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3화
응?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동일 인물이니 당연히 같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어디 저런 말을 한두 번 들어 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왠지 모르게 지금까지 내가 들어 본 비슷한 찬탄과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세베르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그의 눈동자를 빤히 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공은 내가 싫어?”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을 물어보았자 별 의미도 없었다. 아이 앞에서 네가 싫다고, 그것도 네 엄마 때문에 네가 싫다고 말할 만큼 세베르는 생각이 없지도, 그렇게 인성이 못돼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말을 붙였다.
“아니, 그냥 들었거든. 어마마마한테서, 대공이, 그리 어마마마한테 불충하다고 말이야.”
“…….”
“그래서 대공이 나도 싫어하는가 해서. 그럼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나는 미움을 받는 게 싫은데.”
그 순간 내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전부 당황한, 정확히 말하자면 의아하면서도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어찌 되었든 귀족에게 있어 황족을 싫어한다는 것은 자칫 반역까지 거론이 될 수 있는 문제였다.
이 말이 황제인 내 입에서 나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내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빌 만큼 어마어마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황녀였고, 아이였으며, 그저 순진한 악의로 해석되어도 무방했다.
“그래서, 나 싫어해?”
세베르는 내 물음에 입매를 살짝 굳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저 무심하고 그저 차갑고 아무런 성의도 없이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은 기사의 의무니 뭐니 따위를 말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됐어. 그냥 장난으로 해 본 말이야. 토끼도 봤으니까 우리 이만 돌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였다. 갑자기 세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라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세베르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속이 조금 울렁거리고 말았다.
석양이 쏟아지는 한가운데 서 있던 그가 은은한, 그러나 씁쓸한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저는 폐하를 싫어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황녀 전하도 싫지 않습니다.”
“……거짓말. 내가 어마마마한테 고자질할까 봐 그러는 거지?”
“아닙니다.”
“그럼 왜 이 몇 년 동안 황실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거야? 어마마마가 화가 났어, 자기가 몇 번이고 소환해도 응하지 않았다고.”
“제가 싫었던 건, 저였으니까요.”
……왜?
네가 왜 너를 싫어해?
네가 스스로를 싫어할 구석이 어디에 있었다고?
너는 그렇게 완벽하고, 빛이 났고, 그래서 모두가 동경하잖아.
그래서 너는 내가 핏물 사이에 서 있을 때도 나를 향해 찡그린 얼굴로 경멸 섞인 시선을 보낼 수 있었어.
그렇게 완벽한데, 네가 왜 너를 싫어하지?
그 누구보다도 자부심과 자존감으로 스스로를 닦고 또 닦던 네가?
그 순간 우리 사이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적막이 쏟아졌다. 기사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다가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나온 대답은 나를 그저 침묵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필론 경이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단장님은 누구보다도 폐하께 충성을 바치고 계십니다.”
“맞아요. 대공 전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폐하를 존경하는 분이세요.”
너희들이 뭘 알아.
평소에 어떻게 기사들 앞에서 스스로를 포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말을 이어 봤자 의미도 없고, 애초에 이 모든 관계의 근원은 황제 에스트리아와 세베르 켈리어드 대공이었지 황녀 에슈트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됐어, 더 꼬치꼬치 캐물어서 뭐 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삐죽였다.
“그래? 그럼 어마마마가 뭘 잘못 알고 있나 보네.”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본 게 있는데.
“아, 이제 저녁이다. 셀라가 걱정할 거야. 이만 갈까?”
내 말에 기사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윽고 세베르가 옆으로 살짝 물러서자 나는 그 앞을 당당하게 가로질러 갔다.
‘자기를 싫어하기는, 그냥 핑곗거리면서.’
결국 나는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리 여기는 것이 편했다.
이제 와서 오해였다고 한들 시간은 너무 많이 지났고, 애초에 오해였을 리도 없었다. 나는 확실히 그날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물으려 입을 뗐다.
그러나 은은한 석양이 지고 있는 아래, 나는 예상과 달리 길쭉하게 빗겨 나간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끝났나?”
“어…… 아빠?”
