끼는 이였다.
그러나 최근 본의 아니게 한 ‘실수’로 인하여 그는 죽을 맛이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찾았나?”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이 며칠 동안 가신 곳은 물론이요, 저택 전체를 구석구석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펠릭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베르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을 보며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더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펠릭스의 말에 세베르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가 자신의 손에 들린 펜을 내려놓았다.
“머리 끈이 제 발로 도망갈 리도 없고, 이 정도면 누군가가 가져간 것이 확실하군.”
세베르가 이 며칠 동안 찾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의 검에 매어져 있던 빨간색 머리 끈이었다.
애초에 세베르는 웬만해서는 검을 자신의 몸에서 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검을 내려놓는 순간이 있다면, 하나는 기사가 아닌 켈리어드 대공으로서 에스트리아를 알현할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기 소지가 불가능한 원로원의 회의실에 입실할 때였다.
그리고 그가 머리 끈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 또한, 원로원의 회의가 끝나고서였다.
세베르가 입실한 사이 평소와 다름없이 검을 보관하고 있던 펠릭스는, 검에 묶인 머리 끈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낯빛이 하얘지고 말았다.
- 전하,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그만.
그는, 아니, 세베르를 오랫동안 모셔 왔던 켈리어드 대공가의 식솔들은 세베르가 그 머리 끈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았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에스트리아의 앞에서 세베르는 그 머리 끈을 풀어 숨겨 놓으니까. 마치 제가 그동안 품고 있었던 마음처럼.
특히나 세베르를 어린 시절부터 봐 왔던 집사나 항상 그의 뒤에 있었던 펠릭스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세베르의 측근으로서 입을 무겁게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애초에 에스트리아의 앞에 서는 순간 바뀌는 세베르의 그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챌만한 이들은 감히 황제와 대공을 함부로 입에 올릴 만큼 경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세베르의 마음이 숨겨질 수 있는 이유였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하면, 역시 애초에 세베르가 수도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아서지만.
- 일단 찾아 보는 것이 좋겠군. 어딘가 떨어져 있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세베르는 닷새 동안 황궁을 포함해 자신이 다녔던 곳과 짐작 가는 모든 곳을 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 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것을 가져갔단 말인가.’
그 머리 끈은 세베르 켈리어드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보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빛이 바랜 낡은 머리 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져갔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
‘지금까지 내가 지니고 다닌 장식품은 그 리본밖에 없었다. 그것도 눈에 띄는 곳에 달고 다녔으니.’
따라서 그것이 어딘가에서 발견이 된다면, 그 리본이 그의 것이라고 증명할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 어디에서 발견이 될까?
‘절대 좋은 곳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세베르는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설에 숨을 들이켰다. 하나, 곧 그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그것을 기억하고 계실 리가.’
애초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는 완전히 지워진 존재였다. 하긴, 자신이 그녀라도 아마 그를 평생토록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그딴 머리 끈 따위를 그녀가 기억할 리가 있나.
서투른 솜씨로 빼뚤빼뚤하게 놓인 자수를 제외하고는 특이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 머리 끈은, 그에겐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일단 더 찾아 봐.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알겠습니다.”
펠릭스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세베르는 다시 시선을 서류로 옮겼다.
그러나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델멘 소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세베르의 얼굴에 의문이 섞였다.
아이리스 델멘. 조용하게 그 이름을 읊조리던 그가 입을 뗐다.
“들라 하라.”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방을 나갔다.
몇 분 뒤, 차분한 걸음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잿빛 머리카락, 델멘 공작가 특유의 아름다운 호박빛 눈동자가 차가우면서도 평온한 느낌을 주는 여자.
아이리스 델멘.
세베르는 갑자기 저를 찾아온 델멘 공작가의 후계자를 무심한 얼굴로 응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만큼이나 사람들의 추앙 속에서 살아온 이 델멘 공작가의 후계자는 그와 사적으로 익숙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굳이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에스트리아의 명령으로 흑마법을 조사해야 했고, 당연하지만 조사 대상에는 델멘 공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나 델멘 공작가는 황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세베르는 아이리스의 얼굴을 보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앉아.”
얼마나 지났을까,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아이리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목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단발이 그녀의 고고한 인상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수도로 오셨다기에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세베르는 아이리스의 서론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아이리스는 세베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