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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64화 (64/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4화

“마법 기밀문서?”

아. 그러고 보니 비올레에게 명령했지. 죽음의 협곡에서 발견된 물건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그러나 정작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물건을 훨씬 적었다. 나는 가방 안을 힐끔 보았다. 그 안에 있는 종이를 확인한 내가 미간을 구겼다.

최근 3개월 내로 죽음의 협곡에서 발견한 겁니다. 대부분은 정화 과정에 소멸되었고, 남은 것들은 이것밖에 없어요.

“뭐라고? 무슨 물건들이 정화도 못 견디고 소멸해?”

“대체적으로 흑마법에 너무 깊게 잠식되면 신성력을 견디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옆에서 보고 있던 리건이 귀띔했다.

나는 쯧 혀를 차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딱히 소용이 있는 물건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심지어 비올레는 내게 뭔가 원한이라도 있는지 누가 봐도 쓰레기로 보이는 것까지 가방에 다 넣었다.

그렇게 그 사이를 뒤적거리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한 채 가방을 거꾸로 들어 바닥에 쏟았다.

와르르 흘러나오는 물건은 딱 봐도 딱히 쓸모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시큰둥한 눈길로 그것들을 훑어보던 나는, 순간 눈에 띄는 물건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건.’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새빨간 벨벳 끈이었다. 다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약간 색이 바래져 있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벨벳 끈이었다. 하나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며 나는 끈의 밑단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있는 미숙한 솜씨의 나비 모양의 수를 본 나는.

“하.”

“왜 그러십니까, 페하.”

“아니야.”리건은 갑자기 내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바로 끈과 다른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그대로 가방에 넣었다.

“별로 쓸모 있는 거 없어.”

“네?”

“너, 비올레에게 전해. 더 유용한 정보를 물어오라고. 안 그러면 마탑에 대한 원조고 뭐고 다 끊는다고.”

“알겠습니다.”

리건은 내 모습이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결국 더 캐묻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이를 악물고 가방을 거꾸로 들어 탈탈 털어 냈다. 팔랑거리는 빨간 머리 끈을 든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소 격렬한 반응이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 머리 끈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내가 아까까지만 해도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였다.

‘세베르 켈리어드.’

나는 입매를 굳혔다.

이게 대체, 뭐야.

* * *

이 머리 끈을 정확히 언제 세베르에게 주었는지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다만 그날은 햇살이 따뜻한 봄날이었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언니들에게 속아 나무 위로 올라간 뒤 내려오지 못해 낑낑대고 있었다.

세베르는 우연하게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사실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 정원은 내 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세베르는 내가 매일 오후가 되면 그곳에서 아멜리 언니가 키우다가 버린 고양이와 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뭐 하시는 겁니까?

- 고양이가 나무에 있어서…… 구해 주려다가.

- 혼자 이 높은 곳에 올라가신 겁니까?

- 아니, 올라갈 때는 사다리가 있었는데…….

- 혹시 또 다른 전하들께서 가져가신 겁니까?

- 응…….

내 대답에 세베르는 잠깐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열에 아홉은 언니나 오빠들에게 골탕을 먹고 절절매고 있었다.

솔직히 이쯤이면 나도 그냥 멍청하다 못해 답이 없는 게 아닐까.

종종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번에는 절대 언니나 오빠들에게 속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으나, 그들은 언제나 교묘하게 함정에 빠져들게 했고, 나는 매번 거기에 걸려들곤 했다.

- 고양이가 나무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이 고양이는 다리를 절어서 혼자 못 내려온단 말이야.

- 다리를 저는 고양이가 어떻게 나무로 올라갔는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 ……웅.

- …….

- ……미안.

세베르는 내 표정을 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만 실소를 흘렸다. 하나 곧, 그가 다시 평소의 그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제가 사다리를 갖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아! 안 돼! 시종들이 보면 고양이를 버리려고 할 거야!

- 왜…… 고양이를 버립니까?

- 언니가 고양이가 다리를 절뚝거린다고, 꼴 보기 싫다고 버리라고 했어. 하지만 이 아이는 황궁에서 자라서 바깥세상을 하나도 몰라. 버려지면 죽어 버릴 거야.

- …….

- 말하지 말아 줘, 내가 혼자 내려갈게. 응?

세베르는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 그가 입을 열었다.

- 고양이는 제가 내려 줄 수 있습니다.

- 진짜?

- 하지만 그전에 황녀 전하부터 내려오십시오.

- 하, 하지만…….

나는 까마득한 땅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 너무 높아. 나 혼자 못 내려가.

- 뛰어내리십시오.

- 응?

- 제가 받겠습니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세베르를 보았다. 나 또한 그가 꽤 대단한 검사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이 나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도리머리를 쳤다.

- 시, 싫어.

- 영원히 거기 계실 겁니까?

- 그것도 싫어!

- 그럼 그냥 내려오십시오.

- 혹시 마법 같은 걸로 날 내려오게 할 수는 없어?

- 저는 검사지 마법사가 아닙니다.

나는 세베르의 말에 한참을 주저했다.

그 길고 긴 과정이 다소 귀찮고 지루할 수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베르는 조용하게 내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 지난 뒤,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옆에 놓은 뒤,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작게 속삭였다.

- 기, 기다려. 내가 먼저 내려가면 너도 내려가게 해 줄게.

- 미야옹.

내 말에 고양이가 마치 대꾸를 하듯 작게 울었다. 그에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 나, 나 내려간다?

- 네.

- 진짜 내려간다?

- 네.

- 꼭 받아 줘야 해?

- 네.

- 치마 속은 보면 안 돼!

- ……네.

말을 마친 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세베르가 나를 못 받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다리나 팔을 다치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나는 그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단단한 품이 나를 폭 안았다.

- 윽.

그 순간 귓가에 들리는 미약한 신음 소리에 내가 급히 눈을 떴다.

혹시 내가 너무 무거워서 뼈라도 부러진 거 아니야?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은 가설을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세베르의 손목 부근에 난 가늘고 얇은 상처를 발견하고 경악하고 말았다.

아마도 내 드레스에 달려 있는 장식품에 약간 긁힌 것 같았다.

별로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빨간 피를 보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 괘, 괜찮아?

- 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지혈할 필요도…….

- 안 돼! 자, 잠깐만 내가 지혈해 줄게.

세베르는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급히 뭔가를 찾는 내게 닿았다.

곧, 급히 머리 끈을 풀어낸 나는 언젠가 책에서 본 것을 얼추 흉내 내며 그의 손목에 감아 주었다.

- 이렇게 하면 괜찮을 거야. 이, 일단 고양이부터 내려오고, 같이 의사에게 보이자.

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상처를 깨끗한 붕대도 아니고 더러운 머리 끈으로 묶다니.

분명 깨끗하지 않은 천으로 묶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베르는 그저 내가 묶는 것을 얌전히 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멍청한 황녀를 향한 그의 배려였고, 나름의 귀족으로서의 예의였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절대 이렇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꾸중하듯 말하는 의사한테 자신이 미숙했노라고 해 주는 그가 좋았고, 나와 함께라면 그가 괜히 사람들에게 어수룩하게 보이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랬는데.

나는 머리 끈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이것이, 죽음의 협곡에 있지?’

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당황으로 하얘진 머릿속이 조금씩 진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궁 속이었다.

기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머리 끈을 세베르에게 준 것은 까마득한 어린 시절이었고, 시간으로 치자면 십 년도 훨씬 넘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세베르가 이것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는 가설은 별로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진짜로 그가 이것을 갖고 있었다면?

그것을 생각하자마자 기분이 이상했다. 근원을 알 수 없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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