레르하겐이 숲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은은한 은빛 머리카락이 그대로 석양의 물을 먹어 우아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아래 무심하고 나른한 얼굴이 나를 보다가 내 뒤에 있는 기사들, 그리고 다시 나를 한 번 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이곳으로 온다는 말은 안 했는데.
“에스트리아의 보좌관이 너를 찾더군.”
“아.”
“겸사겸사 데리러 왔다.”
겸사겸사?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조금 의문이 들어 레르하겐을 응시했으나, 그는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냐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무슨 존재가 모르는 게 없어.’
하지만 어쨌든 그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은 사실이었고, 세베르와 같은 마차나 말을 타고 가야 하는 극도로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이 순간만큼은 그의 힘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럼 나는 아빠랑 돌아갈게. 오늘 수고했어. 나 보호해 주느라.”
나는 일부러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그에 기사들이 환하게 웃으며 덩달아 손을 흔들었다. 물론 다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깨닫고 다시 정중하게 예를 취했지만.
이제는 이 짓거리도 하다 보니 수치심이 점점 줄어드는군.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레르하겐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이제 빨리 나를 데리고 이 불모지를 좀 벗어나 줘요, 그런 눈빛을 담아 그를 보는데 그때 갑자기 세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뒤 사냥, 폐하도 참석하십니까?”
공식적으로 황제가 여는 사냥인데 황제가 참여하지 않겠냐. 그러나 세베르가 묻는 것은 그 뜻이 아님을 나와 레르하겐은 알았다.
레르하겐은 세베르를 힐긋 보다 대꾸했다.
“모른다.”
말을 마치자마자 내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일말의 자비와 여지도 없이 마법을 발현한 레르하겐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하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피곤해.”
그러나 내가 말을 채 맺기도 전이었다.
“폐하,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린 듯 리건은 품에 서류를 잔뜩 안고 한쪽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얼굴은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치프 숲. 사전 답사를 다녀왔어. 뭐, 좀 계획이 틀어졌지만.”
“그럼 말씀을 해 주시지. 놀랐잖습니까. 보고를 하러 왔는데 폐하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고, 그저 보고를 하러 왔는데 갑자기 방에 안 계셔서 놀랐습니다. 평소에 언질도 없이 장기간 사라지시는 분이 아닌지라, 그래서 레르하겐 님께 도움을 요청드렸습니다. 이렇게 빨리 찾아내실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말하며 리건이 레르하겐을 힐끔 보았다.
그에 덩달아 나 또한 레르하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레르하겐은 저번에 내가 납치범을 따라갔을 때도 꽤 빠르게 나를 단숨에 찾아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일까.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레르하겐이 무심하게 나를 힐긋 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사하게 데려왔으니 난 이만.”
“아, 잠깐만요, 사냥이 곧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래.”
혹시나 하여 다급하게 말을 덧붙이자 레르하겐이 짧게 답했다. 곧 그가 사라지자 나는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숲에 다녀오셨다면서, 왜 이렇게 길게 자리를 비우셨습니까?”
“중앙기사단을 만났어. 숲에 들어가려던 걸 저지당했지. 거기서 좀 시간 낭비를 했어. 혼자 왔다고 하니까 절대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이래서 어린애는…….”
“당연한 겁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애초에 어린아이를 숲에 들여놓지 않는다고요. 아니, 그러면 더 빨리 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나 말을 잇던 나는 문득 저도 모르게 세베르의 모습을 상기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일말의 감정도 배어 있지 않은 그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싫어한 적이 없다고 했지.
그것을 덜컥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 몇 년 동안 그를 봐 온 것과 묘하게 달라서 그런 것일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별거 아니야.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어. 결론적으로 숲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됐지 뭐. 덕분에 대충 지형도 파악을 했고 말이야.”
리건은 갑자기 내가 말을 돌리자 다소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나한테 넘겼다.
“사실 오늘 폐하를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이것 때문입니다.”
“이게 뭔데?”
나는 리건의 손에서 문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탑에서 온 것으로서, 그 위에는 마탑주의 인장이 마력으로 동봉되어 있었다.